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의 ‘8대 0’ 탄핵 인용 판결문을 받아든 윤석열 전 대통령은 취임 1060일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지난 2022년 5월 윤 전 대통령은 국민적 기대를 등에 업고 용산 시대를 개막했지만 12·3 비상계엄 선포라는 잘못된 선택으로 탄핵된 두 번째 대통령으로 남게 됐다. 통상 전직 대통령들은 현실 정치에서 퇴장해 잊혀지는 길을 선택했지만 윤 전 대통령은 다른 행보를 보일 수 있다는 전망도 일각에서 나온다.
헌재의 파면 선고가 나온 이튿날인 5일 대통령실은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이다. 지난해 말 계엄 선포 직후만 해도 참모들도 이를 옹호하지 못하며 탄핵안 인용은 불가피하다고 보는 시각이 많았다. 하지만 이후 ‘거야의 국정 횡포론’이 힘을 받고 윤 전 대통령도 전격 석방되면서 최근 낙관론이 부쩍 커진 상황이었다. 한 대통령실 관계자는 “서울중앙지법의 석방 결정을 기점으로 용산 내부에서 복귀 기대감이 커졌던 게 사실”이라며 “각자의 자리에서 업무를 충실히 수행했던 상황이었다”며 침통함을 숨기지 못했다.
대통령실은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을 것으로 전망된다. 정진석 비서실장, 성태윤 정책실장, 신원식 국가안보실장 등 수석비서관 이상 참모진은 전날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에게 일괄 사의를 표했다. 정권의 실패에 책임을 지겠다는 차원으로 풀이된다. 다만 한 권한대행은 국정공백을 우려해 이를 반려했다.
행정관급 참모 상당수는 새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처지다. 부처에서 파견된 공무원들은 새 정권이 출범한 뒤 인선 작업이 완료될 때까지 자리는 지킬 것으로 전망되지만, 정치권 출신의 어공들은 조만간 여권의 대선 캠프 등으로 거취를 옮길 것으로 보인다.
윤 전 대통령의 흔적도 빠르게 지워지고 있다. 용산구 대통령실 청사에 게양된 대통령 봉황기는 내려갔고, 청사 내부에서 24시간 윤 전 대통령의 사진을 송출했던 스크린도 작동을 멈췄다.
정치권에선 윤 전 대통령의 행보에도 관심을 쏟고 있다. 대통령들은 퇴임 후 낙향해 일반 시민으로 돌아가는 게 관례였다. 이미 권력의 최고 정점에 올랐던 만큼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두고 국가적 위기 상황에만 입을 열어 사회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만 제한적으로 행해왔다.
다만 윤 전 대통령은 다른 행보를 보일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 넉 달 동안 “12·3 비상계엄은 경고용 계엄”이라는 여론전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며 거대 야당을 향한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왔다. 거리로 나온 지지층에 직접 A4용지 편지를 보내 “반국가 세력이 준동하고 있다” “여러분과 끝까지 싸우겠다”와 같은 메시지로 결집도를 높이는 데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윤 전 대통령이 헌재 판결에 불복하지 않을 도리는 없으나 심리적 승복까진 어려울 거란 말이 나오는 이유다.
특히 윤 전 대통령은 내란 우두머리 혐의 재판이 진행 중인 상황이다. 불소추특권을 잃은 채로 재판을 받아야 하고 공천 개입 의혹 등의 수사에도 속도가 붙으며 입지가 더욱 곤궁해질 수 있다. 수사·재판 상황에 따라 지지층의 결집이 필요할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윤 전 대통령은 전날 헌재 선고 뒤 낸 입장문에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너무나 안타깝고 죄송하다”며 “대한민국을 위해 일할 수 있어서 큰 영광이었다”고 밝혔다. 비록 청자를 지지층이 아닌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이라고 설정하긴 했으나 계엄 선포, 국론 분열상에 대한 직접적인 사과의 뜻은 없었던 셈이다.
다만 불명예 퇴진한 전직 대통령이 현실정치에서 영향력을 가져가기란 쉽지 않고 ‘국론 분열’ 등 비판의 소지 또한 커 현실화하긴 어려운 시나리오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국민의힘도 대선을 앞두고 외연확장을 위해 윤 전 대통령과 시간차를 두고 거리두기 전략을 취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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