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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여는수요일] 아배 생각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9.08.27 17:34:19- 안상학뻔질나게 돌아다니며 외박을 밥 먹듯 하던 젊은 날 어쩌다 집에 가면 씻어도 씻어도 가시지 않는 아배 발고랑내 나는 밥상머리에 앉아 저녁을 먹는 중에도 아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 니, 오늘 외박하냐? - 아뇨, 올은 집에서 잘 건데요. - 그케, 니가 집에서 자는 게 외박 아이라?집을 자주 비우던 내가어느 노을 좋은 저녁에 또 집을 나서자 퇴근길에 마주친 아배는 자전거를 한 발로 받쳐 선 채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 -
[시로여는수요일] 태풍은 북상 중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9.08.13 17:27:31- 이문숙물류창고 지붕 위 타이어를 보네 육중하게 방수막을 누르고 있네 창고 속으로 박스에 담긴 여러 켤레의 신발들이 딸려들어가네태풍은 북상 중이라는데 길이 유실되고 방파제가 붕괴되고 수백 년 마을이 폐허가 되는 막대한 위력의 태풍이 오고 있다는데이곳에는 타이어 아래 방수막 자락을 간신히 들었다 놓는 얕은 바람이 일 뿐 진열대에는 새로운 신발이 놓이네상륙 중인 태풍과 한바탕 격전을 치를 타이어의 검은 몸체 -
[시로여는수요일] 마중물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9.08.06 17:33:33청운의 꿈을 안고 금강 줄기를 거슬러 큰물을 찾아 떠난 오빠가 몇 년이 지나자 학교를 졸업하고 일자리를 구했다며 물줄기를 내려 보냈다 나는 그 물줄기를 타고 금강을 거슬러 올라 오빠처럼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했다 나도 내 바로 밑 동생에게 물줄기를 내려 보내 동생을 올려왔다 동생도 나처럼 내가 보낸 물줄기를 타고 올라와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해 그 밑 동생에게 물줄기를 내려 보내 동생을 올려오고 그 밑에 동 -
[시로여는 수요일] 욕실에서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9.07.30 17:32:23- 박순원내 칫솔은 초록색이다 참 예쁘다 도마뱀 같다 손에 쥐고 있으면 파닥 파닥 움직이는 것 같다 치약은 또 얼마나 달콤한가 비누는 매끄럽고 향기롭고 면도 크림 샴푸 린스 샤워젤 풍성하게 거품이 인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있으면 내가 중산층 같다 내 칫솔은 초록색이다 참 예쁘고 도마뱀 같다 손에 쥐고 있으면 파다닥 빠져나갈 것 같다아, 우리 집 욕실에서도 칫솔 도마뱀이 여럿 파닥거려요. 정글 도마뱀이 사라지 -
[시로여는 수요일] 남편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9.07.23 17:19:05문정희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도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
[시로여는 수요일] 태산(泰山)이시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9.07.16 17:46:32- 김주대 경비 아저씨가 먼저 인사를 건네셔서 죄송한 마음에 나중에는 내가 화장실에서든 어디서든 마주치기만 하면 얼른 고개를 숙인 거라. 그래 그랬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저씨가 우편함 배달물들을 2층 사무실까지 갖다 주기 시작하시데. 나대로는 또 그게 고맙고 해서 비 오는 날 뜨거운 물 부어 컵라면을 하나 갖다 드렸지 뭐. 그랬더니 글쎄 시골서 올라온 거라며 이튿날 자두를 한 보따리 갖다 주시는 게 아닌가. -
[시로여는 수요일] 꽃씨와 도둑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9.07.09 17:43:09- 피천득마당에 꽃이 많이 피었구나 방에는 책들만 있구나 가을에 와서 꽃씨나 가져가야지참 부지런한 도둑일세. 한 계절 먼저 정탐을 나왔구먼. 참 주도면밀한 도둑일세. 당장 훔칠 물건이 아니라 가을에 가져갈 물건까지 점찍어 두다니. 참 어리석은 겉보기 도둑일세. 삐걱 책장을 밀면 온갖 골동품과 고서화 즐비한 수장고가 있을 줄도 모르다니. 참 딱한 도둑일세. 책을 훔친 도둑은 세상을 경영하고, 꽃씨 훔친 도둑은 풀이나 -
[시로여는 수요일] 미안한 일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9.07.02 17:10:06- 김사인개구리 한 마리가 가부좌하고 눈을 부라리며 상체를 내 쪽으로 쑥 내밀고 울대를 꿀럭거린다.뭐라고 성을 내며 따지는 게 틀림없는데둔해 알아먹지 못하고 나는 뒷목만 긁는다 눈만 꿈벅거린다 늙은 두꺼비처럼.아유 가부좌랄 게 뭐 있겠습니까. 스님들처럼 척추도 꼿꼿이 세우지 못하고 앞발로 땅 짚고 겨우 앉아 있는 걸요. 울대를 열심히 꿀럭거려도 반야심경 하나 제대로 외지 못하는 걸요. 눈을 부라리다니요. 조상 -
