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궁중 음악 ‘보허자(步虛子)’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은 두 개의 무대가 3월 나란히 관객들을 만난다. 원래 보허자는 우리말로 ‘허공을 밟고 훨훨 나는 자’, 즉 중국 도교의 신선을 의미한다. 실제 도교의 의례 음악으로 연주되던 곡이 고려 시대 중국 송나라로부터 유입돼 조선 왕조 왕의 불로장생과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궁중 연례악으로 정착했다.
다음달 13일 국립창극단이 초연하는 창작 창극 ‘보허자 : 허공을 걷는 자’는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삶을 동경했지만 수양대군(세조)의 권력욕에 희생됐던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의 비극적 삶을 재조명하며 보허자의 의미를 새롭게 풀어낸다. 같은 날 국립국악원은 선율만 남고 창사(唱詞·노랫말)는 전해지지 않았던 악곡 일부를 인공지능(AI)으로 다시 쓰고 70여 명이 노래하는 무대를 통해 15세기 보허자의 웅장함을 현대에 재현한다.
‘허공을 떠도는’ 비극의 보허자들
국립창극단의 올해 첫 창극인 보허자는 수양대군이 왕위 찬탈을 위해 반대파를 숙청했던 계유정난(1453년)의 비극 27년 후를 배경으로 한다. 유배 중 사약을 받고 사사(賜死)되었다고 전해진 안평대군과 노비로 전락한 그의 딸 무심, 화가 안견 등 비극이 지나간 자리 남겨진 이들이 주인공이다. 이들은 안평의 무릉도원 꿈을 듣고 안견이 그렸던 ‘몽유도원도’를 찾아 대자암으로 향하며 과거 갈망했던 꿈과 비참한 현실을 함께 마주하게 된다.
뛰어난 창작진과 세대를 넘나드는 캐스팅이 무대를 기대하게 한다. 탁월한 구성력과 맛깔스러운 대사가 일품인 극작가 배삼식이 극본을, 소리꾼 한승석이 작창 및 음악감독을, 연극계가 주목하는 젊은 연출가 김정이 첫 창극 연출을 맡았다. 출연진으로는 주인공 나그네(안평) 역에 ‘국악 아이돌’로 불리는 극단의 간판 김준수가, 화가 안견 역에 유태평양이 나온다. 2021년 이해랑연극상을 수상한 무대 미술계의 거장 이태섭이 디자인한 무대도 주목할 만하다. 3월 13일부터 20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AI로 재탄생한 15세기 보허자
“제단에 올리는 정성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왕의 은혜는 태평성세에 달리리라(祭壇奉獻志永續, 王恩達於太平盛世).”
AI가 창작한 이 노랫말은 국립국악원이 다음달 무대에 올리는 정기공연 ‘행악과 보허자-하늘과 땅의 걸음’의 피날레로 들을 수 있다. 행악은 왕이나 왕세자가 행차할 때 연주되는 곡을 의미한다. 국악원이 행악을 주제로 공연하는 것은 2016년 이후 9년 만이다.
공연은 왕이 궁을 나서고 돌아오는 과정에 따라 구성됐다. 정악단은 궁을 나설 때 연주하는 ‘출궁악’으로 15세기 궁중 음악의 한 갈래인 ‘여민락만’을, 행차 중 연주하는 ‘행악’으로 취타와 대취타를 연주한다. 궁으로 돌아올 때의 ‘환궁악’은 ‘여민락령’을 전통 방식 그대로 연주하고, 환궁 이후 베푸는 잔치에서 울려 퍼지는 마지막 ‘연례악’으로 보허자가 준비됐다.
3악장으로 구성된 보허자의 1·2장은 한시로 된 노랫말이 있지만 3장은 선율만이 전해졌다. 국악원은 조선 왕실에서 가장 많은 한시를 남긴 효명세자의 시 350편을 AI에 학습시키고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의 한시 100여 편을 대조군으로 설정해 새로운 왕실의 노랫말을 탄생시켰다. 70여 명의 가객이 노래하고 무용단까지 등장하는 화려한 무대를 통해 궁중 음악의 웅장한 멋을 느낄 수 있을 전망이다. 다음달 13~14일 국립국악원 예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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