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도 더 된 얘기다. 1999년 제1회 핀크스컵 한·일 여자프로골프 대항전에 일본팀을 이끌고 참가한 일본여자프로골프협회(JLPGA) 히구치 히사코 회장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이미 박세리가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하면서 한국 여자골프가 세상에 널리 알려졌지만 국가적으로는 일본 여자골프가 한국 보다 한 수 위인 때였다.
히구치 회장은 당시 “한국 여자선수들의 스윙은 아주 좋다. 위협적일 정도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나이도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게 문제다”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한일 여자골프 수준이 역전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박세리의 영향을 받은 한국 여자골퍼들이 적극적으로 미국 무대에 도전하고 반대로 일본여자골퍼들은 편안한 자국 투어에 안주하면서 기량과 수준이 뒤바뀌었다. 한일 여자골프 대항전이 어느 순간 사라진 것도 두 국가 간 수준이 맞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신인 랭킹은 일본여자골퍼가 휩쓸고 있다. 1위 다케다 리오, 2위 야마시타 미유, 3위 이와이 아키에, 6위 바바 사키, 7위 이와이 치사토까지 상위권에 올라 있다. 올해 대한민국 유일의 LPGA 신인인 윤이나는 8위를 기록하고 있다. 작년 사이고 마오가 신인왕에 오르는 등 일본 여자골퍼의 기세가 하늘을 찌른다. 상금 랭킹에서도 다케다 리오가 1위에 올라 있고 후루에 아야카가 4위를 달리고 있다. 한국 선수는 3위 김아림, 8위 고진영이 톱10에 올라 있다. 한국 여자골프를 위협할 정도로 일본 여자골프가 강해졌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수치다. 일본 여자골프는 어느 순간 갑자기 강해진 것일까.
지난 주 한국 여자골프의 맏언니 신지애가 JLPGA 투어 상금 역사를 새로 썼다. 300번째 출전한 다이킨 오키드 레이디스에서 준우승하면서 JLPGA 투어 생애 상금 1위(13억 8074만 엔)에 등극한 것이다. 496개 대회에 출전한 일본 여자골프의 전설 후도 유리를 마침내 2위(13억 7262만 엔)로 끌어 내린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여자골프의 부흥을 이끄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주인공은 신지애라고 할 수 있다. 신지애 뿐만이 아니다. 현재 JLPGA 생애 상금 ‘톱5’ 중 4명이 한국 선수다. 3위가 전미정이고 4위 이지희, 5위 안선주 순이다. 생애 상금 11위에 올라 있는 이보미는 JLPGA 투어에서 가장 인기를 끈 최고 스타였다. 이들 한국 여자골퍼들이 일본 여자골프 성장의 자극제가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LPGA 투어에서 맹활약했던 박세리, 박인비, 박성현, 전인지, 고진영 등도 일본 여자골프를 자극했을 게 분명하다.
현재 일본 여자골프 선수들은 LPGA 투어 진출에 적극적이다. 올해 LPGA 투어 신인으로 합류한 선수들이 모두 작년 JLPGA 무대를 지배했던 선수들이다. 안주 대신 도전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KLPGA 투어 선수들은 윤이나만 홀로 LPGA 무대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가뜩이나 외로운 싸움을 해야 하는 데, 투어를 옮기는 과정에서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던 윤이나만 홀로 분투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다. 반성해야 할 것은 잘못했다고 인정하고 경쟁 상대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배워야 한다. 25년 전 그 뜨거웠던 한국 여자골프의 도전 정신은 지금 어디로 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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