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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57> 동묘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5.28 20:10:33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 그리고 중국(명)이 모두 참전한 동아시아의 국제전쟁이었다. 조선과 일본이야 전쟁 당사자니까 별문제로 하더라도 명나라의 참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현재 중국이 부르는 임진왜란의 공식 명칭은 '항왜원조(抗倭援朝)'다. 즉 도와줬으니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시혜적 의미를 깔고 있다. 반면 국내에서는 명나라가 자기 방어를 위해, 순망치한(脣亡齒寒)의 피해를 줄이기 위 -
[역사의 향기] <55> 마포나루터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5.14 17:32:01우리나라에는 산과 강이 많다. 여기서 문제 하나. 조선시대를 기준으로 어떤 선비가 과거를 보기 위해 부산에서 서울(한양)로 올라온다면 몇 개의 산과 강을 넘거나 건너야 했을까. 물론 난센스 문제는 아니다. 답은 간단하다. 강은 하나도 건널 필요가 없고 산은 조령 하나만 넘으면 된다. 즉 부산에서 배를 타고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간 후 문경에서 조령고개를 넘고 다시 충주에서 남한강을 타고 하류로 내려가면 바로 서울에 -
[역사의 향기] <54> 방학동 연산군묘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5.07 18:17:041506년 9월1일 박원종·성희안 등이 이끈 군사들이 경복궁을 점령한다. 연산군 12년 치세가 끝나는 순간이다. 역사상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부르는 사건이다. '반정'은 지금 의미의 쿠데타는 아니다. 당시엔 잘못된 정치를 바르게 한다는 의미로 '되돌릴 반(反)' 자를 썼다. 반정 세력은 연산군의 폭압정치를 해소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동생인 진성대군이 연산군에 이어 중종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반정 과정에서 진성대군의 -
[역사의 향기] <53> 삼성동 봉은사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4.23 18:30:03조선시대의 사상을 일컬어 '숭유억불(崇儒抑佛)'이라고 하지만 불교도 여전히 번성했다. 불교가 '현실 도피'를 이유로 공격당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살하는 차원은 아니었다. 훌륭한 승려가 많이 나왔고 사원 건축도 활발했다. 지금 남아 있는 대부분의 건물은 조선시대에 지은 것이다. 기본적으로 한국 역사에서 종교전쟁이라는 개념은 낯설다. '억불'이라고 해도 고려 말과 같이 사원의 세력이 지나치게 팽창함으로써 사회 문제 -
[역사의 향기] <52> 종로 육의전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4.16 18:08:39지난 2003년 12월 말 한 건설사가 종로2가에서 주상복합건물을 짓고 있었다. 낡은 기존 건물을 철거해야 했는데 터파기를 할 때 아주 오래된 장대석(長臺石·섬돌 층계나 축대를 쌓는 데 쓰는 길게 다듬은 돌)이 발견됐다. 문화재 당국에서 즉각 조사에 나섰다. 발굴 결과는 놀라웠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쌓였던 조선시대의 역사가 실제 눈앞에 드러난 것이다. 종로의 시전(市廛·정부의 특허권을 가졌던 전문가게) 지역 중심인 -
[역사의 향기] <51> 압구정터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4.09 17:47:19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한명회가 탄핵을 받는다. 1485년(성종 16)의 일이다. 1453년 계유정난으로 세조 집권의 최고 공신이 된 후 30여년 동안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그였다. 내용은 사소할 수도 있었다. 명나라 사신을 자신이 소유하던 정자 '압구정(狎鷗亭)'에 개인적으로 불러 접대한 일 때문이었다. 하지만 직권남용이라고 사헌부에서 탄핵하면서 결국 몰락했다. 분노에 떨던 한명회는 1487년 숨을 거둔다. 사헌부는 관리들을 -
[역사의 향기] <50> 창경궁 지당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4.02 17:51:07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동물원과 식물원, 놀이시설이 꽉 찼고 벚꽃은 여의도보다 더 유명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남의 궁궐을 놀이공원으로 만들고 희희낙락했다. 수치스러운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다. 더 분통한 것은 해방 후에도 한참을 창경원으로 있었다는 것이다. 궁궐로의 복원은 1983년에나 시작됐고 원래의 모습을 찾은 것은 1986년이다. 민족의 치욕이 40여년간 더 지속된 것이다. 경복궁, 창덕 -
