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의 일방적인 합의 파기로 국회가 정기국회 첫 본회의부터 급격하게 얼어붙었다. 잠시 내비쳤던 여야 협치의 기대감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특히 민주당 지도부마저도 강경파와 온건파 간 갈등으로 파열음이 빚어지면서 볼썽사나운 모습을 드러내 정치권에 대한 혐오만 키우고 있다는 비판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여야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지만 민주당 강성 지지층의 벽에 번번이 가로막히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1일 오전 갑작스러운 민주당의 합의 파기 소식이 전해진 후 국회는 순식간에 혼란에 빠져들었다. 여야 지도부는 급히 지도부 회의 및 의원총회를 소집하면서 상황 파악과 대응 전략 세우기에 몰두했다. 여야 합의안에 반대한 민주당 강경파가 ‘합의 파기’를 강력히 주문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여야 원내지도부는 전날(10일) 두 차례의 회동 끝에 3대 특검법 개정안에서 파견 인력 증원 규모를 줄이고 수사 기간을 연장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이에 대해 강성 지지층들이 “내란 척결 의지가 후퇴한 것이냐”며 의원들에게 문자 폭탄을 쏟아내자 의원들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공개적인 반대 입장 표명이 이어졌다. 추미애 법사위원장은 “굳이 합의가 필요하지 않다”고 했고 박선원 의원은 “여당 필리버스터가 뭐가 두렵냐”고 당 지도부를 비판했다. 박주민 의원은 “내란 종식은 협치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협치를 강조해온 이 대통령마저 가세하면서 논란은 더욱 커졌다. 이 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정부 조직 개편과 (내란 심판의) 당위성을 어떻게 맞바꾸냐”며 “저는 그런 것을(특검법 합의)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루 만에 역적으로 몰린 김병기 원내대표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김 원내대표는 페이스북에 “그동안 당 지도부, 법제사법위원회, 특위 등과 긴밀하게 소통했다”며 일방적 합의 주장을 정면 반박했다. 김 원내대표 측은 “‘격노했다’고 표현해도 될 수준”이라고 했다.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강성 지지층을 의식해 몸을 사리면서도 ‘네 탓 공방’으로 흐르는 당 운영에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의원들을 대표하는 원내대표가 (야당과) 협상하도록 해놓고 이를 망신 주기식으로 뒤집으면 어떡하냐”며 “당내 논의가 건강하게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상태여서 우려스럽다”고 꼬집었다.
박창환 장안대 특임교수는 “김 원내대표가 기동의 여지를 만들어보려고 살짝 오른쪽으로 움직이려 했지만 강성 당원들 의견에 밀려 옴짝달싹 못한다는 사실만 드러났다”며 “이 대통령도 여론을 보고 정청래 민주당 대표 편을 들어준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정 대표가 “부덕의 소치”라고 공식 사과했지만 당내 갈등이 봉합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날 민주당은 논란을 촉발한 3대 특검법 개정안을 일부 수정해 본회의에서 단독 처리했다. 원안의 핵심 내용인 특검 인력 증원, 기간 연장은 그대로 두되 특검의 군검찰 지휘권과 국가수사본부 수사 지휘, 내란 재판 의무 중계 등 세 가지는 야당 측 주장을 감안해 수정했다.
국민의힘은 총력 투쟁을 선언했다. 장동혁 당 대표는 이 대통령의 ‘협치’ 의지에 의문을 표하며 “도대체 여당에 무엇을 양보하고 무엇을 협치하라고 한 것이냐”고 따져 물었다. 송언석 원내대표는 “향후 국회 일정과 관련해서 벌어지는 모든 파행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민주당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민의힘은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통한 대응이 사실상 효력이 없다고 보고 향후 국회 일정 협조를 전면 거부하며 규탄에 나서기로 했다. 최수진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지금은 필리버스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강력히 투쟁하는 게 맞다”며 “민주당의 후안무치한 행동에 대해 강력히 알려드리고자 한다”고 했다.
민주당도 사실상 국민의힘 협조가 불가능해졌다고 보고 정기국회 전략을 전면 재수정하기로 했다. 25일 본회의에서 처리하려고 했던 금융감독위원회 설치 법안은 소관 상임위인 정무위원장을 국민의힘이 맡고 있어 정상적으로 처리하기 어려워졌다. 민주당은 이에 따라 약 6개월이 소요되는 패스트트랙 절차로 추진하기로 했다.
여야 관계 경색에 따라 국회가 공전하면서 애꿎은 국민만 피해를 볼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실제 이날 여야가 함께 처리하기로 했던 비쟁점 법안 30여 개는 본회의에 오르지도 못하고 미뤄졌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민주당 강성 당원 목소리에 국회 운영이 좌지우지되면서 정부 정책에도 영향이 미칠 수 있어 심각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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