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이하 현지 시간) 스페인과 포르투갈, 프랑스 남부 일부 지역에서 대규모 정전 사태가 발생했다. 전력망이 붕괴되며 주요 도시 전역이 암흑에 잠겼고 교통과 통신망까지 마비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유럽 최악의 정전’으로 기록될 이번 정전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급격한 재생에너지 전환에 따른 ‘예고된 재앙’이었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특히 스페인은 국가 전력망이 평일 기준으로는 처음 100% 재생에너지로만 가동됐다는 성과를 자축한 지 불과 엿새 만에 대규모 정전을 맞았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을 주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재생에너지로 급격히 전환한 결과 발생한 구조적 불안정성을 그대로 드러냈다고 분석했다.
정전은 28일 정오께 시작됐다. 월요일 대낮을 덮친 정전에 마드리드·바르셀로나·리스본 등 주요 도시에서는 지하철과 열차가 멈춰 수백 명이 객차 안에 갇히고, 신호등이 꺼진 도로에는 차량과 보행자가 뒤엉켰다. 통신망도 붕괴돼 일부 지역에서는 통화와 인터넷 접속이 모두 먹통이 됐다. 바르셀로나 시민들은 “세상의 종말이 온 것 아니냐”며 혼란에 빠졌다고 스페인 최대 일간지 엘파이스는 전했다.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긴급 복구와 원인 조사에 착수했다. 약 18시간 만인 29일 오전 6시 현재 전력망은 99% 이상 복구됐지만 시민들의 불안은 좀처럼 가시지 않고 있다. 외신들은 정전의 실제 원인이 훨씬 더 복합적일 것이라는 진단을 내놓고 있다. 정전 사태 초기에 포르투갈 전력 회사 REN은 극한 기온 변화나 희귀한 대기 현상 때문이라는 해명을 내놓았지만 몇 시간 안에 철회했다.
스페인 전력망 운영사인 레드엘렉트리카(REE)에 따르면 이번 정전은 수도 마드리드 인근 전력 시스템에서 시작됐다. 정오 무렵 급격히 높아진 기온 속에서 전력수요에 비해 폭발적으로 늘어난 태양광발전량이 전력망을 압박했다. 최초 손실이 발생할 당시 ‘매우 강한 진동’이 감지됐으며 이로 인해 유럽 표준 주파수(50Hz)가 무너지고 발전소들이 연쇄적으로 자동 차단되면서 정전이 확산됐다. 스페인 내 전력망에서 극심한 진동이 발생하면서 유럽 표준 주파수가 무너지며 발전소들이 연쇄적으로 자동 차단됐고 스페인과 포르투갈 전력망은 유럽 본토 전력망과의 연결이 끊기면서 완전히 고립됐다.
근본적인 문제는 에너지 구조 변화에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과거에는 석탄·가스·원전이 전력망의 중심이었다. 이들은 외부 충격이나 수급 불균형이 발생해도 전력망을 안정적으로 지탱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최근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유럽연합(EU)의 2050 탄소 중립(넷제로) 달성 계획에 따라 태양광과 풍력 같은 재생에너지 비중을 급격히 늘렸다.
스페인은 현재 전체 전력의 40% 이상을 재생에너지로 충당하고 있으며 발전용량은 독일에 이어 EU 내 2위 수준이다. 아울러 스페인은 원자력발전 비중을 현재 20%에서 ‘제로(0)’로 줄이는 탈원전 정책도 추진 중이다. 전력망의 기반을 과거보다 훨씬 불안정한 구조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 스카이뉴스는 “정전에 분노한 스페인 시민들이 정부의 넷제로 정책에 대해 강한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고 전했다.
블룸버그는 이번 사태를 “유럽에서 가장 이례적인 대규모 정전 사례 중 하나”로 평가했다. 과거에도 2003년 이탈리아 전역, 2006년 독일과 모로코 일부 지역에서 대규모 정전이 발생했지만 이번처럼 에너지 체제 전환이 직접적 배경이 된 사례는 드물었다.
재생에너지 전환에 따른 전력망 불안정성을 두고 수년 전부터 경고가 이어지고 있다. 그간 에너지 전문가들이 재생에너지만으로는 주파수 조정과 긴급 상황 대응이 어렵다며 플라이휠·배터리·열발전기 등의 보완책 마련을 촉구했지만 정책에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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