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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日 이기자 일념" 강남아파트 5000채 돈 투입해 '엔진 독립'[다시, KOREA 미러클]

[다시, KOREA 미러클]

◆한국기업 1위 순간 ① 현대차그룹

정주영의 R&D 뚝심…엔진 독립

정몽구는 '성능·효율' 톱 반열에

정의선, N브랜드 친환경車 선도

"반드시 성공" R&D 열정의 연구원

車 '스푸트니크 모멘트' 만들어


대한민국의 역사는 곧 기적의 역사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을 거치면서도 민주화와 산업화 두 가지를 모두 일궈내 마침내 ‘코리아 미라클’을 완성했다. 번영의 기적을 이뤄낸 배경에는 기업인들의 보이지 않는 집요함과 열정이 있었다. 세계 1등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절박한 목표 아래 세계 최고 기술력의 반도체 메모리, 100% 국산 독자 엔진, 최초의 상용화 전기차 배터리 등으로 세계 시장을 석권했다.

2025년 대한민국은 다시 한 번 위기를 겪고 있다. 인공지능(AI)같은 신산업에서 미국과 중국이 까마득한 격차를 벌리고 있고 저성장·저출산·양극화와 같은 구조적 도전에도 맞서야 하는 처지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관세전쟁’의 총성을 울렸고 중국의 AI 모델 ‘딥시크’ 충격이 한국 경제를 옭아매고 있다.

서울경제신문은 이에 올해를 관통하는 캐치프레이즈로 ‘다시, KOREA 미러클’을 내세우고 정부와 기업, 정치인을 비롯한 위대한 국민들이 써왔던 기적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분석하고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현대차는 미쓰비시, 기아차는 마쓰다, 대우차는 오펠이 기술을 다 주는데 자동차 회사에서 박사가 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현대자동차, 그리고 대한민국 최초의 독자 자동차 엔진 ‘알파 엔진’ 개발을 이끈 이현순 중앙대 이사장(전 현대차 부회장)은 최근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개발 당시 정부 관료가 전한 말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 이사장은 “그때 우리가 엔진 개발을 하는 게 우주선 띄우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생각하더라”고 회고했다.

이 이사장과 본지가 만난 곳은 강남구에 위치한 ‘현대모터스튜디오 서울’. 1층에는 미국 자동차 회사 포드에서 기술을 받아 현대차가 1968년 조립 생산한 모델 ‘코티나 마크2’가 전시돼 있었다. 독일의 폭스바겐, 일본의 도요타자동차보다 40년 늦은 1967년에 시작한 현대차는 이제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3위의 완성차 기업으로 성장했다. 추격의 액셀은 엔진 기술을 독립한 1991년에 밟았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강남 아파트 5000채 값을 투자한 연구개발(R&D)을 밀어붙이며 알파 엔진을 탄생시켰다. 이 과정에서 부품·소재 업체들도 함께 성장하며 세계적인 자동차 산업 생태계가 형성됐다. 정주영 회장의 집념, 이 이사장을 비롯한 당시 연구원들의 열정이 현대차가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던 독일·일본 기업들을 추월하는 ‘스푸트니크 모멘트’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현순 중앙대학교 이사장(전 현대차 부회장)이 서울 강남구 현대 모터스튜디오 서울에서 서울경제신문에 앞서 1991년에 개발한 한국 최초 국산 자동차 엔진인 '알파엔진'을 소개하고 있다. 조태형 기자




1월 23일 현대차 기술의 심장부 경기도 화성시 남양연구소에는 차세대 하이브리드 시스템 ‘TMED-II’ 여러 개가 수백 시간을 멈추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다. 현장 연구원은 “실제 주행 환경보다 훨씬 가혹한 조건을 통과해야 하는 시험”이라고 말했다. 정몽구 회장의 ‘품질 경영’으로 탄생한 하이브리드 시스템은 성능과 효율 측면에서 곧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2월 찾은 현대차 강남 사옥의 ‘N브랜드’ 기획 현장은 열정으로 가득했다. 이곳에서는 정의선 회장이 주도한 N브랜드와 고성능 제네시스가 기획되고 있다. 박준우 N브랜드매니지먼트 실장은 “우리의 임무는 상상과 용기, 현대차 기술의 선봉이자 라이트하우스(등대)”라고 강조했다. N브랜드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은 전기차 아이오닉5N에 이어 제네시스의 고성능 ‘마그마’를 준비하고 있다.

