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청주에서, 제 지지율과 상관없이 아버지는 기뻐하시지 않았을까요. 도지사가 됐을 때도 그런 ‘희(喜)’는 못 느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대선 예비후보로 출마한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지난 19일 첫 당내 경선이 열린 청주로 향하던 순간을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 중 하나로 꼽았다. 김 후보는 “경선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돌아가신 아버지가 청년 때 민주당의 열혈 당원이셨는데, 제가 그 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기 위해서 지금 갑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어머니가 한 번도 안 쓴 단어를 쓰셨다. ‘장하다’는 말이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22일 여의도 선거 캠프에서 만난 김 후보에게 ‘삶의 희로애락’을 묻자 그는 인터뷰 도중 말을 멈추고 눈물을 삼켰다. 이날 진행된 인터뷰에서 수 차례 손수건을 꺼낸 그는 인터뷰가 끝난 뒤 “대통령 후보를 두 번이나 울리다니 대단하시다”며 웃었다.
민주당 청년 당원이었던 김 후보의 아버지는 제4대 국회의원 선거가 열린 1958년 충북 음성군에서 민주당 후보의 선거 운동에 앞장섰다. 민주당 소속 당선자가 전국에 15명이었던 시절 ‘돈도 빽도 없이’ 어렵게 당선된 그 후보는 당선된 지 몇 달 만에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김 후보는 저서 ‘분노를 넘어’에서 “젊은 아버지는 하늘이 무너지는 배신감으로 치를 떨었다고 한다”고 적었다.
김 후보가 정치를 시작한 원동력도 ‘노(怒)’다. 지난 충청권 경선에서 김 후보의 득표율은 한 자릿수에 머물렀다. 하지만 김 후보는 ‘정치판을 바꾸기 위해’ 정치를 계속할 생각이다. 그는 “정치판에 대한 분노가 정치를 시작한 이유”라며 “지금의 민주당의 모습에 대해서도 분노한다. 민주당의 전통을 깨면서 국민경선을 하지 않고, 90도 정도 기울어진 정치판에 대해서도 분노한다”고 말했다.
“살면서 화가 난 순간은 셀 수 없다. 내 책 제목도 ‘화(분노를 넘어)’다. 야간대학을 졸업하고 기획재정부에 들어가 인사를 돌고 나오는데, 내 뒤통수에 대고 ‘별 희한한 학교 나온 친구가 시험 붙어서 여기까지 왔네’ 라고 하는 걸 들었다. 정치를 시작한 이후에도 경제부총리까지 하면서 열과 성을 다해 소신껏 좋은 정치를 펴려고 했지만 목표했던 ‘정책 패러다임 바꾸기’를 못 했다. 따지고 보니 정치판에 문제가 있는 거다. 정치판은 붕어빵 틀 같아서 아무리 반죽이 좋아도 결국 붕어빵 밖에 안 나온다. 판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정책도 의미 없다. 판을 바꿔야 한다. 첫째는 권력 구조 개편, 둘째는 정치 개혁이다.”
김 후보는 대통령 4년 중임제 등 권력구조 개편을 위한 ‘개헌’도 주장하고 있다. 자신이 대통령이 된다면 ‘임기를 3년으로 단축하고 모든 책무를 마친 뒤 표표히 물러나겠다’고도 공언했다. 김 후보는 “이대로 정권교체만 하면 나라가 더 나아지나”라며 “4년 중임 분권형 대통령제, 대통령 결선투표제 등 권력구조 개편에 중심을 둔 개헌을 완수하겠다. 시효 다한 87년 체제를 극복하고, 이에 맞게 다음 대통령 임기는 3년으로 단축하고 2028년 총선과 선거 주기를 맞출 것”이라고 강조했다.
청와대 경제금융비서관, 기획재정부 예산실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공직생활을 한 김 후보는 박근혜 정부 국무조정실장을 지내다 사표를 냈다. 이후 아주대학교 총장을 지내다 노무현 정부에서 직접 만든 ‘비전 2030’을 실천해 달라는 제안에 문재인 정부 초대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됐다. ‘소득주도성장’과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등을 두고 청와대와 각을 세웠다. 부총리가 되어서도 ‘정책 패러다임’을 바꿀 수 없다는 데 회의감을 느끼며 공직생활을 마쳤다.
김 후보는 오랜 공직생활을 끝내고 20대 대선에서 ‘새로운물결’을 창당했던 시기를 ‘락(樂)’으로 꼽았다. 김 후보는 “자유인으로 살고 싶었다”며 “연봉 30억 원 자리도, 국무총리 제의도 거절하고 아내와 백팩을 메고 정치 생각 없이 전국을 누비며 많은 사람을 만났다. 정말 즐거웠다”고 회상했다.
“정치하기 전에 만났던 진짜 우리 국민들이, 정치한다고 할 적에 제 옆에 아무도 없었는데 그분들이 자발적으로 도와주러 온 거다. 밀양에서 사과 과수원 하는 손재범 회장님이 많이 도왔다. 또 한 분은 충남 논산에 있는 치과의사, 또 한 분은 충북 진천에 있는 변호사. 이렇게 세 분이 최고위원이었다. 시도당위원장도 부산시는 32살 된 청년 벤처 사업가, 충남은 31살 화훼 농사짓는 젊은 여성이었다. 그분들과 일하면서 정말 순수하게 즐거웠다.”
김 후보에게 ‘왜 김동연이 대통령이어야 하는지’ 물었다. “경제를 말로 비평하는 것과 국가 경제를 직접 경영해 본 것은 천지차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경제와 글로벌, 통합 측면에서 탁월하고 유능한 정치 지도자가 차기 정부를 이끌어야 한다. 김동연이 그 누구보다 가장 잘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경제위기를 극복한 경험과 글로벌 외교는 저의 확실한 강점이라 생각한다. 수많은 세계의 전현직 지도자, 글로벌기업 CEO와 직접 통화하고 속 깊은 얘기를 터놓을 수 있는 네트워크가 있었기에 도지사 2년 반 동안 85조 원의 투자를 유치할 수 있었다. 트럼프 관세 폭탄에 휘청이는 자동차 부품 기업을 돕기 위해 출마 선언과 동시에 미국으로 날아가 대책을 마련해왔다. 김동연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짧은 시간 동안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을 털어놓은 김 후보는 가장 슬펐던(哀) 순간도 담담히 회상했다.
“스물일곱 된 큰 애가 세상을 떠났다. 장교로 입대를 앞두고 있었고, 워싱턴 국제기구에서 근무하던 정직하고 착한 청년이었다. 얼마나 정직했냐면, 중학교 때 친구들과 국어 과외를 할 때 선생님이 답안지를 우리 애한테 맡겨 놓을 정도였다. 그런데 저는 그 애한테 엄했다. 주문을 많이 했다. 공부해라, 시간을 지켜라. 지나고 보니 그 나이 때 저보다 훨씬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믿고 맡겼으면 됐을걸. ‘공부 좀 안 해도 된다, 하고 싶은 걸 해라. 남을 사랑해라. 괜찮다.’ 그런 이야기를 해줘도 충분할 애였는데 저는 그렇게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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