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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72> 월계동 초안산 내시 무덤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9.10 20:21:27내시(환관)를 두고 학계는 오랫동안 논쟁을 벌였다. '고자'에 대한 논의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내시도 엄연한 역사다. 우리 기록에 내시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신라 말인 9세기 초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3세기 진시황 때 환관 조고가 전횡을 일삼았으니 이런 제도가 훨씬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내시의 존재는 전제권력과 직결된다. 왕이 전제권력을 휘두르며 신하들의 도전을 용납하지 않는 중국사에서는 왕의 -
[역사의 향기] <71> 이촌동 새남터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9.03 20:04:21조선사회에 로마가톨릭이 알려진 것은 임진왜란 때다. 왜군의 주력부대를 지휘한 고니시 유키나가가 가톨릭 신자로서 십자가 깃발을 앞세우고 전투를 벌였다. 스페인 출신으로 당시 일본에 와 있던 그레고리오 세스페데스 신부가 지난 1593년 국내에 들어와 1년을 머물기도 했다. 일본에서의 전파는 전쟁 과정의 해프닝으로 끝났다. 조선후기부터는 청나라가 통로가 됐다. 1783년(정조 7년) 베이징에 갔던 이승훈이 최초로 세례를 -
[역사의 향기] <70> 수원 화성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8.27 20:20:451796년(정조 20) 수원 화성의 성곽공사가 완공된다. 사실상 조선시대의 마지막 대규모 건설사업이다. 총 길이 5.7㎞의 성을 쌓고 주변 주민을 이주시켜 신도시를 만들었다. 국왕이 머물 수 있는 행궁도 조성했다. 화성 건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왕권 강화를 위해서는 새로운 공간이 필요했다. 서울에는 반대세력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생각에 정치·군사·경제적인 면에서 자신을 뒷받침할 수 있는 새로운 도시가 필요했다. 교 -
[역사의 향기] <69> 옥인동 송석원터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8.20 20:02:32개별 왕조의 지속기간이 긴 한국사에서 왕조 교체는 곧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주도세력이 있었다. 신라 말의 최치원 등 육두품이, 고려 말의 향리 출신 정도전·정몽주 등 신진사대부가 그랬다. 조선은 어땠을까. '중인'계층이 있었다. 조선 후기 양반사회가 경직돼가고 사회발전에 오히려 장애로 작용하면서 중인 세력이 급속히 성장한다. 중인에는 중앙·지방의 아전들도 있지만 핵심은 기술직인 의 -
[역사의 향기] <68> 창덕궁 규장각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8.13 20:11:18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들어선 후 정면을 보면 근처에 '규장각(奎章閣)'이라는 건물이 사진처럼 있다. 대개는 창덕궁 후원의 부용지 인근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또 다른 곳에도 있다니. 둘 다 규장각이 맞다. 후원에 있는 규장각은 정조의 즉위 첫해인 1776년 세운 곳이다. 하지만 후원 깊숙이 있다 보니 아무래도 신하들이 들고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규장각의 업무도 늘어났다. 그래서 5년이 지난 1781년에 이전 -
[역사의 향기] <67> 탕평비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8.06 19:43:11정도전이 구상한 정치는 왕권과 신권의 균형이다. 조선후기로 가면서 균형이 깨진다. 크게 두 가지 원인 때문이다. 신료들이 자기분열 과정을 거치면서 단일성이 약해졌다. 즉 당파 간 대립이 심화됐다. 반면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의 경제·사회적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목으로 국왕의 힘이 커졌다. 왕권이 신권을 결정적으로 누르게 된 것이 영조 때다. 결과는 '탕평책'으로 나왔다. 주요 당파였던 노론과 소론을 억누르고 국왕 -
[역사의 향기] <66> 탕춘대성·홍지문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7.30 20:08:27서울 지하철 3호선 홍제역에서 북악터널 쪽으로 가다 보면 상명대 못 미쳐 성곽과 성문이 보인다. 한양도성 지역도 아니고 북한산성도 아닌데 웬 산성이냐고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다. 이곳이 바로 탕춘대성(蕩春臺城)이다. 사진에서 오른쪽 버스가 지나가는 도로변에 보이는 성문은 관문 격인 홍지문(弘智門)이다. 성문 옆으로는 오간수문(五間水門)이 있어 홍제천을 흐르게 했다. 왜 이곳에 성이 있을까. 북한산성을 완성하고 이 -
[역사의 향기] <65> 북한산성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7.23 20:15:55군사적인 면에서 조선 전기와 후기는 차이를 보인다. 전기가 주로 이민족들과의 충돌에 대비한 국경방위에 치중했다면 후기는 수도 방어에 주력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잇따라 수도 한양이 함락당한 경험은 국왕과 조선정부의 전략적인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어쨌든 수도는 지켜야 한다는 각오다. 이를 위해 한양 도성을 견고히 하고 주위에 방어거점을 쌓아 나갔다. 도성의 성벽을 더 높이고 단단히 했으며 남한산성과 강 -
