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서 연공형 임금체계의 대표적인 유형인 호봉급(호봉제)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호봉제는 우리나라 고용시장의 임금 격차를 확대한 원인 중 하나로 노동개혁의 과제 중 하나로 지목돼 왔다. 공정한 성과 보상 요구와 고령화, 정년 연장 논의가 확산하는 것도 민간기업 스스로 호봉제를 폐지하고 있는 배경으로 거론된다.
9일 고용노동부의 작년 6월 말 기준 사업체노동력조사 부가조사에 따르면 1000인 이상 사업체의 호봉제 도입률은 63%로 전년 동기 대비 2.1%포인트 하락했다. 도입률은 2021년 70.3%를 기록한 이래 매년 평균 2%포인트씩 감소하고 있다. 이 속도라면 올해 조사에서 도입률이 60%선 아래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호봉제는 1960~1980년 경제개발기에 대기업이 근로자의 장기 근속을 유도할 목적으로 도입해 확산됐다. 하지만 경직된 임금 체계인 호봉제는 노동시장 이중구조 심화라는 역효과도 낳았다. 노동시장 이중구조는 임금, 고용형태, 기업 규모별 시장 내 격차를 뜻한다. 이미 경영 성과가 중소기업 보다 높아 임금 지급 여력이 높은 대기업이 호봉제를 활용한 탓에 고용시장 내 임금 격차가 심해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 조사를 보면 300인 미만 사업체의 호봉제 도입률도 12.7%로 300인 이상 사업체(58%)의 5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고용시장에서 근로자의 임금 격차는 심각한 상황이다. 고용부의 고용형태별 근로실태조사에 따르면 작년 6월 기준 300인 이상 사업체 근로자의 정규직 시급을 100으로 놓으면 300인 미만 비정규직은 44.1에 불과하다. 비정규직은 새로운 산업의 출현과 기술 발달, 고령화와 생산가능인구 감소로 인해 앞으로 더 늘 전망이다. 작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8월 기준 비정규직은 845만9000명으로 통계 작성 이래 최대치를 기록했다.
청년 세대가 공정한 성과 평가와 보상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상황도 대기업들의 임금 체계 개편의 이유로 꼽힌다. 작년 11월 한국경영자총협회가 미취업 청년 1000명을 대상으로 취업 준비 설문을 한 결과에 따르면 ‘괜찮은 일자리’ 인식에 대한 질문(복수응답)에 워라밸(59.2%), 복지제도(54.2%)에 이어 공정 보상(50.1%)이 답변 상위권에 포함됐다. 하지만 고용부 부가조사를 보면 기업들 중 64%는 ‘임금 체계가 없다’(무체계)고 답했다.
정년 연장 논의도 호봉제의 위축을 불러왔을 가능성이 있다. 경영계는 호봉제를 유지한 채 법정 정년 연장이 되면 기존 직원 고용 유지 부담이 커 청년 신규 고용이 어렵다는 입장이다. 결국 정년 연장으로 인한 이득은 대기업의 기존 노동자들에게 쏠릴 상황이다. 이번 조사를 보면 300인 이상의 정년제 도입률은 95.3%다. 하지만 300인 미만은 4분의 1 수준인 21.6%에 머물렀다.
매년 정부는 임금체계 개편을 노동 개혁 과제로 제시했다. 하지만 노동계 반발, 호봉제를 대신할 직무급과 직능급 수요 부족 등으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박종식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대기업은 호봉제보다 직원들과 개별 연봉 협상을 늘리고 있는 상황”이라며 “이중구조 해소와 공정한 보상을 위해 임금 체계가 없는 사업장이 빨리 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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