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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한양도성] <33> 안중근 동상·조선신궁 터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6.03.27 18:39:15안중근 의사가 남산 아래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다. 이름은 그럴 듯 하지만 일본의 시조신을 제신으로 삼은 일본신사다. 일제는 남산 서북쪽 기슭의 한양도성 성곽을 뜯어내고 1925년 조선신궁을 세운다. 당연히 해방 후 파괴됐고 이후 공터였다가 1956년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25m 초대형 동상과 광장이 들어섰다. 4월혁명 후에 이것도 철거되고 한동안 남산식물원과 분수대가 있었다. 사 -
[역사의 향기/ 한양도성] <32> 남산 봉수대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6.03.20 20:27:02전통시대 긴급한 정보 전달에는 '봉수(烽燧)'가 쓰였다. '봉'은 횃불, '수'는 연기를 말한다. 즉 밤에는 불이, 낮에는 연기가 사용됐다. 물론 횃불과 연기로 복잡한 사정을 전할 수는 없다. 봉수가 사용된 것은 변란 상황이다. 외적이 침입했거나 반란이 일어났을 때다. 평시에는 1개의 연기(혹은 불빛)만 올리다가 위급 정도에 따라 2~5개로 늘렸다. 봉수는 남쪽의 부산에서 북쪽의 의주까지 전국 산 정상에 거미줄 같은 망을 연 -
[역사의 향기/ 한양도성] <31> 남산 팔각정
문화·스포츠 문화 2016.03.13 20:08:56남산 팔각정은 한양도성 남산구간에서도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이다. 조선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도성이 한눈에 보이는 이곳에 성곽과 나란히 '국사당(國師堂)'을 짓는다.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기 위해서다. 이후 500여년간 유지됐던 국사당은 1925년 헐렸다. 당시 일제가 남산 중턱, 지금의 남산도서관 자리에 그들의 조선신궁을 만들면서다. 조선귀신을 일본귀신보다 위쪽에 둘 수 없다며 국사당을 인왕산 기슭으로 옮겨 -
[역사의 향기/ 한양도성] <30> 남산 주한미군방송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6.03.06 20:50:52한양도성 남산 구간을 걷다 보면 "'주한미군(AFN Korea) 방송'이 있으니 우회하라"는 안내 팻말이 있다. 종로 쪽에서 남산을 볼 때 가장 왼쪽의 송신탑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한양도성 18.6㎞ 가운데 유일하게 답사가 불가능한 지역이다. 미군 통신부대의 주둔은 지난 1954년 시작됐다. 현재 한양도성 내부에 미군 주둔 지역은 두 곳인데 이곳과 함께 을지로5가 훈련원공원 뒤편의 미군 공병부대다. 동서고금에 군사적으로 점령된 -
[역사의 향기/ 한양도성] <29> 남소문터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6.02.28 10:16:28한양도성 성문은 4대문과 4소문 외에 하나가 더 있었다. 바로 '남소문(南小門)'으로, 남산 국립극장에서 장충단로를 따라 한남동·옥수동으로 빠지는 고개에 있었다. 지금이야 한남대로가 간선도로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옥수동이 더 중요했다. 옥수동 동호대교 북단은 두모포가 있던 자리다. 두모포는 한강을 따라 내려온 물산의 집적지였다. 원래는 광희문을 통해 한강에 접근했지만 너무 멀었다. 이에 세조 3년(1457년·추정)에 -
[역사의 향기/ 한양도성] <28> 자유센터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6.02.21 20:31:03한양도성 남산 구간은 조직적으로 훼손됐다. 남산을 오르다 보면 국립극장 앞에 이상하게 생긴 건물이 있다. 흔히 국내 최고의 건축가로 불리는 김수근이 설계한 자유센터(지금은 남산제이그랜하우스)다. 말려 올라간 지붕은 북을 향해 파도치는 모습이라고 한다. 옆에는 타워호텔(지금은 반얀트리클럽앤스파서울)이 있다. 이들은 지난 1960년대 남북 이념 대결의 소산이다. 1963년 자유센터는 반공세력의 총본산으로, 타워호텔은 -
[역사의 향기/ 한양도성] <27> 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6.02.14 20:11:49한양도성 남산구간의 장충단공원에는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韓國儒林獨立運動巴里長書碑)'가 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유림 대표 137명이 서명한 한국독립 호소 청원서가 파리강화회의에 제출됐다. 이것이 '파리장서'다. 앞서 3·1운동에는 종교계(불교·기독교·천도교 등)와 지식인·학생·민중이 참여했는데 두 세력만 빠졌다. 왕족 등 구 관료집단과 유림이다. 유림은 '3·1 독립선언문'에 왕정복고를 주장하지 않은 -
[역사의 향기/ 한양도성] <26> 남산구간 성곽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6.01.31 20:03:11서울 한양도성 성곽의 전체 18.6㎞ 가운데 70%인 12.8㎞만 현재 남아 있거나 중건됐다고 하는데 이들은 백악산·낙산·남산·인왕산 등 산의 능선을 따라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평지에 있는 성곽은 대부분 소실됐고 복구도 어렵다. 이중 남산구간의 성곽은 험한 지형에도 불구하고 피해가 심하다. 남산이 서울의 중앙에 있다 보니 여러 가지 개발사업이 집중됐기 때문이다. 남산구간 가운데 그나마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곳이 남 -