지난해 대한민국 무역수지는 516억 달러(약 75조 2500억 원). 자동차 산업이 631억 달러(약 92조 원)를 벌어오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 이사장은 “지금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부품사들도 대부분 현대차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더 높이 올라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주영의 독립 프로젝트 '알파 엔진'
"어떻게 우리는 엔진이 없나" 일성에
이현순 박사 영입하고 연구소 지어
아파트 1채 엔진 300대 넘게 제작
엔진독립, 현대차 글로벌 기업 성장


이현순 중앙대학교 이사장(전 현대차 부회장)이 서울 강남구 현대 모터스튜디오 서울에서 서울경제신문에 앞서 1991년에 개발한 한국 최초 국산 자동차 엔진인 '알파엔진'을 바라보고 있다. 조태형 기자


“언제까지 남의 엔진만 들여와서 쓸 것입니까.”

1983년 여름.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직원들을 향해 “회사가 차를 만들어온 지 20년이 다 돼가는데 어떻게 우리 엔진이 없느냐”며 분통을 터트렸다.

1967년부터 자동차를 만든 현대차는 1975년 수출을 시작했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내연기관 자동차의 핵심인 엔진과 변속기는 일본 것이었다. 수출 시장에서는 ‘무늬만 한국 차’라는 비아냥뿐만 아니라 돈도, 자동차 개발의 주도권도 모두 일본이 쥐고 있었다.

1981년 현대차가 발표한 ‘X카 프로젝트’는 당시 현대차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미쓰비시와 기술제휴를 기반으로 한 이 프로젝트를 위해 현대차는 미쓰비시에 선불금 6억 5000만 엔을 주고 순판매가의 3%를 기술료로 지불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현대차의 엑셀 한 대를 출시할 때마다 엔진 5000엔, 섀시 2500엔 등 1만 4500엔, 차 원가의 10% 이상을 로열티로 지불했다. 연간 30만 대 수출이 목표였는데 당시 돈으로 미쓰비시에 로열티만 43억 5000만 엔, 당시 환율로 100억 원을 지불했다. 현대차 전체 연구개발(R&D)비의 절반이 넘었다.

정 명예회장의 분통은 현대자동차그룹이 30년 뒤 독일의 폭스바겐, 일본의 도요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완성차 기업이 되는 초석이 됐다. 1983년 9월 현대차는 미쓰비시의 그늘에서 나오기 위한 ‘신(新)엔진 개발 계획’을 시작했다. 정 명예회장의 주도로 미국 제너럴모터스(GM)의 엔지니어 이현순 박사(현 중앙대 이사장)를 영입했고 현대차 엔진개발실은 1984년 기술개발실로 확대됐다. 정 명예회장은 울산연구소와 별도로 용인 마북리 일대에 엔진과 변속기를 개발하기 위한 마북리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렇게 현대차의 최초 독자 엔진,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 엔진 개발 역량을 성취한 알파 엔진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서울경제신문과 만난 이 이사장(전 현대차 부회장)은 “그 당시만 해도 미쓰비시가 하라는 대로만 하고 기술 더 받아오는 사람이 유능한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정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1980년대 국제무역은 영국의 마거릿 대처 수상,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신(新)자유주의 기조에 맞춰 각국은 문호를 낮추며 시장을 열고 있었다. 동시에 서로 잘하는 것을 하자는 ‘비교우위론’이 팽배했다. 이 이사장은 엔진 개발 때 만난 정부의 한 고위 관료의 말을 전했다. 그 고위 관료는 “한국 자동차 회사는 박사가 필요 없다”고 단언했다고 한다. 일본과 독일에서 기술을 우리 자동차 기업에 전수를 해주니 엔진과 변속기를 우리가 개발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 이사장은 “그 국장이 저에게 ‘큰 착각을 하고 있어요. 대한민국 자동차 회사에서 박사가 할 일이 없으니 (대학교) 교수로 가시라’고 하더라”면서 일화를 전했다. 자동차는 독자 기술을 개발할 역량도, 부품사 인프라도 없으니 기술을 받아서 쓰자는 주장이었다.

