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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여는 수요일] 점등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10.25 18:01:20호박꽃 활짝 열린 콘센트에벌이 플러그를 꽂는 순간온 세상 환합니다넝쿨넝쿨 잎사귀푸르게 푸르게 밝습니다겨울, 봄, 여름…… 점멸하는 거리울타리 세워 담장 세워저 멀리 가을까지 닿은 전선에늙은 호박 골골이 환합니다호박인 줄 알았는데 등이었구나. 울타리에, 전선에 연등처럼 주렁주렁 달렸구나. 여름내 뜨거운 햇살 푸른 잎 깔때기로 모아 살뜰히도 충전하였구나. 물과 이산화탄소면 족한 줄 알았는데 플러그가 필요했구 -
[시로 여는 수요일] 자식의 은혜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10.18 11:11:10너, 몇 살이지? 15살요 엄마께서는요? 저도 15살이에요 농담도 잘 하시네요아뇨, 저는 얘를 낳고 엄마로 태어났거든요 얘 아빠도 그렇대요그렇지, 부모는 자식이 낳아 키워주지 평생이 걸리지만 부모로 키워주지 서로를 낳아 키우지 닭과 달걀처럼 말과 침묵처럼 밤과 낮처럼 손자 덕에 할머니로 태어나 자라는 나도.저런, 엄마와 자식이 동갑이구나! 닭이 달걀을 낳고, 달걀이 닭을 낳는 것은 일찍이 알았지만, 자식이 부모를 낳 -
[시로 여는 수요일] 가을 저녁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10.11 10:24:46퇴근길 버스정류장 가는 길 뒹구는 후박나무 잎새에 가만히 발 겹쳐보네 구두보다 길고 내 쪽배처럼 생긴 누런 잎 한 발로 딛고 남몰래 휘청거리네그렇지, 물 위에 딛는 첫발은 늘 마음 먼저 출렁이지 그때 이맘때 이른 저녁 먹고 빈방에 불 켜두고 만삭인 아내 쪽배에 태워 노을 속으로 힘껏 저어 가 잠시 밝은 호수 가운데 두런두런 하노라면 물결이 쪽배를 오두막 가까이 되돌려주었지그 쪽배 지금 호수 바닥에서 혼자 서늘하겠 -
[시로 여는 수요일] 먼 데 어머니 심부름을 갔다 오듯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10.04 10:36:50어느 해 봄 그것도 단 한 번 신을 짝짝이로 신고 외출을 한 다음부터 나는 갑자기 늙기 시작했다아무에게도 말하진 않았지만 햇살 좋던 봄날 아침의 아무것도 아닌 실수였는데 그 일로 식구들은 나의 어딘가에서 나사가 하나 빠져나갔다고 보는 것 같았다그게 아니라고 그렇지 않다고 장에 나가는 염소처럼 뻗디디며 한동안 혼자 뿔질을 해대던 나는어느 날 마당에 나뭇짐을 벗어놓듯 먼 데 어머니 심부름을 갔다 오듯 그 속으로 -
[시로 여는 수요일] 코스모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9.27 10:39:00코스모스가 살아온 방식은 한결같이 흔들렸다는 거다 이 바람결에 쏠리고 저 노을 쪽으로 기울며 제 반경을 끊임없이 넘어가던 그 범람이 코스모스의 모습 아니던가 가만히 서 있을 땐 속으로 흔들리는 꽃 몸이 그토록 가늘고 긴 것은 춤을 추라고 생겨난 것이다 가늘고 길수록 춤은 위태하니 위태해야 더욱 춤인 것을어머니께서 나를 지으실 때 꽃대 무너진 아득한 어둠 속에서 그 꽃잎 한 움큼 뜯어 삼켰던 것일까 내 몸의 성분 -
[시로 여는 수요일] 비밀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9.13 10:43:19반찬거리 파는 할머니 조르지도 않았는데 주위 눈치 보며 얼른 새싹 몇 잎 더 넣어준다 할머니와 나만 아는 비밀 다른 사람 절대 알아선 안 되는 무슨 돌이킬 수 없는 불륜이라도 저지른 듯 콩닥콩닥 가슴이 뛰었다 저 할머니, 밀당의 달인 아닌가? 늙고 행색은 초라해도 중년 시인의 가슴을 콩닥콩닥 뛰게 하다니. 저 시인이 집으로 돌아가 아내에게 ‘덤을 얻었어.’ 짐짓 무덤덤하게 털어놓더라도 저 비밀을 다 누설했다고는 할 -
[시로 여는 수요일] 추석 만월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9.06 11:14:13애탕글탕 홀아비 손으로 키워낸 외동딸이 배가 불러 돌아온 거나 한가지다 동네 각다귀 놈과 배가 맞아 야반도주한 뒤 한 이태 소식 끊긴 여식 더러는 부산에서 더러는 서울 어디 식당에서 일하는 걸 보았다는 소문만 듣고 속이 터져 어찌어찌 물어 찾아갔건만 코빼기도 볼 수 없던 딸년 생각에 막소주 나발이나 불던 즈음일 것이다 호박잎 그늘 자박자박 디디며 어린것을 포대기에 업고 그 뒤에 사위란 놈은 백화수복 들고 느물느 -
[시로 여는 수요일] 엿치기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8.30 10:54:16순례와 엿치기를 한다. 밀가루 묻은 손에서 단내가 솔솔 풍긴다. 가래엿 동강 부러뜨리고 구멍을 후후 분다. 구멍 속으로 종수 오빠 자전거 뒤에 올라타 허리 끌어안고 얼굴 기댄 여자애가 지나간다. 입안 가득한 꿀이 목울대를 넘는다. 감칠맛이 도는 혀를 빙빙 돌리며 달달한 입술 끝까지 빤다. 엿가락 맞대고 구멍을 센다. 구멍 속으로 순례를 태운 종수 오빠 자전거가 지나간다. ‘후!’ 입김 불어넣으며 가래엿 동강 부러뜨릴 -
