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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씨의 #그래도_연애]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모든 이별엔 이유가 있다





그는 ‘스치는 바람’ 같았다.

짧지만 아주 강렬했던 바람.

오래도록 씁쓸한 여운을 남긴 바람.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의 세포를 얼려버린 차갑디 차가운 바람.

# 연애 세포, 다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알콩달콩 연애 감정을 느껴본 지가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연애를 안 해서는 아니다.

몇 년간 만나온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러나 오랜 연인이 대부분 그러하듯 익숙함은 설렘을 잡아먹었다.

그도, 나도, 친구 같은 연인 관계에 만족하고 살았다.

친구 같은 연인과 친구의 차이점이라고 할 만한 게 하나 둘씩 사라지면서, 어느새 우리는 친구가 되었고 연인이 아니라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덤덤하게 이별에 합의했다.

특별한 이유나 계기라고 할만한 사건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지나치게 자연스러웠던 게 이상하긴 하다.

어쨌든 내세울 만한(?) 이별의 원인은 없었다.



‘특별한 이유를 지어내기라도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든 건 친구들의 반응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대학 동기들과의 술자리에서, 회사 선후배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결혼은 언제 할 거냐”는 질문이 쏟아졌고(뭐, 결혼 적령기니 늘 심심치 않게 받는 질문이긴 하다) 무심하게 “헤어졌어요”라고 대답했다.

쉬쉬하며 숨길 일도 아닐 뿐 더러 말을 골라가며 할 만큼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었던 것 같다.

다들 내 눈치를 보느라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했다.

‘아, 별 일 아닌 게 아닌 건가. 내가 이상한 건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을 통해서는 선 자리가 밀려 들어오고 친구들은 소개팅을 시켜 주겠다며 난리가 났다.

주변 성화에 못 이겨(부모님의 걱정과 잔소리는 상상 이상이긴 했다) 몇 사람을 만났지만 아무 느낌이 없었다.

미지근한 온도, 심장은 전혀 뛰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가? 정말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하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할 때쯤 소개팅 제의가 들어왔다.

# ‘눈에서 꿀이 떨어진다’

지하철 역에서 만난 그의 첫 인상은 그럭저럭, 합격점을 겨우 넘었다.

그가 달라 보이기 시작한 건 그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면서부터다.

그의 눈동자에는 ‘네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너랑 잘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니’라고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조금씩 그에게 관심이 생겼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시한다는 게, 앞뒤 가리지 않고 돌직구를 날린다는 게(사실 요즘은 남자든 여자든 ‘간 보기’만 하는 사람들도 많고 그래서 ‘썸’으로만 끝나는 게 비일비재하지 않던가) 신선했다.

처음 만난 날, 우리는 점심을 함께 먹었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오늘 저녁도 같이 먹을래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도 뭔가에 홀린 것 같이 곧바로 승낙을 해버렸다.

“좋아요!”

솔직히 고등학교 친구들과 오래 전에 잡은 선약이 있었지만, 우선 내 앞에 닥친 이 남자부터 해결하고 싶었다. 아주 간절하게.

참으로 오랜만에 설레었다.

잊은 줄 알았던, 사라진 것만 같았던 연애 세포가 하나씩 눈을 뜨고 있는 걸 느꼈다.

오랜만에 느끼는 떨림을 좀 더 지속하고 싶었다.

그가 말했다.

“앞뒤 안 가리고, 아무 것도 재지 않아도 되는 그런 연애를 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내게 물었다.

“그런 연애 해 본 적 있어요?”

“아니요”

내 대답이 끝나자 그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의 까만 눈동자 속에서 나는 떨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툭 나온 말.

“그럼 나랑 연애할래요?”

# 우리는 뜨거웠다





진부한 표현같지만 ‘불같은 연애’라는 표현보다 더 적절한 비유가 떠오르질 않는다.

그 정도로 확 타오른 우리 사이를 가로막을 만한 건 아무 것도 없어 보였다.

오늘 점심엔 뭘 먹을지, 어젯밤 어떤 꿈을 꾸었는지, 그의 부장 취미는 무엇인지, 옆 부서의 동료는 뭘 하고 있는지… 시시콜콜한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게 즐거웠다.