정부마저 이랬으니 개발 초기 현대차 내부의 반대 목소리는 정 명예회장의 개발 의지를 압도할 수준이었다. 울산 연구소장조차 “니들이 무슨 실력으로 미쓰비시를 뛰어넘느냐. 돈만 날리고 너희들은 안 될 거야. 웃기지 마”라고 비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엔진 개발은 엄청난 자금을 소모했다. 1986년 8월 시제품이 내구 시험에 들어갔는데 10월이 되자 열과 압력을 이기지 못한 엔진이 일주일에 한 대씩 깨졌다. 엔진 제작비는 한 대당 2000만 원. 1980년대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30평대 한 채에 달하는 돈이었다.

엔진 개발은 내부의 견제를 넘어 내란이 일어날 수준이었다. 회사 내에 소위 ‘친(親)미쓰비시’ 인물들이 신엔진개발실장이던 이 이사장이 독일 출장을 간 사이 그의 책상을 치워버리고 ‘보직 해임’을 한 것이다. 그리고는 엔진 개발 대신 미쓰비시의 엔진 성능을 개량하는 프로젝트를 맡겼다. 정 명예회장은 미국에서 이 이사장을 영입할 때 “세계 시장에 나가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엔진을 개발해 다오”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하지만 내부의 반대 세력은 미쓰비시의 그늘을 벗어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안 정 명예회장은 노발대발하며 이 이사장의 복귀를 지시했고 다시 엔진 개발을 위한 바퀴가 돌아갔다.

이현순 중앙대학교 이사장이 12월 17일 서울 강남구 현대 모터스튜디오 서울에서 서울경제신문과 인터뷰하며 한국 최초 국산 자동차 엔진인 '알파엔진' 개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조태형 기자 2024.12.17


현대차가 엔진 개발에 목을 맨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1980년대 고도성장으로 1가구 1대, ‘마이카(My car)’ 시대가 도래하고 수출이 40만 대를 돌파할수록 미쓰비시로 나가는 돈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1988년 현대차가 800억 원의 최대 순익을 내고도 450억 원을 미쓰비시에 로열티로 줘야 하는 형국이었다. 이 이사장은 “강제도 아니었고 주 7일 일했다”고 말했다. 출근은 오전 7시, 퇴근은 오후 11시였다. 이 사장은 “밤을 샌 적도 많았다”며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엔진 개발에 속도가 붙자 미쓰비시는 급기야 1989년 현대차에 “로열티를 절반으로 깎을 테니 이현순을 해고하라”고 제안했다. 정 명예회장은 이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 이사장은 이에 대해 “이미 우리는 1989년 엔진 개발을 끝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알파 엔진 프로젝트는 1991년 엔진 대량생산에 돌입하며 5년 6개월 만에 완료됐다. 324개의 엔진과 188개의 변속기, 약 150대의 시험 차량을 투입했다. 현대차는 1000억 원. 당시 은마아파트 5000채에 달하는 자금을 투입해 엔진과 변속기 독립을 이뤄냈다.

