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제시한 ‘END(남북 간 교류(Exchange), 관계 정상화(Normalization), 한반도 비핵화(Denuclearization) 이니셔티브’에 대해 전문가들은 ‘실용적’이라는 평가를 내놓았다. 화해와 파국을 반복한 기존 남북 관계에서 보다 진전할 유연한 접근법을 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핵화 목표가 자칫 뒷전으로 밀려날 가능성, 이에 따라 국가 안보가 위협받을 가능성 등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END 이니셔티브’에서 가장 이목을 끄는 대목은 역대 정부가 남북 관계 개선의 조건으로 고수했던 ‘선(先)비핵화’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은 점이다. END 이니셔티브 자체에 ‘비핵화’가 포함돼 있지만 대화 재개를 위한 필수 조건이 아니라는 데서 과거 정부와는 다른 인식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고유환 동국대 명예교수는 “비핵화를 최종 목표로 두되 그보다 먼저 교류 협력을 하면서 관계 정상화를 추진한다는 취지로 보인다”며 “선비핵화를 내세워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를 추진했으나 북한의 핵능력 고도화를 막지 못했던 전례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분석했다. 민경태 통일교육원 교수도 “과거 다수의 대북 정책이 선비핵화를 전제로 하다 보니 정체에 빠졌지만 이번 구상은 냉철한 현실 인식에 기초한 실용적인 해법”이라며 “단기적으로 북한이 호응할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일관된 대화·교류 제안과 체제 존중 신호를 지속해 신뢰가 쌓일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북한은 한미 등이 비핵화를 요구하는 한 대화 불가라는 입장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이달 21일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도 “비핵화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확인한 바 있다. 이 때문에 북한 비핵화가 아닌 핵·미사일 개발 중단 및 축소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져왔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도 24일 서울 중구 코리아나호텔에서 통일부가 주최한 ‘북한의 2국가론과 남북기본협정 추진 방향’ 세미나에서 “지금은 남북 관계에 대한 실용적 접근, 새로운 접근이 필요할 때”라고 재차 밝혔다. “변화의 초점을 ‘적대성 해소’에 두고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을 평화적 두 국가로 전환해야 한다”는 게 정 장관의 인식이다. 북한은 지난해 1월 최고인민회의에서 남북 관계를 “교전 중인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하고 이를 헌법에 반영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왔다.
이 대통령이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적대적 행위 중단’을 약속하면서 명분을 준 만큼 북한과의 대화가 급물살을 탈 것이라는 기대도 나온다. 2018년 북미 싱가포르 회담은 당시 한미 정부의 연합군사훈련 중단에 힘입어 성사된 전례가 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석좌교수는 “일체의 적대 행위를 중단한다는 이 대통령의 선언은 한미 연합훈련 축소·중단을 통해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 중단을 이끌어낼 여지가 있다”고 풀이했다. 이어 “북한이 END 이니셔티브까지 거부할 경우 ‘정상 국가를 지향하면서 평화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국제사회의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고 짚었다.
다만 관계 정상화에 치중하는 새 비핵화 목표가 퇴색될 가능성, 또 국가 안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는 여전하다. 조비연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핵을 가진 국가와 ‘관계 정상화’를 한다는 메시지로 인해 향후 국제사회가 북한에 어떠한 조치를 요구할 여지가 줄어들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이재명 정부의 비핵화 3단계론(중단·축소·비핵화)에 대해서도 “'동결'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등의 검증 절차까지 포함한 개념인 반면 이재명 정부의 ‘중단’은 북한의 주장만으로도 달성 가능한 것”이라며 “핵 동결의 문턱이 더욱 낮아지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과거 북한은 비핵화와 관련해 수차례 국제사회를 속이거나 약속을 어긴 전력이 있다. 2008년에 비핵화를 약속하며 영변 핵시설의 냉각탑을 폭파했지만 이미 폐기된 시설을 이용해 ‘폭파 쇼’를 했다는 사실이 나중에야 드러났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3주 앞둔 2018년 5월에는 풍계리의 핵실험장을 폭파했으나 역시 입구만 폭파해 언제든 복구 가능하다는 분석이 나왔다.
다만 이러한 우려를 감안하고서라도 북한과의 대화를 재개해야 한다는 현실론도 만만치 않다. 2010년대 들어 북한의 핵 능력이 급속히 발전한 데다 최근 수년간 러시아의 지원에 힘입어 더 고도화되고 있는 만큼 하루빨리 핵 중단부터 얻어내야 한다는 지적이다. 민 교수는 “성과 없는 공방을 반복하며 북한의 핵전력 증강을 방치하기보다 위험을 줄이는 부분적 성과부터 축적해 전쟁의 위험을 현실적으로 낮추는 길이 국익에 부합한다는 인식이 END 이니셔티브에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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