“네가 너무 예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그의 말이 진심으로 느껴졌다.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취했고, 그 자체로 내 삶은 충족됐다.

일상에 익숙해진 상태로 느슨한 감정이 팽팽하게 긴장하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하는 모든 시간이 즐거웠으며,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해 준 그는 신이 내려준 나의 ‘반쪽’이라고 확신했다.

‘너무 쉽게 뜨거워지면 빨리 식는다’는 연애 공식은 우리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고 치부했다.

그러나 공식이라는 말이 왜 붙었겠는가. 예외가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나만큼은 예외이기를 간절히 기도했지만, 나 역시 그 공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앞뒤 재지 않고 뜨겁게 시작했던 우리의 관계는, 달아올랐던 속도만큼 빠른 속도로 차갑게 식었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지금도 명확하지 않다. 다만 몇 가지 가능한 추론만 해볼 뿐이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그의 환경이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달라졌다는 거다.

부서가 바뀌면서 하루 3~4시간 밖에 못 잘 정도로 그는 바빠졌다. 분주해진 일상만큼 나를 생각할 여유는 없었고, 당연히 나와 함께 할 시간도 줄었다. 현격히.

한 시간에 수십 번 오가던 카톡과 이모티콘도 뜸해졌고, 그가 바쁘다는 사실을 잘 알았던 나는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배려하면서 애써 연락을 하지 않았다. 아니, 연락을 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머리로는 상황을 이해했다. 하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를 배려하는 내내 나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왜”라는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왜 연락을 하지 않을까. 왜 시간을 내지 못할까. 왜 나를 보러 달려오지 못할까. 왜 일이 나보다 우선이어야 할까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났고, 그는 어느 순간부터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그와의 거리만큼 나의 지치는 속도도 가속이 붙었다. 기다림에 지치자 그에 대한 애달픈 감정은 차차 원망으로 바뀌었다.

‘이럴 거면 연애는 왜 하자고 한 거야’

그래도, 그때만 해도,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상황이 다시 나아지면 ‘뜨거웠던 그 때, 설레던 그 때’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돌아서려는 내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머리 속으로는 결론이 딱 떨어졌다. 이미 식어버린 관계가 다시 뜨거워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

그건 인류가 지구에 정착해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낳기 시작한 저 먼 선사시대부터 정해진 원칙이다. 끝난 건 끝난 거다. 돌이킬 수 없다. 절대로.

나의 눈짓 하나, 나의 행동 하나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랑의 눈빛을 보내던 그 사내는 없다. 사라졌다. 그 사실을 나는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특별한 줄 알았지만, 다른 평범한 연인들처럼, 우리 역시 끝이 났다. 영원히.

헤어지고 난 후 한 달 동안 그를 지독히도 원망했다.

‘납득할 수 없는 이별’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마음을 다잡을 때까지는 그와 함께 공유했던 시간 이상이 걸렸다.

예전에 인기 개그 프로그램에서

1년 사귄 연인이 헤어지면 1달의 정리 기간이, 2년 사귄 연인이 헤어지면 2달의 정리 기간이, 10년 사귄 연인이 헤어지면 10달의 정리 기간이 필요하다는 ‘이별 공식’을 내놓았지만.

내가 그와 함께 한 시간의 두 배, 세 배만큼의 시간이 지나도 나는 그를 정리하지 못할 것 같다. 그와 헤어진 그 카페의 그 자리에 나 혼자 그대로 내팽개쳐진 느낌이다.

그리고 정유년 새해가 밝았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때를 다시 곱씹었다.

‘똑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겠다’

그렇게 굳게 결심하고 나에게 부족했던 것이 무엇인지 다이어리에 하나씩 적어 내려갔다.

“초스피드 연애는 부작용이 클 가능성이 크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 섣불리 판단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내가 원하던 대로 상대방을 규정한 채 시작된 연애일 가능성이 80% 이상이다.

모든 사람이 나 하나만큼은 예외이길 바란다. 하지만 예외는 없다.

인간 관계, 그 중에서도 남녀 관계는 한번 틀어지면 끝이다. 그게 진리다.

사귀는 동안 진심이라 하더라도 그건 과거고 현재는 유효하지 않은 감정이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그렇다, 모든 이별엔 이유가 있다. /스치듯안녕이었던여자 sednew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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