‘미국 우선주의’를 내건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으로 우리 경제와 안보 불안이 증폭되는 가운데 계엄·탄핵 정국이 장기화하면서 국정 리더십 공백 우려가 커지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결정을 앞두고 국민들은 ‘심리적 내전 상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분열상을 보이고 있다. 김부겸 전 국무총리는 10일 서울경제신문과 인터뷰를 갖고 “이제는 적대와 증오를 거두고 국민들을 통합해 우리나라를 다시 ‘공존의 대한민국’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정치권부터 상대방에 대해 반대만 잘 하면 존재 이유가 주어지는 비토(veto·거부권) 정치를 넘어 함께 잘 사는 길을 찾는 비전 정치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윤 대통령 탄핵심판에 대해 “헌재가 신속하게 심리 절차를 진행하되 절차상 작은 흠결도 남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공정성에 의문이 된다면 국론 분열이 증폭되면서 나중에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는 사태가 올 수 있다”고 했다.
-지금 정치권이 가장 우선시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
△민주주의와 민주공화국에 대한 윤 대통령의 근본적인 이해가 부족하다 보니 이런 사태를 맞았다. 헌법과 법률 질서에 따라 정국 혼란을 하루빨리 정리해 국민들을 안심시켜야 한다.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이번 계엄을 ‘국내총생산(GDP) 킬러’라고 표현하면서 “한국의 5100만 국민이 할부로 지불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여야가 국정 안정과 민생 회복을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하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 국민 지원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계엄 청구서’를 일시불이 아닌 할부로라도 지불하면서 어려운 시기를 극복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은 국가 위기 극복을 위해 계엄을 선포했다고 주장한다.
△윤 대통령은 계엄 실패 직후 대국민 담화에서 “모든 법적·정치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고 했다. 지금은 스스로 한 말을 다 뒤집고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부하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국민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죄송하다”는 말도 없다. 국가의 최종 책임자로서 무책임하고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국민의힘 주류는 윤 대통령과의 거리 두기에 대해 부정적인데.
△여당 지도부가 윤 대통령을 면회한 뒤 대리 변명하는 것을 보면 제정신인지 의심스럽다. 일부 의원들은 극우 유튜버들처럼 ‘부정선거’ 운운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비상계엄으로 법률과 헌법, 민주주의 가치를 전면적으로 짓밟았다. 어물쩍 넘어갈 수 없고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 먼저 ‘탄핵의 강’을 건넌 다음에 “대한민국을 이렇게 책임져보겠습니다”라고 얘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최근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이 오차범위 내로 좁혀졌다.
△처음 그런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을 때 “이게 사실인가” 싶어 믿기지 않더라. 한덕수 국무총리 탄핵소추, ‘카카오톡 검열’ 논란 등 민주당이 강경 일변도로 간 것에 대한 국민적 피로감이 있는 것 같다. 원내 제1당인 민주당이 국정 안정과 민생 회복에 더 앞장서라는 국민들의 경고장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민주당이 글로벌 관세 전쟁, 고환율·고금리·고물가에 시달리는 한국 경제에 더 신경을 쓰고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민주당이 ‘이재명 사당(私黨)’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데.
△우리 당이 어려울 때 강성 지지자들이 지켜준 공은 분명하다. 하지만 탄핵 정국이 끝난 뒤 집권을 위해 국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으려면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본다. 역사적으로 민주당은 민주성과 포용성·다양성 등 전통적 가치를 잘 지켰을 때 어떤 어려움도 극복했다는 점을 명심했으면 좋겠다. 민주당이 갈등 조정 리더십을 통해 대한민국을 공정한 공화국으로 만드는 모습을 보여줘야 국민적 신뢰와 지지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재명 대표가 연일 ‘실용주의’를 외치고 있다.
△여러 국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고민해서 답한 것 같다. ‘성장 없는 분배’나 ‘분배 없는 성장’ 모두 지속 가능하지 않다. 과거 고(故) 김대중 대통령도 1997년 외환위기 때 ‘생산적 복지’를 내세워 한국 사회의 근본 틀을 바꾸는 결단을 내렸다. 다만 민주당의 핵심 가치나 정책 노선에 대해 일부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면 정책위원회 등에서 당내 토론과 이해 당사자 의견 수렴의 절차를 거쳤으면 좋겠다. 그래야 국민들이 봤을 때 더 믿음직스럽지 않겠는가.
-일각에서는 민주당이 집권하면 ‘친중(親中)’ 정권이 될 것으로 우려한다.
△지나친 낙인 찍기라고 본다. 대통령이 누가 되든 한미동맹이 안보의 기본 플랫폼이라는 점을 어떻게 부인하겠는가. 오히려 트럼프 행정부가 우리 경제와 안보를 하나로 묶어 동맹이 아닌 거래와 협상의 대상으로 삼는 상황이 더 두렵다. 앞으로 정치권과 정부에다 민간 기업까지 포함한 ‘여야민정협의체’를 만들어 다양한 안보·경제적 갈등에 대비하고 협상안을 준비해야 한다. 미국 사정을 가장 잘 아는 기업들이 빠진다면 협상안 디테일이 약해지면서 대미 협상을 성공시킬 수 없다.