현대차의 엔진 기술 독립은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이 독일·일본과 견줄 자동차 강국, 수출 대국으로 크는 밑거름이 됐다. 현대차는 알파 엔진을 시작으로 세타, 람다, 타우 등 저배기량에서 고배기량 엔진에 이어 하이브리드 엔진을 만들어냈고 소비자가 요구하는 모든 차량을 만들 기반을 갖췄다. 1990년 67만 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2024년 현대차·기아를 합쳐 전 세계에서 약 730만 대, 매출액이 280조 원 규모의 세계 3위 자동차 거인으로 성장했다. 그사이 자동차 산업은 국가의 사실상 기간산업이 됐다. 현대차그룹의 1차 협력사 237개의 매출액(2023년 기준)도 90조 원, 협력 업체들의 생산 유발효과만 238조 원, 취업 유발효과가 연간 60만 명에 달한다.

이 이사장은 모든 인프라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던 현대차의 노력이 지금의 자동차 강국을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이 이사장은 “당시 우리와 함께 큰 부품사가 50개는 넘을 것”이라며 “부품도 국산화해야 가격 경쟁력도 생긴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가 세계시장으로 나가려면 부품까지 다 만들 수는 없었다”며 “설계를 그려주고 자체 노하우도 오픈해 부품을 대량생산하도록 지원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1991년 현대자동차가 국내 최초로 독자 개발한 알파 엔진 신문광고. 조태형 기자 2024.12.17


"도요타도 하는데 우리도 할 수 있다" 전동화 시대 연 하이브리드 엔진
직병렬 시스템 만든 도요타 다수 특허로 개발 막아
기술난제·수익성 등 뚫고 병렬형 구조로 기술독립
현대차 'EV기술'의 토대 차세대 HEV 실물도 첫선


문상훈 현대자동차 전동화구동실장이 1월 23일 경기도 화성시 현대자동차그룹 남양연구소에서 차세대 하이브리드엔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제공=현대차


“도요타도 하이브리드차를 만드는데 우리도 만들 수 있습니다.”

정몽구 전 현대차그룹 회장의 일성으로 2004년 현대차 남양연구소에는 ‘하이브리드 개발실’이 신설됐다. 모여든 연구원만 33명. 현대차에서는 이들을 ‘독립투사’라고 표현했다. 당시 연구개발을 담당했던 연구원들은 “모두가 인생을 걸고 매달렸다”고 회고했다.

지난달 23일 경기도 화성시 현대차그룹 남양연구소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난 문상훈 현대자동차 전동화구동실장은 당시 개발 상황에 대해 “하이브리드에 대한 정 회장님의 의지가 엄청나게 강했다”고 말했다.

알파 엔진 개발에 성공하며 기술 독립을 하던 1990년 초. 세계 자동차 시장은 독자 엔진 하나로 대응할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990년 미국의 걸프전으로 국제유가가 치솟았고 시대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기후변화를 경고하는 목소리가 자동차 산업의 요람이던 유럽과 미국에서 커지기 시작했다. 1992년 6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개최된 유엔환경개발회의(UNCED)에서 채택된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들에 순차적으로 온실가스 감축을 요구했다. 친환경 차 시장을 싹 틔운 기후변화 시대의 서막이 열렸다.

1997년 일본 교토에서 개최된 기후변화협약 제3차 당사국총회는 친환경 차 시대가 온다는 것을 알렸다. 온실가스 감축이 의무화됐고 2005년부터 자동차의 배출가스 규제가 예고됐다. 현대차가 엔진 개발로 추격하고 있던 일본 업체들은 여지없이 더 빨리 갔다. 교토의정서가 채택되던 1997년 일본의 도요타자동차가 세계 최초의 하이브리드차량 프리우스를 양산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도요타는 누구도 따라할 수 없게 자사의 직병렬형 하이브리드 시스템에 다수의 특허를 걸었다. 결국 현대차는 알파 엔진 프로젝트처럼 독자적인 하이브리드 시스템 개발에 돌입했다.

현대차는 이번에도 내부의 불신을 맞닥뜨렸다. “일본이나 독일에 가서 기술이나 배워서 오라”는 자조감이 팽배했다. 현대차는 1995년 제1회 서울모터쇼에 프로 엑센트를 기반으로 하이브리드 콘셉트카 ‘FGV-1’을 내놓을 정도로 하이브리드차 양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2000년에는 베르나 하이브리드, 2004년에는 클릭 하이브리드를 한정 생산하기도 했다.

