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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여는 수요일] 애인 있어요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12.19 17:43:19여든세 살 그 여자 노래 부르네 애인 있어요 전국노래자랑에서 부르네 다리가 후들거리고 목소리가 떨리네 기울어진 백발로 뿌리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숨 윗줄기 잡기 전 마지막 안간힘으로 내민 뼈마디 허공으로 벋는 나팔꽃 덩굴손 흔들리지 않고는 그대에게 닿을 수 없네 며늘아, 남우세스럽다 채널 돌리지 마라. 여든세 살에 노래도 못 부르고, 애인도 없고, 전국노래자랑도 못 나가고, 후들거리며 세울 다리도 없고, 떨리는 -
[시로 여는 수요일] 웃어야 사는 여자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12.12 17:21:21달리는 버스 옆구리 살에 찰싹 달라붙어 환하게 웃는다, 여자 얼굴 가득 새카만 먼지 뒤집어쓰고 비라도 오는 날엔 땟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데 빗물이 눈에 들어가도 깜박일 새 없이 그저 웃으며 달리는 맵찬 겨울바람 여름 땡볕 아랑곳하지 않고 날마다 하얀 잇속 드러내고 달려야 사는 여자 산다는 건 어쩌면 종일 아슬아슬한 차창에 고단하게 매달려 웃으며 달려가는 것 노란 신호 윙크에 가다 서다, 호흡 잠시 다듬으며 누가 -
[시로 여는 수요일] 나비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12.05 17:18:09짐짝을 등에 지고 날거나, 헬리콥터처럼 짐짝을 매달고 날아가는 나비를, 나는 본 적이 없다. 나비는 바늘처럼 가벼운 몸 하나가 있을 뿐이다. 몸 하나가 전 재산이다. 그리고 무소속이다. 그래서 나비는 자유로운 영혼과 같다. 무소유(無所有)의 가벼움으로 그는 날아다닌다. 꽃들은 그의 주막이요, 나뭇잎은 비를 피할 그의 잠자리다. 그의 생은 훨훨 나는 춤이요, 춤이 끝남은 그의 죽음이다. 그는 늙어 죽으면서 바라는 것이 -
[시로 여는 수요일] 지금 여기가 맨 앞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11.28 17:26:44나무는 끝이 시작이다.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새순에서 꽃 열매에 이르기까지나무는 전부 끝이 시작이다. 지금 여기가 맨 끝이다.나무 땅 물 바람 햇빛도저마다 모두 맨 끝이어서 맨 앞이다.기억 그리움 고독 절망 눈물 분노도꿈 희망 공감 연민 연대도 사랑도역사 시대 문명 진화 지구 우주도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 지금 여기 내가 정면이다. 나무는 온몸으로 맨 앞에 서는군요. 수없이 갈라진 저 가지 -
[시로 여는 수요일] 누가 더 깝깝허까이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11.21 17:23:14강원도 산골 어디서 어지간히 부렸다던 암소를 철산양반이 단단히 값을 쳐주고 사왔다 한데 사달이 났다 워워 핫따매 워워랑께, 내나 같은 말일 것 같은데 일소가 아랫녘 말을 통 알아듣지 못한다 흐미 어찌야 쓰까이, 일소는 일소대로 갑갑하고 철산양반은 철산양반대로 속이 터진다 일소를 판 원주인에게 전화를 넣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저번참과 똑같단다 그 소, 날래 일 잘했드래요 척 보니, 못 알아듣는 게 아니구 못 알아 -
[시로 여는 수요일] 국수가 먹고 싶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11.14 17:11:38사는 일은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 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 -
[시로 여는 수요일] 바닥을 모시는 자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08.01 17:06:02머리에 밥 쟁반을 이고 가는 여자 손으로 잡지도 않았는데 삼층으로 쌓은 쟁반이 머리에 붙은 것 같다 목은 떨어져도 쟁반은 떨어질 것 같지 않은 균형이 아닌 결합이 되어 버린 여자 하늘 아래 머리 조아릴 바닥이 있다면 바로 저 여자의 머리 머리를 바닥으로 만든 머리 바닥에 내려놓고 파는 물건이 대부분인 시장통을 그녀가 간다 채소 가게 앞에 다다르자 주인 내외가 다가와 쟁반 하나를 내려 놓는다 바닥을 모시는 자들의 -
[시로 여는 수요일] 스무 번째의 별 이름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07.25 11:38:04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온 날은 내 입던 옷이 깨끗해진다 멀리서 부쳐 온 봉투 안의 소식이 나팔꽃 꽃씨처럼 우편함에 떨어진다 그 소리에 계절이 활짝 넓어진다 인간이 아닌 곳에도 위대한 것이 많이 있다 사소한 삶들이 위대하지 않다고 말할 권리가 나에겐 없다 누구나 제 삶을 묶으면 몇 다발 채소로 요약된다 초록 아니면 보라로 색칠되는 생이 거기 있다 풀꽃의 한 벌 옷에 비기면 내 다섯 벌의 옷은 너무 많다 한 광주리 -
