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화된 예술의 틀에 얽매이지 않았던 예술가 백남준의 실험 정신을 이어갈 아시아 젊은 작가 일곱 팀의 기획 전시가 열린다. 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려진 세계를 탐구해 이면의 풍경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도전과 노력이 담긴 작품 14점을 선보일 예정이다. 절대적 진리와 자신의 앎에 끝없는 의문을 제기하며 성찰했던 백남준의 발자취를 따르는 이들 작가의 도전이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자극할 수 있을지 관심을 모은다.
경기문화재단 백남준아트센터는 올해 첫 전시로 젊은 작가들의 설치 작품 14점을 공개하는 ‘랜덤 액세스 프로젝트 4.0’을 20일부터 약 4개월간 선보인다고 19일 밝혔다. 백남준아트센터가 비정기적으로 기획해 선보이는 ‘랜덤 액세스 프로젝트’는 유연한 사고로 경계를 허무는 젊은 예술가를 발굴하고 소개하는 프로젝트이다.
프로젝트 이름은 백남준이 1963년 독일에서 개최한 자신의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에서 선보인 동명의 작품에서 따왔다. 오디오 카세트에서 꺼낸 마그네틱 테이프를 여러 조각으로 잘라 벽에 붙인 뒤 관람객이 원하는 테이프 부분의 조각을 직접 긁어 녹음된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한 작품이다. 작품이 주는 즉흥성, 비결정성, 상호작용, 참여라는 키워드에서 영감을 받은 젊은 작가들이 동시대의 실험적인 도전을 펼칠 수 있도록 무대를 마련하는 것이 기획의 취지다.
네 번째 프로젝트인 이번 전시에는 고요손, 김호남, 사룻 수파수티벡(태국), 얀투(일본), 장한나, 정혜선·육성민, 한우리 등 일곱 팀이 참여했다. 참여 작가들이 동시에 주목한 것은 이른바 ‘가리워진 세계’라고 할 수 있다. 한우리는 ‘포털’이라는 작품을 통해 ‘내가 보여주는 모든 것은 거짓이다’는 경구로 표현될 법한 현대 미디어의 모순을 다룬다. 화려한 미디어 영상의 이면에 숨겨진 인간의 노동과 부산물 등을 드러냄으로써 기술 발전에서 배제된 가치들을 일깨우려는 시도다. 그러면서도 영사기나 필름, 모자이크 타일 등 아날로그적 소재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의미심장하다. 작가는 작업 과정을 돌아보며 “이른바 올드미디어로 불리는 소재로 작업을 했는데, 이것이 내게는 오히려 신기술처럼 여겨졌다. 신기술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됐다”고 말했다.
일본 작가 얀투는 ‘진행 중인 설치’를 통해 미술 시스템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작품은 자동운반차량(AGV)이 전시 공간을 누비며 다양한 오브제를 전시, 철거하는 과정을 반복하는데, 이때 AGV는 ‘예술품’과 ‘예술품이 아닌 것’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대상을 동등하게 다룬다. 백남준의 작품도, 무선청소기도 기술에는 동등한 무게로 여겨질 뿐이라는 허점을 시각화된 형태로 직관하게 해주는 셈이다. 아울러 ‘보여주는 것’이 핵심인 미술관의 작업 대부분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계의 힘을 빌려 진행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려내며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생각하게끔 한다.
‘인간과 기술의 낙관적 공존’을 모색한 백남준의 정신을 이어받은 작가들도 있다. 장한나는 플라스틱이 자연의 바람과 파도 속에서 돌처럼 변모한 것을 ‘뉴 락(새로운 돌)’으로 규정하면서 오늘날 자연에서 진행되고 있는 새로운 지층을 탐구했다. 작가가 7~8년간 수집한 이 인공적인 돌은 자연 속의 돌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이며 우리 일상의 달라진 생태계를 그대로 드러낸다. 정혜선·육성민은 GPS 태그를 장착한 동물을 소재로 미래의 초연결된 동물 생태계에 대한 탐구를 ‘필라코뮤니타스’라는 작품으로 표현한다. 이 밖에 고요손은 백남준의 상호작용을 키워드 삼아 예술 창작의 동반자인 전시기획자와 아버지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을 선보이며 관람객을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경계 확장을 시도했다.
박남희 관장은 “앞으로도 백남준의 예술 정신을 세계와 공유할뿐 아니라 동시대 실험성과 창의성을 인큐베이팅하는 기관으로 미래 백남준을 발굴하는 미션을 수행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6월 2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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