[역사의 향기/ 한양도성] <25> 장충단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6.01.24 20:00:29가수 배호의 '안개 낀 장충단공원', 장충체육관, 장충동 족발집 이름의 유래인 '장충단(奬忠壇)'은 원래 조선의 국립묘지였다. 임오군란·갑신정변·을미사변 등에서 희생당한 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조선왕조는 지난 1900년 추모 공간을 만들고 장충단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사진의 비석도 세우는데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 이척의 글씨라고 한다. 지금 비석이 있는 곳에서 국립극장까지의 한양도성 안쪽 공간이 모두 장충단 영역 -
[역사의 향기/ 한양도성] <24> 광희문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6.01.17 20:09:34무덤과 주거지의 분리는 우리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크게 두 가지 때문이다. 우선 시신에 대한 존중이다. 삶과 죽음을 나누는 것이다. 위생적인 문제도 있다. 부패는 건강에 좋지 않다. 산이 많은 지형적 특성상 산에 무덤을 두는 것이 자연스럽다. 사람들은 당연히 평지에 산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조선시대 한양도성 안에는 무덤이 없었다. 모든 시신은 성 밖으로 나갔고 이용된 성문도 구별했다. 바로 광희문(光熙門)인데 속 -
[역사의 향기] <23> 훈련원공원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6.01.10 20:19:52동대문에서 서남쪽으로 600m 정도 떨어진 곳에 훈련원공원이 있다. 이곳은 한양도성 안에서도 가장 너른 장소다. 군사훈련에 적합해 조선시대에는 '훈련원(訓鍊院)'이 있었다. 훈련원은 말 그대로 병사의 선발과 훈련을 맡은 곳이다. 즉 조선의 '무력'을 관장했다. 이순신이 별과 시험에서 말을 달리다 떨어져 다리를 다친 곳이자 임오군란을 일으킨 구식 군대의 근무지이기도 했다. 지난 1907년 정미7조약에 따른 조선군대 해산식 -
[역사의 향기/ 한양도성] <22> 오간수교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6.01.03 20:47:00한양도성 가운데 어설프게 복원된 곳 중 하나가 오간수교다. 오간수교는 '오간수문(五間水門)'이 있던 자리여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오간수문은 과거 청계천이 한양도성 밖으로 흘러나갈 때 지나던 5칸 물길로 성곽 아랫부분에 만들어졌다. 지난 1908년 일제가 청계천 하수의 원활한 소통을 핑계로 성벽을 헐면서 영원히 사라졌다. 같은 자리에 콘크리트 다리를 놓았는데 이후 오간수다리·오간수교 등으로 불렸고 지금도 그렇다. -
[역사의 향기/ 한양도성] <21> 동대문운동장 성화대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5.12.27 20:12:20도심에 대규모 스포츠 경기장이 들어서는 것도 근대의 산물이다. 우리의 경우는 이것이 일제에 의해 시작됐다는 비극이 있었다. 일제는 동대문과 광희문 사이의 한양도성을 헐고 1925년 육상경기장(축구장)과 야구장·정구장으로 이뤄진 '경성운동장'을 짓는다. 총면적 2만2,700평, 수용인원 2만5,800명으로 당시로서는 동양최대 규모였다. 운동장 이름은 해방 후에는 서울운동장으로, 이후 동대문운동장으로 바뀌지만 1984년 잠실 -
[역사의 향기/ 한양도성] <20> 이간수문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5.12.20 20:12:10북악산과 인왕산·낙산·남산에서 내려온 물은 청계천으로 모여 한양도성을 빠져나간다. 과거에 사람이 다니는 성문과 함께 물이 나가는 수문(水門)이 필요했던 이유다. 한양도성에는 2개의 수문이 있었는데 오간수문(五間水門)과 이간수문(二間水門)이다. 청계천 본류가 흘렀던 오간수문은 일제 강점기 인근 성곽의 훼손과 함께 사라졌다. 남산에서 내려온 물이 빠져나간 이간수문 역시 땅속에 묻혔다. 지난 2008년 동대문디자인 -
[역사의 향기/ 한양도성] <19> 동대문(흥인지문)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5.12.13 20:13:56한양도성 내부를 대상으로 했을 때 동대문이 있는 이 위치가 가장 낮은 지대다. 그렇기 때문에 도성 안에서 모인 물이 청계천을 통해 빠져나갈 수 있다. 청계천은 동대문에서 남쪽 120m 거리(사진에서는 위쪽)에 있다. 지대가 낮다는 것은 홍수로 잠길 가능성이 있고 기운도 허하다는 뜻이 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여러 조치가 취해졌다. 우선 이름이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바뀌었다. 원래 '흥인문'이었지만 기를 살리는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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