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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26> 봉천동 강감찬 생가터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3.10.09 16:54:28지금의 서울 지역이 고려시대에 중요시 여겨진 것은 이 지역 출신들이 국가와 왕조에 지대한 공을 세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려는 태조 왕건을 포함한 각 지역 호족들의 연합정권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때문에 대호족이 있는 지방은 자연스럽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대표적인 경우가 강감찬(948~1031) 집안이다. 이야기는 그의 5세조인 강여청이 신라 경주 지역에서 금주(지금의 관악구와 시흥시)로 이주하면서 시작됐다. 그의 가 -
[역사의 향기] <25>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3.09.25 17:51:37고려시대 서울 지역이 수도급 '남경'으로 주목 받은 이유는 북한산(삼각산)을 중심으로 한 풍수지리적인 요소 덕분이다. 북한산은 여기저기 치솟은 바위와 곳곳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어울려 빼어나고 신비로운 자태를 뽐낸다. 명당이라는 인식에는 예로부터 사찰이 많이 들어서 있었다. 고려 왕조가 불교를 국시로 삼았고 특히 수도 개경에서 가까워 북한산에 대한 관심이 컸다. 이와 함께 현종(재위 1009~1031)이 국왕에 오르기 -
[역사의 향기] <24> 서대문구 홍제원 유적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3.09.11 17:44:15종로를 중심으로 한 서울 지역의 지정학적 가치는 고려시대부터 분명해졌다.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한반도 남부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울 지역을 거쳐야 했다. 자연히 서울의 지리와 성장 가능성이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넓은 평야와 함께 한강이 흐르는 수륙교통의 요지라는 입지는 국가발전과 함께 더 강화됐다. 정치적 측면에서도 중요했다. 고려는 실질적인 통일왕조라는 자의식으로, 고구려ㆍ신라ㆍ백제의 옛 도읍에 -
[역사의 향기] <23> 고려 남경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3.09.04 18:09:57서울 지역에 한 국가의 수도급 위상을 부여한 나라는 백제가 처음이다. 다만 백제는 도성을 한강의 남쪽인 지금의 송파구에 뒀다. 낙랑군ㆍ고구려 등 적대세력에 대항해 한강을 방어선으로 삼기 위해서다. 당나라ㆍ발해와 대립하던 신라도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인 이성산성에 한강하류 지역의 치소를 뒀다. 지금의 종로를 중심으로 한 북악산과 남산 사이 땅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은 개성에서 창업한 고려인들이다. 고려는 940년 -
[역사의 향기] <22> 남현동 요지 유적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3.08.28 17:49:19삼국ㆍ통일신라 시대에 걸쳐 서울 지역 유적지에서 토기는 많이 출토됐지만 그릇을 굽던 가마터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1973년 관악구 소재 '남현동 요지(窯址)'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고대의 제작 시스템이 일부 드러났다. 이 가마터는 당초에는 한성백제 시대로 생각됐다. 1976년 사적 지정 때 이름도 '사당동 백제요지'라고 붙었다. 하지만 곧 반론에 부딪혔다. 출토된 유물이 신라 것으로 해석됐기 때문이다. 문화재청도 수정 -
[역사의 향기] <21> 화성시 당성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3.08.21 17:56:25당나라에 가기 위해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당성(唐城) 근처까지 왔던 원효는 이른바 '해골물 사건'을 겪은 후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다는 것을 깨닫고 유학을 포기한다. 661년 원효가 당나라행 배를 타러 당성에 가려 한 것은 이곳이 서해 항로의 중요한 기착점이었기 때문이다. 무역선들은 백령도까지 올라간 후 산동반도와의 최단거리인 서해중부 횡단항로를 이용했다. 신라는 553년 한강하류 유역을 백제로부터 탈취한 뒤 중국 -
[역사의 향기] <20> 광주시 남한산성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3.08.07 17:15:15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신라를 도울 것처럼 해서 660년과 668년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차례 멸망시킨 당은 이제 신라까지 넘본다. 속국으로 취급한 것이다. 양국의 충돌은 불가피해졌다. 옛 백제 지역 거점을 차례로 잃게 된 당은 만주에 대기하고 있는 대군을 대동강을 건너 남하시켰다. 신라와 당의 전투는 대동강에서 임진강 사이에서 주로 벌어졌다. 신라는 당군의 침략을 막기 위에 한강 유역에 성곽을 쌓기 시작했다. 이중 -
