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글로벌 경제·안보 지형이 요동치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내세운 트럼프 대통령의 동맹을 가리지 않는 관세 공세로 전 세계가 무역 전쟁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다. 무역 의존도가 매우 높은 우리나라는 미중 패권 전쟁 격화에 정교하게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박기순 성균관대 중국대학원 교수는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모든 공급망의 자국 내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동맹을 협력이 아닌 협상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만큼 우리는 경제·안보 이익이 훼손되지 않도록 실용적이면서 다각적인 전략을 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우리 기업들은 관세로 인한 가격 부담 요인을 기술 혁신을 통한 경쟁력 제고로 극복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정부와 정치권은 연구개발(R&D) 관련을 비롯한 각종 규제들을 조속히 걷어내야 한다”고 했다. 박 교수는 “한국의 산업 정책은 글로벌 현실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며 “산업 정책을 총괄하는 컨트롤타워를 세워 국가 경제 발전의 명확한 방향을 설정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달라진 글로벌 환경에서 우리 기업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트럼프 2기의 세계 질서 변화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미중 관계다. 수입 규모에서 절대 열세인 중국은 관세 외에 희토류 등 핵심 광물을 활용한 자원 무기화 정책을 적극 동원할 것이다. 또 중국은 미국으로부터의 수입액을 늘리기 위해 한국산 수입을 미국 제품으로 대체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경쟁국인 중국보다 낮은 관세율이 적용될 가능성이 커 중국 제품에 비해 가격 경쟁력이 강화되는 측면을 활용해야 한다. 보조금에 의한 당근 정책이든, 관세에 의한 채찍 정책이든 미국 시장에 진입하려면 현지에 진출하는 것이 불가피하므로 현지 생산 전략을 적극 검토해야 할 것이다.
-미중 패권 전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우리의 대중국 전략도 변화해야 할 텐데.
△트럼프 2기는 모든 공급망의 미국 내 구축을 목표로 하면서 관세를 주요 정책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 장점을 활용한 미국과의 적극적 관세 협상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중시하되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우리 이익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변화해야 한다. 한국을 대미 우회 수출 기지로 활용하려는 중국의 외국인직접투자(FDI)는 걸러내되 배터리 산업 부품·소재 등에서의 한중 합작 투자는 우리의 배터리 산업 공급망을 보완해주는 측면과 한미 동맹 관계를 모두 고려해 신중하게 취사선택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트럼프의 관세 폭탄이 한국도 겨냥하고 있는데.
△지난해 한국이 미국 상대의 8대 무역 흑자국일 정도로 미국은 우리의 주요 수출 대상국이다. 미국의 관세 부과는 수출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미국으로부터 고율 관세를 부과받는 중국의 가격 경쟁력 하락에 따른 수출 감소분을 우리 기업들이 가져올 수 있는 기회 요인도 생긴다. 우리가 10%의 보편관세를 적용받을 때 중국은 훨씬 높은 60%의 고관세를 적용받을 가능성이 크다. 관세로 인한 가격 경쟁력 저하 요인을 품질 경쟁력 제고로 상쇄해야 하므로 우리 기업의 기술 혁신을 가속화할 경우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자원 공급망 분야에서 큰 변화가 예상되는데 우리에게 필요한 대중국 전략은 무엇인가.
△공급망 추세를 보면 세계화 시대의 ‘이익 극대화 공급망’에서 미국의 조 바이든 정부에서의 ‘동맹에 의한 공급망’으로, 트럼프 2기 정부에서의 ‘미국으로의 공급망’으로 변화하고 있다. 우리의 공급망 전략 전환이 불가피하다. 미국이 동맹보다는 자국 이익 우선 전략을 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도 국익 우선으로 실용적인 전략을 펼쳐야 한다. 다만 희토류와 같은 중요 광물 자원에서는 중국이 절대적 우위인 만큼 중국과의 협력은 긴요하다. 중국과의 경제 외교를 통해 자원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중국에 편중된 공급망을 다변화하는 전략도 펴야 한다.
-인공지능(AI) 등 신산업 분야에서 더욱 격화되는 미중 경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한국이 국제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기술력밖에 없다. AI 반도체는 기술 측면에서 미국이 가장 앞서 있는 만큼 우리는 미국과 보조를 맞추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한국의 반도체 기술은 거의 대부분 미국에서 들여온 것이고 당분간 이 구도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대만이 장악하고 있는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의 경쟁력 확보다. TSMC라는 강력한 파운드리 기업을 가진 대만의 반도체 육성 정책은 우리보다 더 체계적이다. 우리나라는 특단의 정책 지원과 기업의 노력이 배가되지 않으면 따라가기 어렵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 가속화하고 있는데 중국이 어떻게 대응할 것으로 보는가.
