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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41> 창덕궁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1.22 17:20:48태종 이방원은 즉위 직후인 1405년 창덕궁을 짓는다. 바로 옆에, 겨우 10년 전에 완공된 경복궁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새로 궁궐을 만든 것이다. 경복궁은 최대 정적이었던 정도전이 설계한 것이어서 태종으로서는 머물기가 불편했을 것이다. 경복궁이 엄격한 성리학적 이념에 따른 인위적인 모습이라면 창덕궁은 지형에 맞춰 자연스럽게 건물을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이 궁궐의 중간에 있지도 않고 -
[역사의 향기] <40> 구리 건원릉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1.15 16:51:16태조 이성계(1335~1408)는 함경도 지방 토호의 아들로 태어나 전쟁 승리, 권력 장악 그리고 조선왕조 개창까지 풍운아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한양을 새 왕조의 도읍으로 정하는 데 최종 결정권을 행사했다. 국토의 중심이고 해상과 육상, 하천 교통의 요지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에 더해 당시 한양을 목(木)자가 들어가는 성씨(이·李)를 가진 사람이 도읍으로 삼는다는 풍수도참설에도 영향 받았다. 아이러니하게 그의 황금 -
[역사의 향기] <39> 한양도성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1.08 17:40:08태조 이성계는 경복궁이 완공된 다음해인 1396년 한양도성(都城)을 쌓았다. 경복궁 뒤의 북악산과 동쪽의 낙산, 남쪽의 남산, 서쪽의 인왕산을 잇는 1만8,627m의 성곽이 그것이다. 성곽을 세운 것은 외적을 막기 위해서지만 조선의 방어체제는 시대에 따라 달랐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이라는 양란 이전까지는 전쟁이 일어날 경우 도성은 포기하고 산성으로 대피하는 방식이었다. 당시의 한양도성 성곽은 단순히 내부와 외부를 가르 -
[역사의 향기] <38> 사직단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4.01.01 18:43:261395년(태조 4년) 경복궁·종묘와 함께 사직단(社稷壇)이 건립된다. 사직은 토지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을 아우르는 말이다. 사단을 동쪽에, 직단은 서쪽에 나란히 배치했다. 사직단이 네모인 것은 제사 대상이 땅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고 해서 동그라미는 하늘을, 네모는 땅을 표시한다. 따라서 하늘에 제사 지내는 단은 둥글게, 땅에 제사 지내는 단은 네모나게 쌓았다. 사직단의 수난은 일제강 -
[역사의 향기] <37> 종묘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3.12.25 18:41:32한양 천도 이후 이성계는 궁궐과 함께 종묘(宗廟) 건축을 서둘렀다. 종묘는 국왕의 조상들을 모신 사당이다. 전통시대 국가는 국왕 가문의 사유재산이었으니 자동적으로 종묘도 국가 최고사당이 되는 셈이다. 종묘 공사는 1394년 12월 시작돼 이듬해 9월에 끝났다. 종묘 다음으로 사직(社稷)과 궁궐이 완성되고 마지막으로 성벽을 쌓는 순서로 도성 건설이 이뤄졌다. 유학의 이념에 따라 정궁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왼쪽(동쪽)에 종 -
[역사의 향기] <36> 경복궁 근정전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3.12.18 18:36:11조선이 건국되고 서울을 수도로 정한 후 가장 먼저 한 것은 궁궐을 짓는 일이었다. 지금도 도시를 건설할 때 관청이나 공공기관을 중심에 두는 것처럼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왕조시대 궁궐은 최고의 관청이었다. 1395년(태조 4) 정궁이자 가장 먼저 지어진 경복궁에서도 핵심은 근정전이다. 이곳에서 국왕이 정무를 봤고 수많은 의식과 행사가 이뤄졌다. 특히 이름이 흥미롭다. '근정(勤政)'은 '부지런히 힘쓰다'는 뜻이다. 조선 -
[역사의 향기] <35> 종묘공원 삼봉정도전시비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3.12.11 18:32:22정도전(1342~1398)이 조선의 새 수도를 지금의 서울로 정하는 데 역할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개국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민생안정을 위해 수도이전을 유보하자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새 수도가 결정되자 이후 추진과정은 정도전이 주도하게 된다. 신도시 설계는 '주례(周禮) 동관고공기(冬官考工記)'에 보이는 수도건설 원리에 따랐고 여기에 우리나라 자연환경을 덧붙였다. 북악산을 주산으로 정궁인 경복궁을 두고 좌우에 종묘 -
[역사의 향기] <34> 양주 회암사 무학대사 부도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3.12.04 13:55:33서울이 조선왕조 도읍으로 정해지는데 태조 이성계 외에 가장 중요한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승려인 무학(1327~1405)이다. 새 도읍지 후보로는 계룡산을 포함, 10여개가 있었다. 이성계는 일일이 답사를 다녔고 대사로 높여 대접한 무학에게 자문을 구했다. 실록에 따르면 1394년 8월 고려 남경터를 보여준 뒤 의견을 물었을 때 무학은 “사방이 높고 수려하며 가운데는 평평하니 도읍할 만하다”고 했다 한다. 600년 역사의 서울이 -
