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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여는 수요일] 동백이 활짝,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9.12.31 16:36:21- 송찬호마침내 사자가 솟구쳐 올라 꽃을 활짝 피웠다 허공으로의 네 발 허공에서의 붉은 갈기나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 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물고 땅으로 뛰어내리기 전에오호라, 요 귀여운 사자들 모가지를 툭툭 꺾을까보다. 여보, 머리에 사자를 꽂아줄까. 얘야, 어깨에 사자를 얹으려무나. 이 붉은 꽃송이가 모두 사자란 말이렷다. 이 부드러운 꽃잎은 얼룩말의 숨통을 끊어놓던 이빨이렷다. 이 노란 꽃술은 멧돼지 -
[시로여는 수요일] 내 인생의 모든 계절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9.12.17 17:12:11박노해 봄은 볼 게 많아서 봄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봄여름은 열 게 많아서 여름 내 안쪽으로도 문을 여는 여름가을은 갈 게 많아서 가을 씨앗 하나만을 품고 다 보내주는 가을겨울은 겨우 살아서 겨울 벌거벗은 힘으로 뿌리를 키우는 겨울그러니 내 인생의 봄 가을이 모두 다 희망 길어진 여름 겨울도 모두 다 감사올해도 네 개의 계절이 지나고 있군요. 볼 게 많았던 봄, 많은 것을 보았나요? 열 게 많았던 여름, 마음의 문 -
[시로여는 수요일] 얼마나 익었나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9.12.10 17:19:42문태준할머니는 막 딴 모과에 코를 대보고 아주 잘 익었다, 한다할머니는 내 머리꼭지에 코를 대보고 아직 멀었다, 하곤 꿀밤을 먹인다 억울하기도 했을 것이다. 하필 모과와 견주다니.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고 하지 않았는가? 난데없이 꿀밤을 맞긴 했지만 기대와 사랑의 표현이라는 걸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새파랗던 열매가 뜨거운 여름을 이겨내고 황금빛으로 익은 걸 두 눈으로 보며 -
[시로여는 수요일] 어딘지도 모르면서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9.12.03 12:13:32윤제림할머니 돌아가신 날, 동생이 물었다 “할머니 어디로 가셨어요?”할아버지가 힘없이 답했다 “먼 데”동생이 또 물었다 “할머니는 거기가 어딘지 아세요?”할아버지가 답했다 “할머니도 모르지”동생이 또 물었다 “모르는 곳을 왜 혼자 가셨어요?” 영정 속 할머니가 대답했지. ‘여보, 문 앞이 북망이라더니 와보니 아주 가까운 곳이에요.’ 할아버지는 알아듣지 못했지. 할머니가 다시 말했지. ‘여보, 막상 와보니 아 -
[시로여는 수요일} 낙타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9.11.26 17:20:41신경림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
[시로여는 수요일] 사는 게 참 꽃 같아야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9.11.19 19:13:33박제영며느리도 봤응께 욕 좀 그만해야 정히 거시기 해불면 거시기 대신에 꽃을 써야 그까짓 거 뭐 어렵다고, 그랴그랴 아침 묵다 말고 마누라랑 약속을 했잖여이런 꽃 같은! 이런 꽃나! 꽃까! 꽃 꽃 꽃 반나절도 안 돼서 뭔 꽃들이 그리도 피는지봐야 사는 게 참 꽃 같아야저렇게 마누라 말 잘 듣는 양반이 우찌 아들 장가가도록 욕을 입에 달고 살았을까. 천만에, 마누라 말 잘 들어서 이제 바꿨을까. 며느리가 거울인 게야. 수 -
[시로여는 수요일] 아이에게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9.11.12 17:35:40배창환 作하고 싶은 일 하며 살아라 사람의 한 생 잠깐이다 돈 많이 벌지 마라 썩는 내음 견디지 못하리라물가에 모래성 쌓다 말고 해거름 되어 집으로 불려가는 아이와 같이 너 또한 일어설 날이 오리니참 의로운 이름 말고는 참 따뜻한 사랑 말고는아이야, 아무것도 지상에 남기지 말고 너 여기 올 때처럼 훌훌 벗은 몸으로 내게 오라세상 물정 모르는 말씀이셔요. 인생이 하고 싶은 일 다 하도록 놓아주던가요? 사람의 한 생 잠 -
[시로여는 수요일] 농담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9.11.05 17:27:51이문재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우연히 접어든 숲길에 단풍이 흐드러졌을 때, 모퉁이 돌자 가을꽃 황금 사태가 쏟아졌을 때, 호수의 물별들이 -