△미국은 민간 주도 자유 시장경제 시스템인 반면 중국은 산업 정책을 통한 국가 주도 시스템으로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중요한 것은 중국에서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혁신적 민간 기업들이 정부의 정책 지원을 등에 업고 있다는 것이다. 산업 정책을 통한 정부의 지원이 비효율성으로 인해 실패하는 경우가 많지만 중국은 치열한 내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업의 노력과 미래를 준비하는 정부의 산업 정책이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신산업 분야에서 중국의 혁신이 주목받고 있는데 중국 기업의 성공 요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파괴적 혁신’ 이론으로 유명한 클레이턴 크리스텐슨 교수의 주장이 가장 잘 들어맞는 곳이 바로 중국이다. 삼성과 애플이 지배하던 중국 스마트폰 시장에 화웨이·샤오미 등 중국 업체들이 저가 제품으로 진입한 후 점차 실력을 키워 삼성과 애플을 몰아내고 있다. 중국의 혁신은 기존 시장을 넘어 미래 시장에 집중되고 있다. 중국은 미래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AI, 양자 기술, 우주 항공 등의 분야에서 우리는 물론 미국보다도 압도적인 특허를 획득하고 있다. 배터리 시장에서 하위 기술이라고 생각했던 LFP(리튬·인산·철) 배터리를 생산해온 중국 배터리 기업 CATL이 부단한 R&D를 통해 성능이 획기적으로 향상되면서 글로벌 1위 기업으로 부상한 것이 좋은 사례다.
-R&D 분야에서 미국과 중국 쏠림 현상이 커지고 있는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예산 기준으로 볼 때 우리는 세계 1~2위 수준의 양호한 상황이다. 그러나 절대 금액을 보면 미국과 중국 양국에 비교할 수 없다. 우리는 규모의 열세를 효율성 측면에서 극복해야 한다. 그동안 R&D가 매우 비효율적으로 운영돼온 것이 사실이다. 정부에 의해 지원되는 R&D의 효율성 제고에 힘써야 한다. 최근에는 민간 기업들의 R&D 비중도 중국 기업에 비해 떨어지고 있는데 정부나 민간 기업 모두 R&D에 목숨 걸어야 중국 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 기업의 혁신 성공 요인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R&D에 집중하는 기업 환경도 거론된다.
△CATL은 쩡위친 회장의 지시에 따라 R&D 부문을 대상으로 근무 강도가 매우 높은 896근무제(오전 8시 출근, 오후 9시 퇴근, 주 6일 근무)를 실시하고 있다. 또 2만 명이 넘는 R&D 인력으로 LG에너지솔루션의 약 2.5배에 달하는 25억 9000만 달러 규모의 막대한 금액을 R&D에 투입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보다 더 절실하게 기술 개발에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정부의 산업 정책도 기업들의 성장 공간을 넓혀줘 혁신을 가속화하고 있다. R&D 분야에서의 주52시간 근무제는 우리 기업에 독약이나 마찬가지다. 과학기술은 부단한 실험과 시도를 통해 발전하는 것인데 우리는 주52시간제로 기업들이 R&D에서 모래주머니를 2~3개씩 달고 외국과 경쟁하라는 셈이다. 유럽연합(EU)이 세계 AI 경쟁에서 낙후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기술 발전보다는 후유증을 염려한 규제에 더 관심을 쏟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선(先) 시행, 후(後) 규제’라는 원칙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시행에 따른 문제점도 고려해야 하지만 시행하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방법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산업 정책이 현실 변화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가.
△한국은 경제발전 5개년 계획과 중화학공업 육성 등 각종 산업 정책으로 급속한 발전을 이뤘다. 하지만 미중 충돌이라는 시대적 변화 이후 한국의 산업 정책은 변화하는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아직도 과거 세계화 시대 산업 정책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입법을 통해 반도체 산업을 지원해야 할 국회는 여야 합의를 이루지 못해 반도체특별법 처리가 계속 지연되고 있다. 미래 산업이기도 한 첨단산업의 발전이 없으면 우리 미래도 보장할 수 없다. 산업 정책을 총괄하는 컨트롤타워를 통해 국가 발전의 명확한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미온적인 산업 정책을 적극적인 산업 정책으로 수정해 미래 산업의 경쟁력을 끌어올려야 한다.
◆He is…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복고와 한국외국어대 중국어과를 졸업한 뒤 서울대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산업은행 산은경제연구소장을 거쳐 중국삼성경제연구원장을 지냈다. 현재 덴톤스리법률사무소 고문을 겸임하며 성균관대 중국대학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한중일 비전위원회 경제부문위원과 외교부 정책자문위원회 경제외교분과 위원장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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