[역사의 향기] <49> 제기동 선농단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3.26 17:33:50'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이 있듯이 전통사회에서 국가 경제의 중심은 농업이었다. 물론 열심히 일하면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지만 토지가 한정돼 있는 만큼 궁극적인 생산량엔 한계가 있었다. 전통사회가 근검절약을 중시한 이유다. 노동력 확보를 위해 농업외 상공업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조선 시대는 농업기술면에서 가장 발달한 시대다. 각종 농기구를 개량하고 농업서적을 간행했으며 농민에 대한 대우 -
[역사의 향기] <48> 노량진동 사육신묘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3.19 18:11:37사육신(死六臣)은 세조 2년(1456)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처형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6명을 가리킨다. '병자사화(丙子士禍)'라고도 불리는 당시 사건에서 70여명이 반역 혐의로 처형 등 화를 입었다. 왕권과의 대립 과정에서 신하들이 피해를 본 '사화'의 시작이다. 조선왕조 내내 왕권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를 두고 논쟁이 이어졌다. 조선의 설계자로 불리며 '군신공치(君 -
[역사의 향기] <47> 덕수궁 자격루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3.12 17:25:3415세기 기준으로 조선의 과학기술이 세계수준에서 결코 뒤지지 않았다. 북방(여진족)과 남방(대마도) 원정에서 보듯 강한 군사력, 발달된 농업기술과 생산력, 유교문화, 과학기술이 어우러지면서 우리 역사상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과학기술 측면에서는 장영실이라는 천재가 나타나 천문관측용 간의·혼천의, 금속활자인 갑인자, 기계식 물시계인 자격루, 해시계인 앙부일구, 강수량 측정을 위한 측우기·수표 등의 제작에 직간접 -
[역사의 향기] <46> 장충동 수표교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3.05 17:33:49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치수는 국가경영의 핵심이다. 조선왕조가 한양을 도읍으로 삼음으로써 청계천은 이 도시의 중심부를 흐르는 가장 중요한 하천이 됐다. 물론 개국 초기 한동안은 여기까지 손을 대지 못했다. 자연하천 그대로인 청계천엔 종종 홍수가 발생, 민가와 도로가 침수되곤 했다. 정국이 안정되는 태종 때부터 치수사업을 시작했다. 바닥을 깊이 파고 직선화했고 하천 양쪽을 높였다. 이 하천의 본래의 이름은 개천(開 -
[역사의 향기] <45> 경복궁 수정전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2.26 17:28:32사진은 경복궁 내 경회루 연못 앞에 있는 수정전(修政殿)이라는 이름의 전각이다. 정면 10칸, 측면 4칸으로 궁궐 내에서는 비교적 큰 건물이다. 바로 세종 때인 1420년 설치한 집현전(集賢殿)이 있던 위치다. 집현전의 원래의 역할은 도서의 수집·보관으로 현재의 국립중앙도서관과 비슷했는데 이후 유교사상에 기반한 학문연구 등으로 확대됐다. 개국공신 타이틀을 가진 훈구파에 둘러싸여 있던 세종은 새로운 친위세력으로 집현 -
[역사의 향기] <44> 한남동 제천정터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2.19 17:49:35이종무가 이끈 조선군이 1419년(세종 1) 대마도를 공격한다. 전선 227척, 병력 1만7,000명을 동원해서다. 100여년간 일본 해적, 즉 왜구에 시달리던 한반도 정권이 강공책을 쓴 것이다. 이 해가 기해년이어서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고 불렀다. 조선 건국을 전후해 대마도 공격은 3번 있었다. 앞서 1389년(공양왕 1년)에 박위가, 1396년(태조 5)에는 김사형이 각각 대마도를 쳤다. 세 번째 사건이 가장 유명한데 바로 기해동정이 -
[역사의 향기] <43> 성균관 명륜당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2.12 17:40:12우리나라에서 인재양성을 위한 최고학부는 고대부터 있었다. 고려시대의 국자감(國子監), 신라시대의 국학(國學), 멀리는 고구려의 태학(太學)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최고학부의 이름으로 '성균(成均)'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 후기인 1298년이다. 처음에는 성균감이라고 했다가 1308년 성균관(成均館)으로 고쳤다. '성균'이라는 것은 중국 주나라의 관직 제도를 기록한 '주례'에 나오는 말로 동·서·남·북·중의 -
[역사의 향기] <42> 행당동 살곶이다리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2.05 17:16:37중랑천이 행당동과 뚝섬 사이를 남쪽으로 흘러내리다가 방향을 돌려서 서쪽으로 접어든 지점에 '살곶이다리'가 있다. 지금의 한양대 바로 남쪽이다. 길이는 78m로 1483년(성종 14) 세워졌고 현존하는 조선 시대 다리 중 가장 길다. '살곶이'라는 이름은 다리가 놓이기 전에 생겼다는데 말 그대로 '화살이 꽂힌' 자리라는 뜻이다. 태종(이방원)이 억지로 왕위를 빼앗자 분노한 아버지 태조(이성계)는 한양을 떠나 고향인 함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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