[역사의 향기] <19> 종로구 장의사 당간지주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3.07.31 18:15:30삼국시대 한반도에서 가장 힘들었던 사람들은 지금의 서울 지역 사람들일 것이다. 한성백제 시대가 475년 한성의 불바다와 함께 마감하고 서울 등 한강하류 지역은 고구려 지배아래 들어갔다. 서울 사람들 고난의 시작이다. 나제동맹의 힘으로 백제가 551년 옛 도읍을 탈환했지만 희열도 잠시였다. 신라가 553년 배신했다. 서울 사람들의 국적은 전쟁과 함께 바뀌었다. 파괴와 살상이 어떠했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80세를 -
[역사의 향기] <18> 하남시 이성산성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3.07.24 17:38:03553년 신라가 서울 지역 등 한강하류를 한때 동맹국 백제로부터 탈취하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대립구도가 완성됐다. 고구려ㆍ백제ㆍ왜의 남북 동맹과 신라ㆍ당나라의 동서 동맹이다. 당나라군의 참전은 한참 뒤에야 실현되므로 신라는 한반도에서 사실상 고립된 상태였다. 취약한 한강하류 유역을 방어하기 위해 신라는 집중적으로 산성을 구축한다. 행주산성ㆍ아차산성ㆍ대모산성(양주)ㆍ호암산성ㆍ계양산성(인천)ㆍ이성산성(하남) -
[역사의 향기] <17> 북한산 신라진흥왕 순수비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3.07.17 17:56:44백제는 옛 영토 회복을 위해 신라를 끌어들인다. 나제동맹은 551년 고구려를 몰아내고 한강 유역을 점령한다. 하지만 적은 등 뒤에도 있었다. 신라가 동맹을 깨고 553년 한강 하류까지 차지해버린 것이다. 열 받은 백제는 역습을 시도하지만 성왕이 전사하는 등 참패를 당했다. 한강 유역을 석권하면서 신라를 강국으로 만든 왕은 진흥왕이다. 그는 스스로를 왕 중의 왕 '태왕(太王)'이라 했는데 이는 광개토태왕과 같은 반열이다. -
[역사의 향기] <16> 홍련봉 보루 유적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3.07.10 17:33:42서울 광진구ㆍ중랑구와 경기도 구리시에 걸친 아차산에 고구려 유적이 대규모로 묻혀 있다고 밝혀진 것은 아주 최근이다. 첫 케이스로 '아차산 4보루'가 발굴된 것이 1997년이니 겨우 15년 전이다. 아차산은 하루에도 수천명이 오르내리는데 길가 돌무더기에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은 불가사의다. 아차산ㆍ용마산ㆍ망우산 능선과 한강변에 20여개의 보루가 확인됐다. 남한 고구려 유적 가운데 가장 집중도가 높다. 숫자가 대략인 것 -
[역사의 향기] <15> 아차산 고구려 보루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3.07.03 17:36:11475년 백제의 한성 함락 후 서울 지역은 고구려의 영역 아래로 들어갔다. 고구려는 551년 백제에 다시 빼앗길 때까지 76년 동안 이 지역을 유지했다. 옛 한성백제의 수도이자 교통의 요지, 그리고 기름진 평야를 가진 서울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구려도 주목했다. 한강유역에 집중적으로 병력을 배치한 이유다. 이때 출현한 것이 방어요새인 '보루(堡壘)'다. 보루는 성(城)보다는 소규모 시설로 고구려는 아차산을 중심으로 용마산 -
[역사의 향기] <14> 백제 배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3.06.26 17:52:34한성백제가 강국으로 군림한 것은 동북아시아의 바닷길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한반도 남부의 신라ㆍ가야와 왜국 등은 백제의 앞마당을 지나지 않고는 중국 왕조들과 교류가 불가능했다. 이는 거꾸로 중국에서 한반도와 왜로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선박들이 나침반이 없던 시기인 당시의 항해기술로는 최대한 육지 가까이 붙어서 이동하는 것이 조난 등 해양사고를 줄이는 최선책이었다. 서해 바닷길은 고대에는 중국 산동반도와 요 -
[역사의 향기] <13> 광진구 아차산성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3.06.19 17:37:53백제의 한강 이북 거점들을 무력화시킨 고구려군은 475년 9월 드디어 강을 건너 한성을 공격했다. 풍납토성(북성)과 몽촌토성(남성)이 모두 포위됐다. 공방전 7일 만에 풍납토성이 함락된다. 몽촌토성에서 이를 지켜보던 개로왕은 탈출을 시도하지만 곧바로 포로로 잡혔다. 불타는 도성을 뒤로 하고 끌려간 개로왕은 한강을 지나 아차산성 아래에서 처형됐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493년간(기원전 18년~475년) 지속된 한성백제 -
[역사의 향기] <12> 방이동 고분군
문화·스포츠 라이프 2013.06.12 17:10:59한성백제 시대의 고분군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송파구의 석촌동ㆍ방이동ㆍ가락동 3군데다. 이중 형태나마 남아 있는 것은 석촌동과 방이동뿐이다. 가락동 고분군은 도굴 등으로 훼손된 뒤 도시개발에 밀려 자취를 감췄다. 방이동 고분군은 인근 석촌동과 차이를 보인다. 석촌동에는 흙무덤도 있지만 돌무덤(적석총)이 주인공이다. 이에 비해 방이동 고분 8기는 모두 흙무덤이다. 대개 고구려식 돌무덤에서 토착 삼한식 흙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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