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라 작가는 영상과 설치 작업으로 대중에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그의 작업에는 사실 경계가 없다. “기법보다 중요한 것은 메시지”라고 말하는 작가는 영상부터 회화, 조각, 사진, 음악과 무용까지 다양한 미디어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펼친다. 그러나 그의 작업에도 시작점은 있으니 바로 드로잉이다. 공동체의 숨겨진 이면과 예술의 사회적 역할 등을 줄곧 고민해온 작가는 어떤 사회적 현상을 마주할 때 받는 여러 감상을 즉흥적으로 그려서 기록해둔다고 한다. 그에게 드로잉은 프로젝트 시작 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일종의 수행이자 개념을 다듬고 사유를 확장하는 과정이다. 유화 물감을 굳힌 형형색색 오일 바로 그려낸 그림들은 그 자체로 작가의 생각을 담은 완결된 작품이 되기도 한다.
서울 홍지동 본화랑과 웅갤러리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는 김기라 개인전은 이런 작가의 사유를 만나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이웃한 두 갤러리의 연합전 형식으로 열리는 이번 전시는 3개 공간을 각각 하나의 챕터로 구성해 작가의 다채로운 작업을 한 자리에 만나볼 수 있도록 했다.
본화랑 지하 1층 공간에는 작가가 2013년부터 한지 위에 그려온 드로잉 페인팅 시리즈 중 최근작 39점이 걸렸다. ‘우리에 어디에 있는 줄 모르고’라는 이름을 내건 이 공간에서는 오늘날 한국 사회 내부에서 제기되는 대립과 모순, 상충 등의 감정을 묘사한 여러 드로잉을 통해 작가 특유의 따뜻하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경험할 수 있다.
작품은 제목과 묘사를 곱씹으며 어떤 의미를 품었을지 유추하는 재미가 있다. 예컨대 ‘균형 유지(Keeping Balance)’라는 작품 속 팔과 머리 위에 올린 여러 개의 공을 떨어뜨리지 않으려 부단히 애쓰는 인물의 이면에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도 균형감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현대인의 불안감이 떠오른다. 다른 이의 등에 올라타 신나게 춤을 추고 있는 작품에는 ‘현대성(modernity)’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타인을 착취하는 자가 권세를 누리는 세상을 위트 있게 꼬집는다. 드로잉은 영상과 설치 퍼포먼스 작업의 기초가 되기에 똑같은 높이로 구성됐다는 게 특징이다. 오일 바가 빚어낸 다채로운 컬러감이 주는 시각적 즐거움도 풍성하다.
웅갤러리 2층 전시장은 드로잉에서 출발한 작업이 실제 어떻게 설치 작업으로 구현됐는지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미국 마블 시리즈 속 영웅들의 다층적인 면모를 3차원 목조각으로 풀어낸 ‘수퍼히어로-몬스터’ 작업과 그 출발점이 됐던 유채화 방식의 드로잉을 동시에 배치했다. 이주현 큐레이터는 “작가가 조각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검토했던 모든 생각들이 드로잉에는 고스란히 드러나기에 함께 감상하면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며 “영화를 볼 때와 책을 볼 때 상상의 범위가 다르듯 2차원 드로잉에서 오히려 더 자유롭고 입체적인 느낌을 받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도로와 맞닿은 큰 창으로 내부가 들여다보이는 웅갤러리 1층은 작가의 최근 4가지 프로젝트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만나는 일종의 쇼케이스로 꾸며졌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성스러운 빛을 형상화한 광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프로젝트부터 방송이 끝난 후 화면조정 시간에 나오는 컬러바를 카펫으로 표현한 작품 등이 자리했다. 2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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