[역사의 향기] <64> 상평통보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7.16 20:11:421예전에 농촌에서 흔히 듣던 말 중에 '쌀 팔러 간다'가 있다. 쌀을 사러 가면서도 '팔러' 간다고 했다. 전통시대 물물교환의 영향이다. 화폐가 흔하지 않던 시절 쌀이 실질적인 통용화페, 즉 통화의 역할을 했던 시기부터의 습관이다. 물론 화폐(돈)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칼 모양으로 생긴 고조선 시대의 화폐 '명도전(明刀錢)'을 시작으로 국가나 시대별로 수많은 화폐가 있었다. 금이나 은 뭉치를 화폐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했 -
[역사의 향기] <63> 청운동 백세청풍 바위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7.09 20:03:04지하철 경복궁역에서 자하문로를 따라 올라가다가 청운동 청운초등학교에서 학교를 왼쪽에 두고 인왕산 쪽으로 오른다. 아파트와 단독주택이 혼재돼 있는데 중턱쯤에 철제울타리 안으로 글자를 새긴 바위가 보인다. 자세히 보면 '백세청풍'이라고 쓰여 있다. 이곳은 서촌지역이다. 조선 후기 사대부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다. 바위가 있는 자리는 아우 김상헌과 함께 청나라에 저항한 척화파로 이름이 높았던 김상용(1561~1637)의 -
[역사의 향기] <62> 석촌동 삼전도비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7.02 20:14:291637년 1월30일 조선왕조 600년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국왕이 적국 수장에게 직접 항복하는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남한산성을 나온 인조 '이종'은 지금의 송파구 석촌동 삼전도에서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고개를 숙였다. 병자호란은 앞서 임진왜란과 달리 조선이 완패한 사건이다. 때문에 이는 조선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긍정적으로는 부국강병의 추구다. 패전의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국방력 강화와 -
[역사의 향기] <61> 남한산성 행궁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6.25 20:16:531636년 병자호란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사건이 아니었다. 청나라와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러 전쟁이 일어날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앞서 1627년 정묘호란 때도 적군(당시 후금)은 황해도 평산까지 왔었다. 새 전쟁은 사생결단의 대결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과거의 경험에 매달려 산성에서 버티기로 한 것이다. 이번에는 상대가 달랐다. 속도전으로 급습했다. 1636년 12월 -
[역사의 향기] <60> 신영동 세검정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6.18 20:01:02조선 시대를 통틀어 중도에서 폐위된 임금은 2명이다. 바로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불명예스럽게 퇴위했기에 조(祖)·종(宗)으로 불리지 못하고 그냥 이름인 '**군(君)'으로만 역사에 남아있다. 백성이 임금을 쫓아낸다는 것은 이웃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임금을 몰아내고도 왕조가 유지된다는 것도 세계사에서 찾기 쉽지 않은 사례다. 조선왕조가 그만큼 긴장과 균형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국왕조차도 잘못하면 -
[역사의 향기] <59> 경희궁 서암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6.11 20:13:41서울의 5대 궁궐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그리고 경희궁이다. 이 중 가장 홀대받는 것이 경희궁이다. 한창 때 7만평이 넘었다는 궁궐 규모는 일제강점기와 도시개발 과정을 거치면서 3분의1로 축소됐다. 건물도 최근 복원 차원에서 새로 지은 것이 대부분이다. 다른 궁궐에 비해 볼 것이 없어 입장료도 받지 않는다. 광해군 9년(1617년) 짓기 시작해 15년(1623년) 완공했다. 재미있는 것은 입지다. 인왕산 아래에 왕기( -
[역사의 향기] <58>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6.04 21:05:52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결국 죽었다. 조선 남부에 흩어져 있던 일본군은 '도요토미의 유언'에 따라 철수하기 시작한다. 이순신 장군은 바닷길을 가로막고 '항복'을 요구했다. 임진왜란 최대의 해전이자 최후의 전투였던 노량해전이 그해 11월18일부터 19일까지 광양시와 남해군 사이에서 벌어졌다. 사쓰마(지금의 규슈 남부 가고시마)의 영주였던 시마즈 야스히로가 지휘하는 500척의 일본함대를 이순신 장군이 이끈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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