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오징어 게임’과 영화 ‘기생충’의 음악감독 정재일은 2023년 4월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음악감독으로 막 취임한 얍 판 츠베덴을 떨리는 마음으로 찾아 갔다. 세계적인 마에스트로인 츠베덴 감독이 취임 첫 간담회에서 “정재일과 꼭 한번 작업해보고 싶다”며 작곡 의뢰 ‘러브콜’을 보냈지만 정 감독은 선뜻 수락할 수 없었다. “저는 오케스트라 작곡을 공부한 적도 없고 능력도 없는 것 같다”며 정 감독이 머뭇거리자 츠베덴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인생에서 가장 큰 리스크가 뭔지 아세요. 아무런 리스크도 감수하지 않는 거에요. 정재일만이 할 수 있는 것, 잘하는 것을 하면 됩니다. 다만 스토리를 담아서.”
츠베덴 감독과 정 감독은 23일 서울 인사동 더프리마아트센터에서 열린 서울시향 신작 발표 기자회견에서 ‘인페르노’의 탄생 스토리를 이 같이 들려줬다. 정 감독의 첫 클래식 오케스트라 음악 도전작인 이 곡은 25~2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츠베덴 감독의 지휘와 서울시향의 연주로 세계 초연된다. 총 4파트로 구성된 18분 길이의 곡이다. ‘인페르노(INFERNO)’는 지옥을 뜻하는 라틴어다. 정재일이 그려내는 지옥도는 어떤 모습일까.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마지막에 나오는 ‘지옥은 다른 먼 곳이 아니라 지금 여기’라는 말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비극적인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을 표현했죠.”(정재일 감독)
“우리의 시대를 잘 반영하고 있는 곡입니다. 어둡게 들리지만 탈출구도 들어 있고 공포가 분출되지만 결국 평화도 찾아 옵니다.”(츠베덴 감독)
지난 28년 간 수많은 곡 의뢰를 받고 숱한 명곡들을 만들어온 정 감독이지만 서울시향과의 작업은 유독 떨리는 경험이었다. 그는 “어제 서울시향과 첫 리허설을 가졌는데 100명의 선생님 앞에서 채점을 받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정 감독은 정식 클래식 교육을 받은 적이 없지만 군대에 갈때 브람스 교향곡 악보를 품고 가 혼자 틈틈이 들여다보고 독학을 할 정도로 클래식 음악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정 감독은 “이번 작업을 통해 많은 것을 학습했다”며 “특히 모든 것을 철저하게 준비해와 첫날 거의 완벽에 가까운 연주를 들려준 서울시향 단원들의 프로 의식에 충격에 가까운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츠베덴 감독은 “음악가는 카멜레온과 같이 다양한 재능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해왔는데 정 감독이야 말로 그런 사람”이라며 “그만의 색깔이 담겨있어 정 감독이 내놓은 결과물이 매우 만족스럽다”고 평가했다.
‘인페르노’는 다음 달 27일부터 11월 1일까지 서울시향의 미국 순회 공연 프로그램으로 선정돼 뉴욕 카네기홀에서도 울려 퍼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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