[시로여는 수요일] 민화 8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9.06.25 17:15:55성선경남편은 일찍 명퇴를 하고 아직도 직장에 남아 고생하는 아내에게 그래도 생각는다고 보약을 한 첩을 지어 주곤 남편이 다정히 물었다.- 맛있어?아내가 대답했다.- 맛이 써!아! 참, 아내는 뭘 몰라. 모르긴 뭘 모른다고 그래요? 당신 입 모양만 봐도 속엣말 다 들킨다니까요. 수수꽃다리 잎처럼 쓴 약 들이켜니 절로 오만상 찌푸려지는데 ‘맛있다’는 말 나오겠어요? 입 한 번 떼지 않고 단숨에 들이켠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
[시로여는 수요일] 쪼그만 풀꽃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9.06.18 18:04:48이준관목련처럼 크고 화려한 꽃보다 별꽃이라든지 봄까치꽃이라든지 구슬붕이꽃 같은 쪼그만 꽃에 더 눈길이 간다겸허하게 허리를 굽혀 바라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꽃 하마터면 밟을 뻔해서 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꽃앉아서 보듬어주고 싶어도 너무 너무 작아서 보듬어줄 수 없고 나비도 차마 앉지 못하고 팔랑팔랑 날갯짓만 하다 가는 꽃눈으로나마 보듬어주고 안아주고 싶어서 자꾸만 눈길이 간다 너무 미안해 -
[시로여는 수요일] 짝퉁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9.06.11 17:32:53- 구재기신은 물낯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떠 인간을 창조해 냈지만 인간은 물낯을 굽어보며 자기 모습 그대로 신을 만들었다그래서지상의 지금에는 본래 하나였던 신이 인간처럼 수없이 많아졌다 저마다 섬기는 신의 얼굴이 다른 까닭이군요. 신을 베낀 인간을 다시 베꼈으니 신이 인간의 부족만큼이나 많았던 까닭이군요. 짝퉁이라 너무 나무라지 마셔요. 최선을 다해 신을 닮은 자신의 모습을 섬기고 있으니까요. 진달래가 진 -
[시로여는 수요일] 첫사랑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9.06.04 18:38:15- 심우기쑥국새 한 마리 꽃밭에 숨었다날개 다친 새인지 다리를 저는 새인지 아니면 배고픈 새인지꽃밭을 휘저어 봐도 날아오르는 것은 없고 종일 기다려 봐도 보이는 것이 없다본 것이 맞는 건지 입맞춤을 하였는지 의문이 살짝 드는 저녁 어스름발자국이 눈에 익다새는 보이지 않고 꽃밭에서는 울음만 피어난다날개를 다치지도, 다리를 절지도 않았습니다. 끼니를 놓쳤으나 배고픈 줄도 몰랐습니다. 당신이 꽃밭을 휘저을 때에 -
[시로여는 수요일] 비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9.05.28 17:20:41암만 흔들어봐라 열어주나모질게 갔으면 그만이지 왜 다시 와서 지랄여꽃 피면 넌가 했던 거 바람 불면 넌가 했던 거 이젠 아녀그려왔으면 실컷울다나 가그라 그만어허, 단단히 틀어졌네. 나야 본디 구름수레 타고 떠다니다가 메마른 가슴 만나거든 대신 울어주는 직업 아니던가. 자네 두고 발 떨어지지 않아도 가뭄에 타는 곡식과 농심들 두고 아니 갈 수 있나. 우는 재주밖에 없는 내가 웃는 재주밖에 없는 자네 곁에만 머물러 -
[시로여는수요일] 소만(小滿)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9.05.21 17:34:56- 도한호급하게 이를 닦고 꼭 해야 하나 쉬엄쉬엄 면도를 하고 목덜미에 물을 묻히고 있는데 단골 뱁새 두 마리가 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나더러 빨리 나오라고 성화다 지렁이도 목 빼고 세수하고 달팽이도 창을 꼬나들고 싸움터로 나가고 굼벵이도 일 나갔는데 우리 할배는 뭣 하느라고 여태 안 나오는 거야 봄 숲의 채도가 짙은 녹색 하나로 통일되는 계절이다. 나무들은 날로 강해지는 햇빛을 받아들여 본격적으로 광합성 공장 -
[시로 여는 수요일] 김씨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9.05.14 17:27:39쌀을 씻어 안치는데 어머니가 안 보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어머니가 계실 것이다 나는, 김씨! 하고 부른다 사람들이 들으면 저런 싸가지 할 것이다 화장실에서 어머니가 어! 하신다 나는 빤히 알면서도 뭐해? 하고 묻는다 어머니가 어, 그냥 앉아 있어 왜? 하신다 나는 그냥 불러봤어 하고는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인다 언제 나올지 모르는 똥을 누려고 지금 변기 위에 앉아 계시는 어머니는 나이가 여든다섯이다 나는 어머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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