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하자고 매달리는 예술가와 일을 하면 그 사람의 집사가 되기 쉬워요. 하지만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있어서 누군가를 설득할 때는 그 사람의 예술적 욕망이 꿈틀거리게 만들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해야 해요.”
그렇게 연극 연출가인 고선웅에게는 창극을, 국내 대표 패션 디자이너인 정구호에게는 한국 무용을, ‘가왕’ 조용필에게 클래식 콘서트라는 예술적 비전을 제시했다. 국내 예술계를 한 단계 풍요롭게 만든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이 그 장본인이다.
안 사장은 최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진행한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태생부터 문외한으로 성공과 실패를 하나하나 직접 느끼면서 극장을 이해하게 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정의하며 “관객을 위로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 기획자가 되고 싶다”고 밝혔다. 안 사장은 1984년 예술의전당 공채 1기 직원으로 시작해 서울문화재단 대표(2007~2011년), 국립중앙극장장(2012~2017년)을 거쳤다. 국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전문 예술 경영인으로 평가를 받는다.
2021년 처음 세종문화회관 사장으로 부임하면서 발견한 점은 고정된 관객이 없다는 것이었다. 뮤지컬이나 콘서트를 열 때마다 아티스트 및 작품에 따라 관객층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때부터 ‘레퍼토리 제작 극장’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했다. 직원들에게 늘 하는 말은 “우리는 예술 생산 그룹”이다. 모두에게 무색무취한 극장이 되기 보다는 뾰족한 매력을 가진 극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종문화회관을 상징하는 로고와 각종 브랜드 이미지를 통일하는 한편 세종문화회관이 모으고 싶은 관객층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데 주력했다. 그 결과 세종문화회관은 국내 공연장 최초로 ‘구독’ 서비스를 도입했고 2년 연속 출시 당일 매진 기록을 세웠다.
지난해 10월 연임에 성공하면서 예술단 중심의 제작 극장이라는 정체성을 강화하고 레퍼토리 공연을 다양하게 확보하기로 했다. 그는 “1년에 두 작품밖에 안 하면 단장이 새로 왔을 때 본인 작품을 내놓기 바빠서 기존의 레퍼토리 공연을 하지 않는다”며 “작품을 2~3배는 늘려야 하고 레퍼토리 공연을 그 만큼 확보해야 한다. 이를테면 새로운 단장이 오더라도 고선웅 연출의 ‘퉁소소리’는 레퍼토리로 계속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극장마다 이렇다 할 레퍼토리 공연이 거의 남지 않는 이유를 두고 “오늘의 관객을 위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뼈아픈 지적을 했다.
그는 ‘미다스의 손’이라는 업계의 평가를 전하자 스스로 태생적으로 예술과는 거리가 멀다고 손을 저었다. 기획자는 고상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잡놈’에 가깝다고 강조한다. 예술을 몰랐기에 관객을 연구하는 우회로를 택했다는 것이다. 2000년대 초 국내 최초로 말러 교향곡 전곡을 연주하는 공연을 연 뒤 말러 붐을 태동시킨 것도 그 사례다. 그가 꼽는 ‘스몰 석세스’의 순간이다. “예술에 대해 잘 모르니 집요하게 관객을 관찰했어요. 매일 티켓 판매 현황을 확인했죠. 어느 날 운영팀에서 이상하다고 하더라고요. 관객들이 티켓을 한 장만 사고 프로그램북이 동 날 정도로 많이 팔렸다는 거에요.” 이상한 마음에 공연 전 로비에 나가보니 조용한 로비에서 저마다 프로그램북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때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카데믹한 관객들을 위해 공연 전에 말러에 대해 배울 수 있는 말러 토크를 열어보자.’ 사전에 해설을 듣고 공연을 관람하는 프로그램에 관객들은 뜨겁게 환호했고 그게 말러 붐의 시작이었다.
안 사장은 극장장으로서 한 단계 성장하게 된 계기로 서울문화재단 대표로 일하던 순간을 꼽았다. 그는 “예술의전당에서 일할 때만 해도 서울 시민의 5%에 해당하는 관객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게 일이었다면 서울문화재단에서는 그 5%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하게 됐다”며 “예술의전당에 있을 때는 몰랐던 두터운 예술적 수요와 예술가들의 활동 양상도 다양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됐다”고 말했다.
연임으로 세종문화회관에서의 두 번째 챕터를 열게 된 그의 숙원 사업은 제2세종문화회관 건립이다. 여의도 일대에 제2세종문화회관이 옮겨가면 기존의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자리에는 클래식 공연을 위한 전용홀을 마련할 예정이다. “저는 무대로 들어가는 출입문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아요. 어느 정도 폭이 돼야 넓은 폭의 드레스를 입은 배우들이 불편하지 않게 들어갈 수 있는지를 보죠. 해외 공연장에 가도 분장실을 지나 무대로 향하는 복도의 설계를 살펴요. 지휘자나 연출자를 비롯한 스태프들이 무대로 이동하면서 진행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고려돼 있는지도요.”
지금도 그의 제일 관심사는 대극장에서 관객의 시야를 최대한 확보할 수 있는 좌석 배치 등 극장의 설계다. 그는 “오랫동안 서울 예술의 중심이었던 세종문화회관이 예술의전당 개관 후 자리를 뺏긴 것은 ‘클래식 공연장으로서의 전용성’ 때문”이라며 “전용홀이 마련되면 강남에 집중됐던 예술 공간이 분산되고 세종문화회관 개관 50년 만에 예술적 중심이 돌아오는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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