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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붓질로 쌓아올린 자연의 본질이 그림 위로 내려앉다

◆강명희 개인전 '방문-Visit'

서울시립미술관 로비 들어서면

세로 5m 넘는 풍경화 '한눈에'

변함없는 자연의 본질 그려내

총 125점…60여년 여정 총망라

강명희, 북원(2002~2010). 사진 제공=서울시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1층 전시장 로비에 강명희 작가의 초대형 작품 ‘북원’이 걸려 있다. 사진 제공=서울시립미술관


2002년 프랑스 투렌 지역의 18세기 농가를 개조한 작업실에서 강명희(78) 작가는 문득 한국에서 가지고 간 물감들을 모조리 소진해 버리고 싶었다고 한다. 가로 4m, 세로 5m가 넘는 대형 캔버스를 눕히고 물감을 발로 짜냈다. 그렇게 시작해 꼬박 8년이 걸려 완성된 초대형 작품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전시장 로비에 걸린 ‘북원(北園)’이다. 초록과 붉은 빛으로 채워져 흐드러진 꽃 무리 같은 그림을 보고 있자면 식물 뿌리가 내는 신선한 흙내음이 떠오른다. 작가가 손수 풀을 뽑고 땅을 일구며 보고 만진 자연의 본질이 무수한 붓질 끝에 그림 위로 내려앉았다.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기운이 남았지만 미술관에는 성큼 봄이 들었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올해 첫 전시로 4일 개막한 강명희 개인전 ‘방문-Visit’은 빛과 색으로 가득해 봄날의 생동감을 떠올리게 하는 대형 회화 작품들로 채워졌다. 전시장 벽면을 장식한 그림들은 뚜렷한 형태가 드러나지 않아 얼핏 추상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눈앞의 자연을 담은 풍경화에 가깝다. 제주도의 한라산과 안덕계곡부터 몽골의 사막과 남극 등 태초의 풍경까지 구체적인 자연을 캔버스로 옮겼다. 다만 작가가 천착하는 것은 자연이 드러내는 찰나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본질이다. 그렇게 작가는 오랜 시간 같은 장소를 수없이 찾고 같은 풍경을 그리길 수차례 반복하면서 자연이 가진 근원과 정수 만을 가져온다. 자연과의 끈질긴 소통 끝에 탄생한 그림들은 시처럼 함축적이고 고요하지만 내면에는 터져 나올 듯한 생명력과 에너지로 충만하다. 이 풍경들에 계절이 있다면 분명히 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강명희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의 전시장. 사진 제공=서울시립미술관


전시는 1972년 프랑스로 이주한 뒤 1986년 한국 여성 작가 최초로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전시를 열었던 작가의 60여 년 예술적 여정을 총망라한다. 총 125점의 작품은 연대기적 구성이 아니라 작가의 시공간적 경험과 의식의 흐름을 바탕으로 관람 순서가 기획됐다. 작가는 자연과 존재의 관계를 탐구하기 위해 평생 세계 여러 지역을 다니고 프랑스·중국·시리아 등 세계 각국의 시인들과 교류했다. 전시명 ‘방문’ 역시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이동하며 작업한 작가의 유목민적 태도를 함축한다.

첫 번째 공간인 ‘서광동리에 살면서’에는 2007년부터 제주 서귀포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의 최근작이 전시됐다. 제주 작업실에서 보이는 솔밭 풍경을 2년에 걸쳐 반복적으로 그린 가로 5m 크기의 대작 ‘서광동리에 살면서’와 제주 송악산과 한라산의 다채로운 풍경을 혼합해 3년간의 붓질로 완성해낸 ‘초란도’ 등을 만날 수 있다. 두 번째 ‘방문’에서는 작가의 프랑스 생활과 해외 여행에서 비롯한 작업을 선보인다. 투렌의 작업실에서 그곳의 땅과 정원을 소재로 긴 시간 그려낸 ‘북원’ ‘중정’ ‘방문’ 등 작가를 대표하는 시리즈가 한 자리에 모였다. 마지막 ‘비원(秘苑)’에서는 1960~1980년대 제작된 작가의 초기작이 공개된다. 구상적 성격과 비판·서술적 경향이 짙었던 초기작에서 은유적이고 암시적인 경향으로 변해가는 작가의 예술적 여정을 따라갈 수 있다.

최은주 서울시립미술관장은 “거대한 스케일을 보여주는 작가의 회화를 감상하며 관객은 마치 경계 없는 자연 속을 거니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라며 “완숙기에 접어든 작가의 작업을 통해 자연과 인간에 대한 사유를 확장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6월 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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