-중국과의 관계는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가.
△우리가 미국의 대중 제재를 거스를 수는 없다고 본다. 하지만 중국은 우리나라 최대 교역국이자 수출국이다. 싫든 좋든 최대한 양국 간 경제 협력을 통해 실익을 챙기도록 해야 한다. 우리 기업의 기술력이 중국에 거의 따라잡혔는데 미중 패권 경쟁으로 다시 분발할 수 있는 시간을 번 측면도 있다.
-2030 남성들은 ‘민주화 세대’를 불신하고 있다.
△끊임없는 경쟁에 내몰리고도 좋은 일자리, 내 집 마련 등 미래 희망이 사라진 데 대한 좌절감이 큰 것 같다. 부모 세대로서,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서 정말 부끄럽고 죄송하다. 신사업을 육성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주거 지원 프로그램 등을 마련해 ‘지금 현실은 답답해도 내일은 나아지겠지’라는 희망을 보여줘야 한다.
-국민연금 개혁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연금을 무조건 많이 받아갈 수는 없다. 연금 보험료율(내는 돈)을 올리고 연금 수령 나이를 조정해서 고갈 시기를 늦춰야 한다. 청년층은 자신들이 돈만 내고 연금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크다. 기금 적립액이 고갈되더라도 연금 지급은 국가 존립에 관한 문제인 만큼 분명히 책임진다고 확실히 약속하고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진영 갈등과 국민 분열이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여야가 계속 싸움을 일삼으면서 양쪽 진영에 묶어두니까 갈등 해소가 안 된다. 승자가 모두 독식하니 패배한 쪽은 불복 심리를 가지게 된다. 또 다른 국민들의 위임 기관인 국회도 승자 독식 선거 제도로 돼 있다. 정치적 소수자, 차점자의 목소리가 반영될 여지가 없다. 이번에 이런 것들을 확실히 손질해서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구체적인 개헌 방향을 놓고 백가쟁명식 주장들이 나온다.
△어떤 체제를 도입하건 ‘87년 체제’의 유산인 제왕적 대통령제를 민주적 대통령제로 바꾸는 것이 급선무라고 본다. 개헌안에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 분산, 여소야대 국면에서 대통령과 국회 간의 갈등 해소 방안 등이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되면 여야가 서로 타협하고 국민들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지고 성과를 내면서 보람도 나눠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 집권 당시에는 현행 대통령제 시스템이 큰 무리 없이 작동했다.
△그분들은 풍부한 정치 경험과 협치 능력을 갖고 있었고 당시 여야 간 균형도 어느 정도 잡혀 있었다. 지금 정치인들은 훈련이나 경험이 부족하다. 또 YS·DJ 이후로 승자 독식 정치가 너무 길어지면서 고착화됐다. 대통령 권력과 의회 권력이 이토록 극단적으로 충돌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지금의 정치적 극한 대립은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키를 쥐고 있는 이재명 대표는 개헌에 소극적이다.
△대선 국면에 들어가면 여기저기서 개헌 요구가 분출되면서 이 대표도 자기 입장을 밝힐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본다. 지금이라도 국회가 중심이 돼서 민간단체 등이 참여하는 개헌 토론회를 시작해야 한다. 주요 대선 주자들이 국민들에게 개헌을 약속하고 빠르면 내년 지방선거, 늦어도 다음 총선 전까지는 개헌을 매듭지어야 한다.
-조기 대선 가능성이 커졌는데 대선 주자들의 대국민 비전은 무엇이 돼야 하는가.
△국민들 간의 정서적 내전 상태를 종식하고 인공지능(AI) 시대 도래라는 문명사적 도전에 대비하는 새로운 공화국, 새로운 대한민국을 준비해야 한다. AI 시대가 도래하면 우리 공동체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차기 대선에 출마하는가.
△윤 대통령 탄핵 인용 여부가 아직 불확실하기 때문에 쉽사리 답변할 수 없는 상황이다. 다만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서 어떤 모습이 책임지는 모습일까, 아직 고민 중이다. 우리나라를 다시 ‘하나의 대한민국’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청년들의 미래, 지방 소멸, 저출생·고령화 등 산적한 국가 현안들을 풀 방법이 없다. 이것은 진보나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외면한다고 피해갈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이런 문제 해결을 위해 주어진 사명이 있다면 마다하지 않겠다.
◆He is…
1958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경북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행정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77년 유신 반대 시위 등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다가 두 차례 실형을 받았다. 1988년 한겨레민주당에서 정치를 시작한 뒤 ‘꼬마 민주당’을 거쳐 한나라당 당적으로 16대 국회에 입성했고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에 합류했다. 이후 17·18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20대 총선에서 민주당 계열로는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처음으로 대구 지역(수성갑)에서 승리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행정안전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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