[시로 여는 수요일] 접시가 깨진 날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07.18 11:34:22외출하고 돌아온 저녁 접시가 깨져 있었네목련나무가 마침내 몸을 열던 날이었지매끄럽고 아름다워서 바라보기만 했던 접시여 그럼 안녕나와 고양이의 부주의로 접시가 깨질까 봐 전전긍긍했던 나날이여 이젠 안녕두 동강 난 접시를 버리러 가는 밤 비로소 나는 기뻐 날뛰네 고양이도 덩달아 벚꽃들처럼 설쳐대는 밤이네 접시는 본래 바닥이거늘 천장 가까운 찬장에서 섬김을 받고 있었네. 짜디짠 반찬국물에 몸서리치다가 더러 과 -
[시로 여는 수요일] 비의 집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07.11 11:21:38아마, 거기가 눈잣나무 숲이었지 비가, 연한 녹색의 비가 눈잣나무에 내렸어 아니, 눈잣나무가 비에게 내려도 좋다는 것 같았어 그래, 눈잣나무 몸피를 부드럽게 부드럽게 씻겨주는 것 같았어 아마, 병든 아내의 등을 밀던 내 손길도 그랬었지 힘을, 주어서도 안 되고… 그저, 가벼이 껴안는 것처럼 눈잣나무에 내리는 비 그리, 자늑자늑 젖어드는 평화 아마, 눈잣나무도 어디 아픈 거야 문득, 지금은 곁에 없는 병든 아내가 혼자, -
[시로 여는 수요일]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07.04 11:29:54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밥을 먹어야지나는 밥을 먹었다어느 이른 아침 당신은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죠. 그때 당신은 고개를 끄떡였죠. 무엇인가 영원히 다가오고 있다고, 지금도 영원히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당신은 밥을 먹었죠. -
[시로 여는 수요일] 왕의 역할을 잘하는 배우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06.27 13:59:57왕의 역할을 잘하는 배우가 부도내고 노숙자로 떠돌 때 헌 신문지 한 장 가진 사람도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는 얘기는 그의 연기보다 더 시큰하다채권자에게 쫓기며 빌딩숲 사이 맨 바닥에 누워 잘 때 곁에서 자던 노숙자가 덮고 있던 신문지를 반으로 찢어 주어 그것으로 밤새 추위를 덮고 절망을 덮고 아침에 온기로 눈을 뜨자 그대로 일어서서 무대로 돌아갔다는 얘기는 기교 넘친 드라마보다 더 시큰하다헌 신문지 -
[시로 여는 수요일] 재춘이 엄마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06.20 11:19:57재춘이 엄마가 이 바닷가에 조개구이집을 낼 때 생각이 모자라서, 그보다 더 멋진 이름이 없어서 그냥 ‘재춘이네’라는 간판을 단 것은 아니다. 재춘이 엄마뿐이 아니다. 보아라, 저 갑수네, 병섭이네, 상규네, 병호네.재춘이 엄마가 저 간월암(看月庵) 같은 절에 가서 기왓장에 이름을 쓸 때, 생각나는 이름이 재춘이밖에 없어서 ‘김재춘’이라고만 써놓고 오는 것은 아니다. 재춘이 엄마만 그러는 게 아니다 가서 보아라, 갑수 -
[시로 여는 수요일] 언덕길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06.13 13:51:37쇠똥구리가 소똥을 굴린다. 온 힘을 다하여 소똥을 뭉쳐 안간힘을 쓰다가언덕 아래로 놓쳐버린다. 쇠똥구리는 희망처럼 아득한 길을 우두커니 바라본다.반겨주고 기다리는 식구들이 살아갈 집 한 채 짓기가 이렇게 힘들다니,식식대는 황소가 거품을 물고 싸놓고 지나간 똥이 징검다리에 놓인 까만 돌처럼 드문드문한 망초꽃 하얗게 핀 시오리길,밥이 똥이고, 똥이 밥이라는 진리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오래된 셰프죠. 똥내 배지 않 -
[시로 여는 수요일] 저 할머니의 슬하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06.06 18:32:18할머니 한 분이 초록 애호박 대여섯 개를 모아놓고 앉아 있다. 삶이 이제 겨우 요것밖에 남지 않았다는 듯 최소한 작게, 꼬깃꼬깃 웅크리고 앉아 있다. 귀를 훨씬 지나 삐죽 올라온 지게 같은 두 무릎, 그 슬하에 동글동글 이쁜 것들, 이쁜 것들, 그렇게 쓰다듬어보는 일 말고는 숨쉬는 것조차 짐 아닐까 싶은데 노구를 떠난 거동일랑 전부 잇몸으로 우물거려 대강 삼키는 것 같다. 지나가는 아낙들을 부르는 손짓, 저 허공의 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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