[역사의 향기] <33> 종묘 공민왕 신당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3.11.27 18:35:12종묘에는 고려 31대 국왕인 공민왕(1330~1374)을 모신 곳이 있다.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을 들어서 50m 정도 가서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망묘루다. 그 옆에 정식 명칭은 '고려 공민왕 영정 봉안지당(高麗 恭愍王 影幀 奉安之堂)'이고 보통 '공민왕 신당(神堂)'이라고 부르는 자그마한 사당이 있다. 조선이 창업된 직후인 1395년(태조 4년) 종묘가 세워질 때 공민왕 신당도 함께 건립됐다고 한다. 조선의 국가사당인 종묘에 망한 -
[역사의 향기] <32> 북한산 중흥사지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3.11.20 19:16:18고려시대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수도이전에 대한 논의가 거세졌다. 잇단 외적의 침입과 정치ㆍ경제의 혼란으로 민심이 악화되고 체제위기가 고조되면서 주로 국왕들이 천도를 주장하게 된다. 하지만 귀족 등 대부분의 기득권 세력들은 반대입장이었다. 이런 가운데 지금의 서울 지역의 중요성은 더 커졌다. 풍수도참설에서나 지리적인 면에서 북한산과 한강유역의 입지가 좋은 점은 부인할 수 없었다. 나라의 중심이고 한강유역이라 -
[역사의 향기] <31> 창덕궁 향나무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3.11.13 17:49:56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으로 들어가 담장을 따라 100m 정도 걷다 보면 사진에서 보이는 우람한 나무 한 그루를 만날 수 있다. 향나무인데 문화재 당국은 수령을 750년으로 본다. 이 경우 4대문 안을 기준으로 최고령 나무다. 고려시대 남경 지역에 얼마 남지 않은 '흔적' 중 하나다. 수령이 750년이면 1250년대에 태어났다. 창덕궁이 1405년에 세워졌으니 궁궐이 이 나무가 있던 자리에 들어섰든지 아니면 창덕궁 건설과정에 150살 -
[역사의 향기] <30> 북한산 수유동 청자요지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3.11.06 17:15:36고려시대를 대표하는 것 중에 청자가 있다. 청자를 굽던 가마(청자요ㆍ靑瓷窯)가 지금의 서울에도 있었다는 것은 일제시대부터 알려졌지만 가마터(요지ㆍ 窯址)의 정확한 위치가 드러난 것은 1990년대 후반부터다. 문화재 당국은 2000년대부터 지표조사를 통해 북한산 자락 수유동과 우이동 일대에서 20여 곳의 가마터 위치를 확인하고 일부를 발굴했다.사진에 보이는 수유동 청자요지는 그 중 하나다. 고려 말기인 14세기 유적으 -
[역사의 향기] <29> 서소문공원 윤관 동상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3.10.30 18:02:06서울 중구 의주로2가에 있는 서소문공원을 걷다 보면 동상이 하나 보인다. 고려시대 윤관(?~1111) 장군의 동상이다. 석조좌대 높이가 5.74m에, 동상은 6.26m인 육중한 모습이다. 윤관은 현재 서울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이다. 고려 숙종이 정치쇄신을 위해 부수도로서 '남경'을 설치할 때 이를 도와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고려사'에는 1101년(숙종 6년) "윤관 등으로 하여금 남경의 지세를 살피게 하고 그의 건의에 따라 도읍지 -
[역사의 향기] <28> 남경 궁궐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3.10.23 18:53:28지금의 서울 구조를 결정한 것은 경복궁이다. 경복궁이 조선의 정궁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이를 중심으로 도시가 짜여진 것이다. 조선이 서울(당시 한양)을 수도로 삼은 것은 고려시대 남경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남경 궁궐은 고려 숙종시기인 1104년 완공된다. 순수 공사기간만 3년 가까이 걸린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 궁궐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참고할 기록이 -
[역사의 향기] <27> '남경 건설론' 제기한 김위제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3.10.16 17:26:19지정학적 이유로 서울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이에 대한 이론적인 정리를 시도한 사람이 나타났다. 1096년 고려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 벼슬에 있던 김위제의 '남경 건설론'이 그것이다. 위위승동정은 지금의 대통령 경호실과 유사한 조직인 위위시(衛尉寺)의 종6품 벼슬 '승(丞)'의 명예직(同正)을 말한다. 그는 당시 국왕인 숙종에게 도선의 지리도참설을 근거로 들면서 개경(개성)ㆍ서경(평양) 수준의 '남경'건설을 제안했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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