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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87> 덕수궁 중명전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5.01.14 20:16:261905년 운명의 3주일은 10월27일 시작된다. 이날 일본 각의가 조선의 '보호국화'를 최종 확정한다. 이를 위해 일본군 1개 사단이 서울에 진입해 무력시위에 나섰다. 11월10일 이토 히로부미가 덕수궁 중명전을 방문해 고종에게 일본 국왕의 친서를 전달한다. 15일 이토는 다시 와 '보호조약' 체결을 요구하나 거부당한다. 17일 오전 하야시 곤스케 일본 공사는 일부 대신들을 공사관으로 불러 조약체결을 강요한다. 이날 오후3시 -
[역사의 향기] <86> 종로구 백운동천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5.01.07 20:10:04서울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인 종로구 백운동(白雲洞)계곡에는 옛날 '백운동천'이 흘렀고 이는 청계천으로 이어졌다. 옛 그림을 보면 서촌의 절경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언덕에 '백운동천(白雲洞天)'이라는 각자가 새겨진 바위가 지금도 눈에 선명하다. 각자 옆에는 작은 글씨로 '광무7년(光武七年)' '동농(東農)'이라는 글자도 있다. 즉 1903년에 동농 김가진(1846~1922)이라는 사람이 쓴 것이다. 그의 저택인 '백운장'이 근처에 -
[역사의 향기] <85>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12.17 20:46:57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 보면 동북쪽 모퉁이에 비석 하나가 비각에 들어앉아 있다. 조선시대 어느 때쯤의 유적인가 하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이 비석은 보기보다 중요하다. 원래 이름은 '대한제국대황제보령망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비(大韓帝國大皇帝寶齡望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로 상당히 길다. 보통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라고 부른다. 조선의 끝에서 두 번째 임금인 고종이 즉위 40주년이 된 것과 -
[역사의 향기] <84> 대한천일은행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12.10 20:45:31근대 경제·금융 제도의 핵심이 은행이라는 것을 조선 위정자들도 점차 이해하게 된다. 국내 산업 발전이나 예금자 보호가 목표는 아니었다. 19세기 말의 최대 과제는 세금 징수였다. 또 인플레이션 완화였다. 지난 1896년 조선은행, 1897년 한성은행이 잇따라 설립됐다. 이들에게는 적지 않은 정부 자금이 투입됐지만 어정쩡한 반관반민 체제는 별로 도움이 안됐다. '대한제국' 선포(1897년 10월)는 조선왕조를 지키려는 마지막 -
[역사의 향기] <83> 독립문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12.03 19:56:54통일로를 따라 서울로 들어와 무악재를 넘으면 널찍한 공터가 나오는데 바로 독립공원이다. 일제강점기 수많은 인사들이 고초를 겪은 서대문형문소역사관이 있고 좀 더 내려오면 '독립문(獨立門)'이 서 있다. 독립문은 지난 1897년 서재필 등 독립협회가 주도해 유럽의 개선문 형태로 세운 구조물이다. 여기서 '독립'은 흔히 생각하듯 일본에 대한 독립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엄혹한 일제강점기에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 -
[역사의 향기] <82> 환구단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11.26 20:24:57전통 시대에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황제'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조선왕조가 중국왕조와 사사건건 충돌하는 이유가 됐다. 조선을 제후국으로 인식한 중국왕조가 조선의 제천행사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이는 성리학적 질서의 어두운 면이기도 하다. 이 질서의 근본주의적 입장에 따르면 세상에는 질서와 분수가 있다. 하지만 고려 이전은 달랐다. 단군이라는 '하늘의 아들'이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은 모두의 인 -
[역사의 향기] <81> 덕수궁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11.19 20:22:56원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었는데 1907년 고종이 아들 순종에게 양위를 한 뒤 이곳에 계속 살면서 덕수궁(德壽宮)으로 바꿨다. '덕을 누리며 오래 살라'는 의미였지만 역사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서울에 소재한 많은 궁궐 중 하나일 뿐이었던 덕수궁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했던 고종이 1년 만인 1897년에 이곳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다. 고종은 1919년 죽을 때까지 이곳에 머무 -
