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재건축·재개발 등 정비사업 조합은 더 높은 용적률을 받는 대가로 짓는 임대주택을 분양주택과 동일한 조건에서 무작위로 추첨해 배치해야만 사업 인허가를 받을 수 있다. 최근 서울의 한강변 재건축 사업장을 중심으로 ‘분양·임대주택 공개추첨’을 둘러싸고 잡음이 거세지자 국토교통부가 ‘9·7 부동산 공급방안(9·7 대책)’에서 공개추첨 규정을 법에 명시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미 시행 중인 소셜믹스 원칙을 강화하기 위한 차원이라는 입장이지만, 임대주택 기부채납을 두고 안 그래도 불만이 많은 재건축 현장의 반발이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정비사업을 통한 주택 공급을 활성화하려면 임대주택 기부채납에 대한 인센티브를 더 부여하는 대안이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0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국토부는 임대주택 공개추첨 의무화 내용이 담긴 도시정비법 개정안을 조만간 발의할 계획이다. 앞서 국토부는 9·7 대책에서 관리처분계획인가 전에 임대주택을 공개 추첨하는 것을 의무화하고, 이를 위반할 시에는 인가를 내주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조치의 대상은 조합이 용적률 완화의 대가로 공공기여하는 임대주택에 한정된다. 즉 더 높은 용적률을 받기 위해 제공하는 임대주택의 경우, 분양주택과 무작위로 섞어 동·층을 배치해야만 사업을 허락하겠다는 게 이번 조치의 골자다.
이 같은 공개추첨이 의무화된 것은 7년 전인 2018년부터다. 이전까지 정비사업 현장은 조합원과 일반분양 가구에 좋은 위치·층을 먼저 배정한 후 임대주택을 비선호 동·층에 배치하는 관행을 따랐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 ‘용적률 상향 혜택을 받고도 임대주택을 차별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정부는 2018년 도시정비법 시행령을 개정해 “용적률 완화로 제공되는 국민주택 규모 임대주택은 공개추첨 방법으로 선정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서울시도 2022년 ‘완전한 소셜믹스’ 정책을 실시해 동·층 분리 없는 임대주택 배치를 요구하고 있다.
국토부가 이미 시행 중인 공개추첨 제도를 아예 법률에 규정하고 제재 조항까지 넣기로 것은 최근 들어 서울 주요 정비사업들이 본궤도에 올라서며 갈등 사례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올해 상반기 서울에서는 송파구 잠실주공5단지, 영등포구 여의도공작아파트 등 조합이 서울시로부터 ‘한강변 동과 고층에도 임대주택을 배치하라’는 요구를 받아 조합원들이 거세게 반발한 바 있다. 특히 강남구 대치 구마을3지구 재건축 조합은 공개추첨 원칙을 지키지 않은 사실이 뒤늦게 적발되고 20억 원을 대신 기부채납하기로 해 논란이 됐다. 국토부의 한 관계자는 “용적률 완화 혜택을 받고 짓는 임대주택은 그 배치도 공공성을 지켜야 한다는 게 기본 입장”이라며 “구마을3지구 사건을 계기로 서울시에서도 공개추첨 위반에 대한 조치 사항을 명확히 해 달라는 건의가 들어와 대책에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비사업 현장에서는 벌써 반발이 거세다. 서울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의 한 재건축 조합장은 “아파트 분양가와 시세는 위치, 층수에 따라 수천만~수억 원 차이가 난다”며 “임대주택 공개추첨이 곧 사업성과 직결되는 문제인데도 정부가 조합을 적대시하며 의무만 강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비 업계의 한 관계자는 “분양·임대 공개추첨을 법에 규정하면 확실한 근거가 생겨 조합과 인허가 청의 갈등을 막는 효과는 있을 것”이라면서도 “획기적인 정비사업 규제 완화가 없는 상황에서 도리어 임대주택에 대한 반감만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9·7 대책엔 재건축초과이익환수제 폐지, 민간 정비사업의 용적률 상한선 상향 같은 굵직한 지원책이 들어가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2030년까지 23만 4000가구의 수도권 정비사업 착공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싶다면 임대주택 기부채납에도 더 유연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백준 J&K도시정비 대표는 “정부가 임대주택 인수가격을 기본형 건축비의 80%로 높여주겠다고 (이번 대책에서) 밝혔지만 이 역시 실제 사업비에는 턱없이 못 미친다”며 “인수가격만 현실화해줘도 ‘우리 것을 뺏긴다’는 인식이 줄어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서울시는 오세훈 시장의 지시로 소셜믹스 적용 원칙을 유연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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