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일본’이다. 5개 대회를 치른 13일 현재 신인상 포인트 상위 7명 가운데 5명이 일본 선수다. 최근 끝난 블루베이 대회에서는 톱10에 오른 11명 중에 우승자 다케다 리오 등 5명이 일본 출신이었다.
평균 드라이버 샷 260야드 이상의 장타에 쇼트 게임 기량까지 갖춘 2003년생 다케다는 LPGA 투어와 일본에서 신드롬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가을 LPGA 투어와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 공동 주관의 토토 재팬 클래식 우승에 미국 무대 직행 티켓을 따낸 다케다는 루키 시즌인 올해 다섯 번째 출전 대회에서 6타 차의 완벽에 가까운 우승을 완성했다. 컷 탈락은 없으며 톱10 진입도 세 번이다. LPGA 투어 휴식기를 맞아 일본에서 훈련 중인 다케다는 “(일본, 중국에서 1승씩 했으니) 미국 대회 우승도 하고 싶다. 첫 출전인 다음 달 메이저 대회 셰브론 챔피언십도 정말 기대된다”고 했다.
일본의 초강세를 두고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는 가운데 이보미(37)는 “골프 기술과 레슨에 부쩍 관심이 커진 영향”이라고 분석했다. 이보미는 과거 JLPGA 투어를 평정했던 선수다. 2017년까지 21승을 거뒀고 투어 역사상 최초로 올해의 선수상·상금왕·최소타수상을 2년 연속 수상(2015·2016년)했다. 은퇴 후에도 일본에서 활동이 많다. 다케다도 어릴 적 이보미를 TV로 보고 동경해왔다고 한다.
이보미는 “제가 활동할 때만 해도 일본 투어 선수들은 미국 진출에 관심이 적었는데 후루에 아야카 선수의 성공이 촉매가 된 듯하다. 키가 작은 편이고 거리도 많이 나지 않는 선수인데도 2022년 LPGA 투어 데뷔 시즌에 우승(지난해 메이저 에비앙 챔피언십도 우승)하는 등 미국에서도 통한다는 것을 증명했다”며 “이후 미국 무대 도전 쪽으로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미국 진출을 준비하면서 기술적인 면에 관심을 갖고 성장을 도모하는 과정 속에 자연스럽게 경쟁력이 올라갔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JLPGA 투어 포인트 랭킹 상위 5명 중에 무려 4명이 올해 미국으로 무대를 옮겼다. 이는 JLPGA 투어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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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자골프를 예전부터 봐온 골프 팬이라면 선수들의 전반적인 스윙 변화가 눈에 띌 것이다. 이보미도 “예전에는 오버 스윙(백스윙 톱에서 클럽이 과도하게 뒤로 넘어가는 동작)처럼 개성 있는 스윙이 많았다면 지금은 우리나라 선수들처럼 깔끔한 스윙을 하는 선수들이 주를 이룬다”고 했다. 실제로 과거 희한하다 싶을 만큼 제각각이던 일본 선수들의 스윙은 최근 몇 년 새 ‘정석’에 수렴하고 있다. 레슨에 관심이 커진 영향이다. 이보미는 “스윙 교정에 관심이 많아졌고 그래서 톱 수준에 있는 선수들의 스윙은 다들 굉장히 좋다. 전에는 쓰지 않던 트랙맨 등 론치모니터도 어느새 일반화됐다. 그렇게 계속해서 레슨을 받고 교정해나가면서 자신감을 쌓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나흘짜리 대회를 늘리고 코스도 점점 길게 세팅하는 등 JLPGA 투어 측의 변화도 한몫 했을 것”이라고도 했다. “전에는 똑바로 정교한 스타일이 유리했다면 이제 일본도 장타자가 유리한 환경으로 바뀌었다”는 설명.
고진영, 리디아 고, 박현경 등을 가르치면서 최근 일본 선수도 서너 명 지도한 이시우 코치는 “지난해 US 여자오픈을 현장에서 관전하면서 일본 선수들의 변화를 뚜렷이 확인했다. 코어의 힘을 중시하는 체계적인 트레이닝 덕에 간결한 스윙으로 안정감 있게 장타를 친다”며 “한두 명만 두각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여럿이 대체적으로 월등한 기량을 보여준다는 게 진짜 무서운 것”이라고 했다.
이 코치는 “투어에서 해외 대회를 많이 나갈 수 있게 여건을 만들어준 게 크다. 외국 코치들한테 레슨 받는 일도 흔해지고 LPGA 투어의 일본 선수들끼리 경쟁도 치열해지면서 좋은 성적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도 해외 진출하려는 선수들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방향으로 가면 좋겠다. 그렇게 해외 경험을 쌓은 선수들은 훗날 꿈나무를 가르치거나 자체로 귀감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다시 훌륭한 기대주들이 KLPGA 투어를 뛰는 선순환이 이뤄지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한국 선수들이 JLPGA 투어를 지배하던 2012년쯤 “글로벌 시대다. 분하다면 노력할 수밖에 없다”고 했던 고바야시 히로미 JLPGA 회장은 최근 일본 선수들의 득세에 “자국 투어에서 쌓은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라며 “누구라도 우승 경쟁을 할 수 있는 전력”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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