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 독자 안보 체제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 과정에서 노골적인 친러 행보를 보이자 유럽 주요국 정상들은 ‘자강(自强)’ 의지를 다지며 대규모 국방비 증액과 공동 방위 협력을 선언하고 나섰다.
25일(이하 현지 시간)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현재 국내총생산(GDP)의 2.3% 수준인 국방비 지출 규모를 2027년 2.5%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른 추가 지출은 연간 134억 파운드(약 24조 원)로 추산된다. 영국 정부는 향후 이 비율을 3%까지 끌어올리겠다며 이는 자국의 군사력 강화뿐 아니라 유럽 내 안보 자립을 위한 핵심 조치라고 강조했다.
독일도 강한 유럽을 위해 방위비 지출을 늘리기로 했다. 이날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총선에서 제1당이 된 기독민주당(CDU)·기독사회당(CSU) 연합은 집권 사회민주당(SPD)과 함께 2000억 유로(약 301조 원) 규모의 긴급 방위비 편성을 논의 중이다. 기존 1000억 유로 규모의 특별 방위 예산은 2027년 소진되는 만큼 새 의회 출범 전 예산 확보가 시급하다는 판단에서다. 추가되는 긴급 방위비는 독일군 현대화와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한 자금으로 쓰일 것으로 전망된다. 경제 활성화에 더해 방위비 지출 증가라는 과제를 안은 독일은 GDP의 0.35% 이상 신규 부채 발행을 금지하는 재정준칙(부채 브레이크) 완화도 추진한다.
스페인도 유럽연합(EU)이 미국을 따라가지 말고 독자적인 대(對)중국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호세 마누엘 알바레스 스페인 외무장관은 24일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유럽은 중국이 언제 파트너가 될 수 있고 언제 경쟁자가 될 수 있는지를 판단해야 한다”며 “당연한 동맹이라고 생각하는 미국과 대화를 할 수는 있지만 유럽은 스스로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밝혔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전통적인 동맹관에서 벗어난 미국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만큼 안보 독립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일찍이 유럽 내 공동 방위 체제를 갖출 것을 주장해온 프랑스는 유럽의 자강력 확보와 함께 미국의 개입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24일 미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안전 보장을 위해 유럽 국가의 평화유지군 배치가 필요하다면서도 “확실한 억지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안보 위협에 대응하려면 유럽의 단독 대응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현실적인 판단에서다.
유럽 각국에서 자강론이 분출하자 EU도 자체 방위 역량 강화를 위해 머리를 맞대기로 했다. 3월 6일 특별정상회의를 열고 우크라이나 추가 지원과 방위비 조달 방안을 논의한다는 계획이다. EU 집행위원회는 향후 10년간 5000억 유로(약 750조 원)의 방위 투자가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EU 정상들이 기존 기금을 군사적 목적으로 전환하거나 각국이 자국 예산을 보다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전했다.
유럽이 안보 자립에 나서는 배경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방위비 인상 압박과 외교 노선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트럼프 행정부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에 GDP 대비 2%의 방위비 지출 목표 달성을 촉구하며 “올 6월까지 약속을 이행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더 나아가 목표치를 GDP 대비 5%까지 상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 이달 24일 열린 유엔총회에서 미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지며 유럽에 큰 충격을 안겼다. 미국은 러시아·북한·벨라루스 등과 함께 반대표를 행사했다.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 대통령이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위치를 급진적으로 재조정하고 있다”며 “미국이 러시아 등과 손잡으려 한다면 유럽과 전통 동맹국들은 독자적인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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