[시로 여는 수요일] 노거수老巨樹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8.23 14:12:55나는 이제 속도 없다 빛나는 나이테도 없다 안팎을 들락이는 바람 소리뿐어느 하루 나 쓰러진다고 기뻐하지 마라 얼마나 많은 해와 달이 여기 등 기대앉은 사람들의 한숨과 이야기들이 나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냐어느 하루 나 쓰러진다고 슬퍼하지 마라 이 한 몸 사라진 텅 빈 자리에 시원한 하늘이 활짝 트이고 환한 여백이 열리지 않느냐온몸으로 지켜온 내 빈자리에 이슬이 내리고 햇살이 내리고 새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이 걸 -
[시로 여는 수요일] 여름 끝물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8.16 10:27:02여문 씨앗들을 품은 호박 옆구리가 굵어지고 매미들 날개가 너덜거리고 쌍쌍이 묶인 잠자리들이 저릿저릿 날아다닌다얽은 자두를 먹던 어미는 씨앗에 이가 닿았는지 진저리치고 알을 품은 사마귀들이 뒤뚱거리며 벽에 오른다목백일홍이 붉게 타오르는 수돗가에서 끝물인 아비가 늙은 오이 한 개를 따와서 씻고 있다아침 이슬 털며 찾은 맏물 오이가 기쁨의 탄성을 자아낸다면, 저녁 서리 속 따낸 작고 꼬부라진 끝물 오이가 풍기는 -
[시로 여는 수요일] 먼저 가는 것들은 없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8.09 10:50:14몇 번이나 세월에게 속아보니 요령이 생긴다 내가 너무 오래 산 계절이라 생각될 때 그때가 가장 여린 초록 바늘귀만 한 출구도 안 보인다고 포기하고 싶을 때, 매번 등 뒤에 다른 광야의 세계가 다가와 있었다두 번 다시는 속지 말자 그만 생을 꺾어버리고 싶을 때 그때가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보라는 여름의 시간 기회의 시간 사랑은 한 번도 늙은 채 오지 않고 단 하루가 남았더라도 우린 다시 진실해질 수 있다세월은 언제나 -
[시로 여는 수요일] 행성 E2015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8.02 14:08:28이른 아침에 원시의 밥을 먹고 포스트모던하게 핸드폰을 들고 중세의 회사에 나가 근대적 논리로 일하다가 현대의 술집에서 한잔하고 본능의 잠을 자는 나날들 돌아보면 그저 그렇고 그런 습관들이 만들어내는 안정된 생활이 대사와 동작을 반복하는 코미디처럼 느껴질 때 한번쯤 돌아볼 일이다 월급 명세서 위에서 2차원 활자로 살아가는 자신이 11차원 우주를 뛰어 넘나드는 자연스런 시간과 상상 너머 공간 어디쯤 있어야 하는 -
[시로 여는 수요일] 여름휴가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7.26 10:18:39불이 잘 안 붙네 형부는 번개탄 피우느라 눈이 맵고 오빠는 솥뚜껑 뒤집어 철수세미로 문지르고 고기 더 없냐 쌈장 어딨냐 돗자리 깔아라 상추 씻고 마늘 까고 기름장 내올 때 핏물이 살짝 밸 때 뒤집어야 안 질기지 그럼 잘하는 사람이 굽든가 언니가 소리 나게 집게를 내려놓을 때 장모님도 얼른 드세요 차돌박이에서 기름 뚝뚝 떨어질 때 소주 없냐 글라스 내와라 아버지가 소리칠 때 이 집 잔치한댜 미희 엄마가 머릿수건으로 -
[시로 여는 수요일] 빚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7.19 11:05:54아침에 어머니가 쌀을 씻으며 말하신다. 사람은 빚 없이 산다지만 다 빚으로 산단다. 저 꽃나무도 뿌리를 적신 이슬에게 빚졌지 구름도 하늘이 길 하나 빌려 주지 않으면 어떻게 구름이 구름으로 흘러갈 수가 있나. 내 아버지도 평생 네게 빚지고 저승 갔지 그 빚 다 갚으려고 아버지 참새 한 마리로 아침부터 마당 대추나무에 날아와 저렇게 미주알고주알 끝없이 노래해 대지 나도 아버지에게 평생에 진 빚 갚으려 흥얼흥얼 아침 -
[시로 여는 수요일] 매미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7.12 11:12:14고작 칠일 울려고 땅속에서 칠년을 견딘다고 더 이상 말하지 말자매미의 땅속 삶을 사람 눈으로어둡게만 보지 말자고작 칠십년을 살려고 우리는없던 우리를 얼마나 살아왔던가환한 땅속이여 환한 없음이여긴긴 없었음의 있음 앞에 있음이라는 이 작은 파편이여 빛나는 것들에겐 그보다 깊은 어둠의 날들이 있다. 푸른 새싹은 땅속에서, 꽃봉오리는 캄캄한 제 가슴에서, 눈부신 별도 낮의 하얀 어둠에서 꺼낸 것이다. 유명배우의 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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