문제는 효율과 양산 능력이었다. 문 실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도요타가 100가지 정도의 시스템을 쫙 나열해 놓고 수년간의 검토를 거쳐 가장 좋은 시스템을 내놓았다는 소문이 있었다”며 “일본 업체들은 당시 유럽 업체들보다 전력 변환 기술이 상당히 뛰어났고 잘할 수 있는 시스템을 하이브리드라고 판단하고 개발한 것”이라고 말했다. 도요타의 특허를 피해 성능은 필적하는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만들어야 했는데 기술력은 부족했다. 문 실장은 “2004년 클릭 하이브리드를 만들 때만 해도 (모터·인버터 등) 파워일렉트릭(PE) 시스템을 해외 업체에서 공급받아 사용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기술적 난제와 양산 능력, 수익성의 함수에 갇힌 현대차는 2006년께 하이브리드 시스템 개발을 위해 선택의 길에 놓이게 됐다. 미쓰비시에서 엔진과 변속기 기술을 받아왔던 것처럼 하이브리드 시스템에 들어갈 핵심 부품을 해외에 의존하느냐, 자체 개발하느냐였다. 실제로 유럽 업체들이 공동 개발을 타진해오기도 했다.

현대자동차그룹 남양연구소에 현대자동차그룹이 개발한 독자 엔진과 변속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제공=현대차


현대차의 선택은 독자 개발이었다. 고안한 시스템은 도요타와 달리 ‘엔진-엔진클러치-구동모터-변속기’로 구성돼 클러치를 통해 엔진과 모터가 상황에 따라 구동하는 병렬형 구조다. 두 개의 모터에 유성기어 형태의 파워스플릿디바이스(PSD)를 사용하는 도요타의 직병렬형 구조보다 간결해 양산에 성공한다면 제조 경쟁력도 더 높았다.

문 실장은 “당시에는 진짜 이것을 양산할 수 있을까, 엔진과 모터 사이를 오가는 클러치가 얼마나 부드럽게 붙을 수 있을까가 핵심이었다”며 “개발 초기만 해도 클러치를 설계하는 분들이 어마어마하게 고생을 했다”고 설명했다.

현대차는 2011년 5월 세계 최초로 병렬형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탑재한 쏘나타 하이브리드를, 기아는 K5 하이브리드를 출시했다. 공인 연비가 1ℓ당 21㎞, 당시 도요타 캠리 하이브리드(19.7㎞/ℓ)보다 연비에서 앞섰다.

하이브리드차 기술 독립은 현대차그룹을 세계 3위의 완성차 기업으로 위상을 끌어올렸다. 온실가스 감축 규제 대응 기술로 각광받았던 유럽의 클린 디젤 엔진들은 2015년 배기가스 조작 사건인 ‘디젤 게이트’에 휩싸이며 몰락했고 친환경차 시장은 하이브리드차와 전기차로 재편됐다. 2011년 국내 1만 6000대, 해외 1만 5000대 수준이던 현대차의 하이브리드차는 디젤 게이트 이후 급격히 성장해 2024년 전체의 10%가 넘는 73만여 대의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문 실장은 남양연구소에서 현대차그룹이 올해 세계에 출시할 차세대 하이브리드 시스템 TMED-Ⅱ의 실물을 본지에 세계 최초로 공개했다. 기존의 하이브리드 시스템은 모터와 변속기가 하나의 세트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배기량이 큰 가로 배치 엔진과 함께 엔진룸에 넣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날 확인한 TMED-Ⅱ의 크기는 외부에 있던 발전기가 시스템 안으로 들어왔지만 크기는 기존의 8단 변속기 크기 수준으로 작아졌다. 이 때문에 고배기량 엔진과도 매칭이 가능하다. 문 실장은 “이제는 엔진과 클러치가 붙을 때 이질감이 거의 안 느껴질 것”이라며 “축적된 노하우가 그대로 반영됐기 때문에 (하이브리드 기술은) 저희가 감히 세계 최고라고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고 강조했다.