[역사의 향기] <80> 정동 구 러시아 공사관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11.12 20:11:28한 국가의 왕이 안전을 담보하지 못해 남의 나라 공관에 숨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지난 1896년 일어났다. 고종이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것이다.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이웃 나라에 사례가 있기는 하다. 1925년 중국 베이징에서 선통제 푸이가 국민혁명군에게 쫓겨나 일본 영사관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사건 발생 13년 전에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고 당시 명목상 자금성에 있었을 뿐이다. 고종은 현직 -
[역사의 향기] <79> 정동 배재학당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11.05 20:18:49근대 초기 한국과 미국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비록 1871년 전쟁(신미양요)을 겪기는 했지만 1880년대에 상황이 변했다. 일본과 중국(청)을 견제하는 역할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후발 산업국인 미국은 영국·프랑스 등과는 달리 영토적 지배보다는 선교·상업에 치중했다. 1882년 외교관계를 튼 후 미국 선교사들이 대거 들어온다. 배재학당 설립자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조선에 온 것은 1885년. 외국인들이 많이 살던 -
[역사의 향기] <78> 건청궁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10.29 20:41:51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변혁기를 살다간 고종 이희(1852~1919)는 애처로운 사람이다. 12살의 나이에 조선 26대 국왕으로 즉위한 후 처음에는 부친인 흥선대원군의 '관리'를 받고 이후에는 부인 민씨(명성황후)에게 휘둘렸다. 나이가 들어 뭔가 해보려 했을 때는 이미 조선이라는 국가 자체가 일본제국주의의 마수에 얽혀들고 있었다. 건청궁(乾淸宮)은 부친의 간섭에서 벗어나 의욕적으로 일어선 1873년부터 을미사변이 일어난 189 -
[역사의 향기] <77> 견지동 우정총국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10.22 20:34:53외세에 의존한 개혁의 토대가 얼마나 허약한가를 보여준 대표적 사건이 갑신정변이다. 1884년 10월17일 김옥균 등 개화파들은 외척 민씨세력에 대해 쿠데타를 일으킨다. 근대적 우편기관인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 주요 인사들이 모인 틈을 노려 정권을 장악하려고 한 것이다. 개화파는 일본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정변에 일본군도 참전시켰다. '3일 천하'로 알려졌듯이 쿠데타는 3일 만에 실패했다. 중국군(청군)의 개입에 따른 것 -
[역사의 향기] <76> 용산 미군기지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10.15 20:15:101882년 7월7일 중국군(청군) 병력 3,000여명이 조선에 상륙한다. 이들은 서울로 들어와 흥선대원군을 납치하고 구식 군대를 공격 진압했다. 앞서 6월 군사제도 개혁에 반대하며 구식 군대가 일으킨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밀려났던 명성황후 및 외척 민씨들은 다시 권력을 회복한다. 민씨들을 도운 청나라는 이후 조선 정치에 적극 개입했다. 즉 임오군란은 한반도, 특히 수도 서울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
[역사의 향기] <75> 척화비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10.01 19:58:24'척화비(斥和碑)'라고 이름 지은 것은 누구였을까. 원래는 외세에 부화뇌동하는 것을 경고한다는 의미였겠다. 어쩐지 평화에 대한 거부의 뜻으로도 읽힌다. 이를 세우게 한 흥선대원군에게 고집불통 이미지를 씌웠다. 유럽 제국들이 식민지를 넓힐 때 쓰는 통상적인 수법은 선교사를 먼저 보내고 다음에 군대와 상인을 이용하는 것이다. 선교사 탄압과 통상 거부를 이유로 프랑스와 미국이 잇따라 조선을 침략한다. 지난 1866년 병 -
[역사의 향기] <74> 종로구 운현궁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9.24 19:58:14운현궁은 궁궐은 아니지만 궁궐보다 더 위세를 누린 집이다. 바로 조선 26대 국왕인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집이다. 병약하고 무능한 철종이 1863년 자식 없이 병으로 죽는다. 다음 국왕을 누구로 할 것인지 눈치작전이 시작되고 결국 고종이 12세로 즉위한다. 당시 세도를 부리던 안동김씨들은 어린 고종을 조종해 자신들의 권세를 유지할 속셈이었다. 하지만 이하응에 대한 판단이 틀렸다. 한때 '상갓집 -
[역사의 향기] <73> 부암동 석파정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9.17 19:58:34영정조 시대 이후 조선왕조의 운명이 기울기 시작한다. 외척들의 세도정치와 이에 따른 혼란 끝에 결국 식민지로 몰락하게 된다. 탕평책을 통해 이른바 신하들 간 '당쟁'을 막겠다는 영조의 시도는 군신 간의 역학관계를 무너뜨린다. 조선의 정치는 왕권과 신권의 균형에서 이뤄졌다. 하지만 점차 왕권으로 권력이 집중된다. 문제는 영정조와 같은 '명군'이 늘 있는 것은 아니었다는 데 있다. 19세기 이후 허약하고 어린 왕들이 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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