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외연 확장을 염두에 둔 ‘중도 보수 선언’이 조기 대선 가능성과 맞물려 당내 노선 투쟁으로 불붙고 있다. 대권 레이스에서 실용주의를 내세워 중도층을 사로잡으려는 이 대표와 당 정체성을 고리로 일극 체제를 견제하는 야권 후발 주자들이 맞서는 형국이다. 이 대표의 우클릭 행보에 날을 세우고 있는 여권도 야당 분란에 끼어들면서 정치권 전체로 민주당 정체성 공방이 확산하고 있다.
이 대표는 21일 국회 최고위원회의에서 “명색이 국가 살림하는 정당이 ‘오로지 진보’ ‘오로지 보수’ 이렇게 해서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느냐. 세상에 흑백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최근 자신을 향해 쏟아지고 있는 안팎의 비판에 견제구를 날렸다. 그는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도 우리 당 입장을 보수 또는 중도 보수라고 많이 말했다”며 “안보나 경제 영역은 보수적 인사가 보수적 정책을 하고 문화적 영역은 진보적 인사들이 진보적으로 하면 된다. 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나”라고 반문했다. 앞서 자신의 ‘민주당은 중도 보수 정도의 포지션’ 발언에 발끈한 비명(비이재명계)의 비판에 민주당이 배출한 전직 대통령들을 끌어들여 반격에 나선 것이다.
이 대표는 “국민의힘의 무능과 내란 사태로 경제가 너무 심하게 악화했다”며 “진보적 정책을 기본적으로 깔고 보수 정책도 필요하면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지금은 성장이 정말 중요하고 회복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거듭 강조했다. 조기 대선 국면에서 진영 논리에 갇히기보다 정책적 역량을 갖고 민생을 챙기는 수권 정당 수장으로서의 면모를 부각하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친명계도 즉각 지원 사격에 나섰다. 김민석 최고위원은 “민주당의 가치는 일관되게 합리적 보수, 건전한 보수를 포괄해왔다”면서 “1955년 창당 때 중도적 국민 정당으로 출발해 강령에 중도를 명시해왔다”며 이 대표의 발언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정청래 의원도 “이 대표의 중도 보수론은 보수와 진보 양쪽에서 환영할 일”이라고 거들었다. 계엄·탄핵 여파로 불안정한 정국을 조속히 수습하기 위해 여당은 협치의 기회를, 야권성향의 재야인사들은 이 대표와 차별화된 공간을 확보했으니 모두가 ‘윈윈’이 아니냐는 취지다.
친명 지도부와 각을 세우다 지난해 총선 공천에서 탈락해 ‘비명횡사’ 논란의 중심에 섰던 박용진 전 의원도 이날 이 대표와 오찬을 가진 뒤 사실상 이 대표에게 힘을 실어주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이 대표가 얘기한 것은 탄핵 국면과 조기 대선 국면에서 정치적 포지셔닝을 얘기한 것이라고 생각된다”며 “국민들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할 때 예송 논쟁으로 날을 지새우는 정치 세력으로 비쳐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반면 비명계는 “민주당의 정체성을 바꿔서는 안 된다”며 파상공세를 이어갔다.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은 “민주당은 중도 보수 정당이 아니다”라며 “(중도 보수 정당 운운은) 실용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고 대표가 함부로 바꿀 수 없는 문제”라고 꼬집었다. 특히 “시장 방임이 아니라 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해온 민주당이 어찌 중도 보수 정당이겠느냐”며 “설익은 주장은 분란을 만들 뿐”이라고 질타했다.
당내에서는 주자 간 기싸움 양상을 띤 ‘뿌리 논쟁’에 대해 경계할 정도는 아니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2017년 19대 대선 당시 대세론을 형성했던 문재인 당시 후보에 맞서 이재명·안희정 후보가 협공하며 자칫 심심할 수 있었던 경선판의 흥행 열기를 돋웠던 만큼 부정적 이슈로만 볼 필요는 없다는 의미다. 한 비명계 재선 의원은 “중도 보수 논쟁이 전체적으로 민주당이나 조기 대선에는 나쁠 것 없다”며 “당 지지율이 박스권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중도층으로의 영역 확장을 꾀할 수 있을뿐더러 비명계의 반발이 경선 흥행에도 도움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야당과 중도층 쟁탈전을 벌이는 여당은 이 대표의 실용주의 노선을 ‘위장 우클릭’이라 몰아붙이면서 공세의 고삐를 죄고 있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 원내대책회의에서 “사실상 ‘두 길 보기 정치 사기’다. 실용주의 역시 ‘양다리 걸치는 기회주의’”라며 “선거 공학만 (이 대표의) 머리에 있을 뿐 국민의 미래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라고 직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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