[시로여는수요일] 소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9.10.29 17:29:07퇴근 무렵, 한 사내가 술을 마신다두어 평 남짓한 포장마차에 앉아 잘려나간 하루를 되새김질한다주름진 목 안으로 불편을 밀어 넣고 있다눈이 크고 두려움 많은 소는 맹수가 무서워 서둘러 풀을 뜯어 삼키곤 했다지. 안전한 곳에 가서 천천히 토해내어 다시 씹었다지. 사람과 개가 지키는 외양간에서 살게 된 뒤에도 되새김질을 멈추지 않는다지. 이제는 두려움보다 하루 일과를 반추한다지. 기다란 혀로 일기를 쓴다지. 그 날 치 -
[시로여는 수요일] 따순 밥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9.10.22 17:45:32언 손금을 열고 들어갔던 집그녀는 가슴을 헤쳐 명치 한가운데 묻어놓았던 공깃밥을 꺼냈다눈에서 막 떠낸 물 한 사발도 나란히 상 위에 놓아주었다모락모락 따뜻한 심장의 박동밥알을 씹을 때마다 손금 가지에는 어느 새 새순이 돋아났다물맛은 조금 짜고 비릿했지만 갈증의 뿌리까지 흠뻑 적셔주었다살면서 따순 밥이 그리워지면 언제고 다시 찾아오라는그녀의 집은 고봉으로 잔디가 덮여 있다무덤이 고봉밥을 닮은 까닭은 그녀 -
[시로여는수요일] 꿈과 상처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9.10.15 17:11:41김승희나대로 살고 싶다 나대로 살고 싶다 어린 시절 그것은 꿈이었는데나대로 살 수밖에 없다 나대로 살 수밖에 없다 나이 드니 그것이 절망이구나 꿈과 상처는 청과물 상점에도 있었지. 피망은 피망답게 살고 싶었는데 어머니는 파프리카가 되라 하셨다네. 노랑 모자 씌워주고 붉은 가방 메어주고 주황 버스에 태워 파프리카 학원에 보냈다네. 가지는 가지답게 살고 싶었는데 아버지는 포도가 되라 하셨다네. 고대 왕족처럼 편두 -
[시로 여는 수요일] 젖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9.10.01 17:55:05썩은, 썩어가는 사과가 젖을 물리고 있다하루의 시간도 한 해의 시간도 막바지 능선을 타 넘는야산 언덕에서썩은, 썩어가는 사과가아직 푸른 힘줄이 꿈틀거리는 젖가슴을반쯤 흙속에 파묻고 한마디 사과도 없이 사과가 다 떠난 사과나무에게 사과를 잊은 입, 잎들이 열꽃을 피우는 사과나무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병든, 병들었다고 버림받은 사과가저를 버린 사과나무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잘 여문 사과들이 떠나갔구나, 대처로 -
[시로여는수요일] 슬로슬로우 퀴퀵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9.09.17 17:26:32- 오광수 어느 가을날 지리산 등성 어디쯤서 반달곰과 딱 눈이 맞는다면 마늘 몇 쪽 갖고 동굴 속으로 들어가 녀석과 살림 차려야지. 그 계곡 어디쯤서 날다람쥐 한 마리 만난다면 쳇바퀴 굴리듯 한세상 돌고 돌아야지. 가을 햇볕에 천천히 가슴을 데우다가 마침내 비등점에 오르면 붉게 붉게 타올라야지. 붉은 마음이 식어 하얀 재로 남으면 팔랑거리며 눈이 되어 내려야지. 사람도 한 그루 나무인 그 산에서 네 편 내 편도 없이 -
[시로여는수요일] 숨바꼭질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9.09.10 17:41:10- 정을순오만데 한글이 다 숨었는 걸 팔십 넘어 알았다 낫 호미 괭이 속에 ㄱ ㄱ ㄱ 부침개 접시에 ㅇ ㅇ ㅇ 달아 놓은 곶감엔 ㅎ ㅎ ㅎ제 아무리 숨어봐라 인자는 다 보인다 경남 거창 문해교실에서 뒤늦게 한글을 배운 할머니의 작품이다. 오만 데 숨었던 술래를 팔십 년 만에 찾으니 얼마나 즐거울까. 부침개 접시 ㅇ까지는 그렇다 치고, 곶감 속에 숨어 있는 ㅎ까지 발견한 걸 보고 무릎을 쳤다. 한글 배운 지 수십 년 된 나는 -
[시로여는 수요일] 노을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9.09.03 17:35:34- 이면우세상은 아주 오래된 부엌입니다 길가로 난 어둑한 문 안에서 누군가, 느지막이 길 가는 이를 위해 가마솥 가득 붉은 수수죽을 쑤는 중입니다 타박타박 발자국에 물 한 바가지 부어 휘젓고 뚜벅뚜벅 발자국에 크게 한 바가지 더 붓고 휘휘저어 슬긍긍 뚜껑 닫고 아궁이를 들여다봅니다 찬찬히 들여다봅니다당신이 지금 허리 굽혀 아궁이를 들여다보는바로 그 눈 아닙니까 나그네 눈길이야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굴뚝으로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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