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 테이블을 정리해 보자면 한국과 미국의 대선이 있기 전인 2021년에 시나리오를 썼고 2022년에 촬영을 했으며 2023년에는 ‘크리퍼’ 등 그래픽을 만들었어요. 스토리보드에 이미 다 그려져 있던 내용입니다.”
국내외 언론 시사회를 통해 베일을 벗을 때마다 영화 ‘미키 17’은 놀라움 자아냈다.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에 이어 6년 만에 선보이는 SF 영화의 압도적인 스펙터클과 사회를 향한 메시지는 물론 최근 국내외 정치 상황 및 현실과의 높은 싱크로율에도 관심이 쏠렸다.
최근 기자들과 만난 봉 감독은 “외국에서 먼저 선보였을 때 당신의 뒷방에 ‘크리스털 볼(점을 칠 때 사용하는 수정 구슬)’이 있냐고 저에게 반복적으로 물었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정치인 마셜(마크 러팔로)이 총격을 당할 때 총알이 살짝 스치는 장면이나 얼음 행성 ‘니플하임’의 토착 생명체인 ‘크리퍼’들이 평화적인 시위를 하는 장면 등이 요즘 국내외 정치·사회 상황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해서 그런 반응이 나왔다는 것이다. 봉 감독은 “저는 절대 점쟁이나 예언자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영화에서 전직 의원이자 독재자로 상징되는 마셜은 영화의 배경인 2054년에 등장하지만 과거나 현재에도 존재하는 정치인이다. 다만 이러한 인물이 더욱 부각되고 인기를 얻는 이유는 시대 상황과 맞물릴 수밖에 없다. 마셜에게서 우리가 생각하는 독재자들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은 현재 정치가 주는 스트레스에 기인한 것이라고 봉 감독은 설명했다. 그는 “정치적인 스트레스가 영화와 마셜 캐릭터에 투사되는 것 같다”며 “우스꽝스러운 정치적 현실, 정치적 포맷을 마셜 역의 마크 팔로우가 ‘찰지게’ 표현했다”고 말했다. 이어 “악역이 원래 매력이 있어야 하는데 독재자들에게는 묘한 거부할 수 없는 매력, 귀여운 구석이 있다”며 “이 매력과 귀여움으로 대중을 현혹시키고 휘어 잡아서 독재가 가능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20일 서울 삼성동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마크 러팔로는 “제가 맡은 마셜 역에서 도널드 트럼프 등 특정 인물이 떠오른다고 이야기하는데 특정 인물이 아닌 쩨쩨하고 그릇이 작은 정치인과 독재자들을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봐 왔다”면서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면서도 굉장히 연약한 자아를 갖고 있고 그러다 결국 실패하는 과거와 현재의 정치인들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영화에서 마셜의 액센트와 말투가 계속 변화하는데 인물에 대한 해석의 여지를 주기 위함이었다”며 “전 세계의 과거와 현재 지도자를 연상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영화는 이처럼 국내외 정치 현실의 판박이나 예언서 같기도 하지만 미래를 배경으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 이야기하는 봉 감독만의 독창성과 통찰이 빛을 발한다. 2054년이 배경으로 우주 행성을 개척하고 인간을 프린팅해서 사용하고 버리는 ‘익스펜더블(소모품)’이 등장하지만 ‘휴먼 프린터'와 우주선을 제외하고는 모든 세트가 산업혁명, 산업화 시대 등을 연상하게 한다. 이에 대해 봉 감독은 “팬시한 SF 영화 같기보다는 되게 지저분한 화물선 느낌으로 우주선이 보여지기를 바랐다”며 “또 영화 첫 장면이 아주 오래된 시계로 시작하고 미키의 기억이 저장되는 게 ‘적벽돌’인데 구닥다리 같은 ‘룩’을 보여줌으로써 과거, 현재, 미래가 뒤섞이며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이길 바랐다”고 설명했다.
영화 속 등장 인물과 소품 등 모든 것이 다양한 의미를 만들어내면서 확장하는 게 ‘미키 17’이 가진 힘이다. 그렇다면 봉 감독과 배우들은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을까. 봉 감독은 “미키는 여러 힘든 상황에서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았다”며 “연약하고 불쌍한 청년이 결국 파괴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미키의 여자친구 나샤 역을 맡은 나오미 애키는 “나샤와 미키는 결코 큰 그림을 통해 사회를 움직이려는 인물이 아니다”라면서 “가족,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는 평범한 사람들이 비범한 일을 해내는 ‘평범함의 힘’을 보여주는 스토리가 이 영화가 가진 힘”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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