현대차의 하이브리드 시스템 개발은 험로였다. 1997년 도요타의 1세대 프리우스가 나온 뒤 28년, 본격적인 개발에 돌입한 지 약 20년 만에 세계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는 수준까지 기술적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더 주목해야 할 지점은 현대차가 하이브리드 시스템 개발로 인해 전기차(EV) 기술 발전의 기회를 열었다는 것이다. 독자 개발은 기술과 경험의 축적을 낳고 다음 단계로 이어진다. 하이브리드 시스템은 현재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 현대차의 EV 기술의 기초가 됐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미국 시장에서 테슬라에 이어 전기차 판매 2위를 기록하며 기술력을 입증하고 있다.

문 실장은 “하이브리드 시스템은 전기동력 부품까지 다 고려해 직접 개발한 모터 시스템들이 들어가 있다”며 “PE 시스템에 대한 노하우가 전기차에도 쌓였고 전기차에서 우리가 선도적인 지위를 차지해야겠다는 방향이 생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술은 돈 아닌 열정으로 만든다"…고성능 향한 정의선의 집념
아이오닉5N 고성능 전기차 이정표 세워
제네시스 고성능 '마그마' 올해 데뷔
정의선, 낡은 현대차 이미지 끌어올려


현대자동차는 11월 21일(목)부터 24일(일)까지 일본 아이치현과 기후현에서 열린 2024 WRC(World Rally Championship) 마지막 라운드를 끝으로 2024 WRC 시즌 드라이버·코드라이버 부문 우승을 달성했다. 정의선(오른쪽 두번째줄 첫번째) 현대차그룹 회장이 WRC 일본 랠리 후 드라이버 우승을 차지한 티에리 누빌(차 위 앞 줄 오른쪽) 선수 및 임직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현대차


지난해 12월,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 중국에서 희소식이 들려왔다. 현대자동차의 고성능 전기차(EV) 아이오닉5N이 ‘2024 중국 올해의 차 어워즈’에서 올해의 고성능차로 선정된 것이다. 아이오닉5N은 지난해 8월 말 중국 시장에 출시됐는데 단 3개월 만에 세계적인 고성능 브랜드를 제치고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211점. 2위인 메르세데스·AMG C63 S E 퍼포먼스(142점)를 압도적인 차이로 이겼다.

앞서 8월에는 미국 자동차 전문지 카앤드라이버가 현대차의 고성능 전기차 아이오닉5N을 ‘2024 올해의 전기차’에 선정했다. 1986년 미국에 처음으로 수출된 엑셀을 두고 “붙어 있는 건 다 떨어지는 차”로 조롱받던 현대차가 최고 성능을 갖춘 차 브랜드로 거듭난 것이다. 아이오닉5N은 전 세계 자동차 브랜드들에 고성능 전기차가 나아갈 방향성도 제시했다.

N브랜드는 정의선 회장의 열정으로 시작했다. 2000년대 현대차·기아는 고리타분한 차였다. 티뷰론과 제네시스 쿠페가 있었지만 젊은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했다. 현대차는 브랜드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2012년 파리모터쇼에서 세계 최고의 모터스포츠 대회 중 하나인 월드랠리챔피언십(WRC) 재도전을 선언하고 2013년 독일 알체나우에 현대모터스포츠법인을 설립했다.

N브랜드 설립을 주도했던 박준우 N브랜드매니지먼트실 실장은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당시 상황에 대해 “티뷰론을 타면서 ‘회사가 더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정 회장님께서 WRC에 나간다고 선언했을 때 ‘N브랜드’에 대한 보고서를 컨펌 받았다”고 설명했다. N브랜드의 첫 계획은 2013년 12월. 2020년까지 7년의 장기 계획이었다.

N브랜드는 2019년 WRC에 참가한 지 6년 만에 한국 브랜드 최초로 제조사 부문 종합 우승을 차지하며 모터스포츠 무대 정상에 섰다. 2020년 WRC에서도 제조사 부문 종합 우승, 지난해에는 사상 처음으로 드라이버 부문에서 우승하며 양산차를 기반으로 한 고성능 기술이 세계 수준에 와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박 실장은 전 세계 고성능 전기차의 이정표를 세운 아이오닉5N의 개발을 두고 “열정으로 기술을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 고성능 전기차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고 했다. 첫 시작은 2020년이었다. 당시만 해도 포르쉐가 타이칸을 내놓고 전기 고성능 스포츠카 브랜드 리막은 1888마력의 전기차 ‘C Two’를 선보였다. 박 실장은 “고성능 전기차들이 독일 뉘르부르크링을 한 바퀴 돌고 나면 ‘모터가 과열됐습니다. 안전모드로 진입합니다’는 경고등이 떴다”며 고성능에 열을 올리던 전기차들의 허상을 짚었다. 박 실장은 “‘우리가 이런 차를 왜 만들어야 하지’라는 의문과 함께 무조건 성능 저하가 없는 고성능 전기차, 그리고 감성을 집어넣은 전기차를 만들자고 기획했다”고 회상했다.

박 실장은 “2.2톤이라는 거대한 중량을 ‘어떻게 하면 더 가벼운 차로 인식되고 날렵하게 움직이게 할까’라는 고민을 하며 서스펜션의 암(arm)이라든지 현가하질량(현가장치 아래에 걸려 있는 물체들의 총질량)에 대한 부분까지 고민하며 설계를 했다”고 말했다.

박준우 현대자동차 N브랜드매니지먼트실 실장이 현대차 강남사옥에서 고성능 'N브랜드'를 설명하며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현대차


아이오닉5N이 최고의 전기차로 평가받는 배경에는 내연기관 고성능 차의 배기음과 엔진 변속까지 느낄 수 있는 감성적인 세팅에 있다. 박 실장은 “연구소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개발한 사운드를 녹음하고 변속 패턴까지 적용했다”며 “고성능 차를 원하는 고객들이 뭘 원하는지를 우리는 알고 있었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과정에서 굉장히 많은 기술적인 발전을 이뤘다”고 설명했다. 아이오닉5N의 복합 출력은 641마력(hp)다. 하지만 경쟁사들은 1000마력 이상의 전기차를 만들어야 아이오닉5N의 성능을 따라잡을 수준이다.

박 실장은 모터스포츠에 대한 도전과 아이오닉5N의 개발은 돈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단언했다. 조직에 열정을 불어넣는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박 실장은 “(고성능 차의)기술을 개발하려면 비용만 들어가는 게 아니다”라며 “하드웨어가 어느 정도 받쳐주면 그것을 요리하는 소프트웨어, 즉 개발하는 사람의 열정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어 “우리 연구소에는 고성능을 연구하는 인원들이 충분히 있고 그 친구들도 자기가 만들고 싶은 차를 만드는 열정이 있다”고 했다.

박 실장은 정 회장의 열정이 있기 때문에 N브랜드와 현대차의 고성능 기술 역량이 더욱 발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정 회장이)현대자동차 기술 발전의 선봉장이고 회사에서 진취적으로 완전히 지원(Fully support)을 하고 있어 뛰어들 수 있었다”며 “기술은 그렇게 개발이 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현대차는 올해 고성능 분야에서 한 단계 더 진화한다. N브랜드에 이어 프리미엄 브랜드 제네시스는 고성능 라인업 ‘마그마’를 출시한다. 박 실장은 “고성능이라는 브랜드가 이제 회사 전체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인식이 있다”며 “마그마도 이제 조직적으로 시작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자동차의 고성능 전기차 아이오닉5N이 전기차 최초로 일본 후지 스피드웨이 서킷 공식 차량으로 선정됐다. 사진 제공=현대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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