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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메르스추경 비판했던 文, 코로나추경 꺼내면 '무능정부' 부메랑

<추경의 정치학>

여당, 예산잉크 마르기 전인데도 군불…6년연속 추경 가능성

정부수립후 91차례 남발해도 국회부결 전무…여당엔 꽃놀이패

맞춤형 긴급수혈 취지 훼손되고 종합선물세트형 선심성 변질

정치권 '내로남불' 속 재정중독 심화…고무줄 추경요건 손질해야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5일 성동구 보건소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대응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관계자와 대화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 사태가 확산되면서 여당 내에서는 올해 예산안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추경 편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3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에 따른 경제 영향과 관련해 “추경예산을 검토한 바 없다”고 말했다. 홍 부총리는 “예산안 잉크가 다 마르기도 전에 추경을 물어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면서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지켜봐야 하는 상황에서 추경을 판단할 것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외견상 추경 편성 불가론을 강조한 이 발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순진하다. 경제수장의 발언을 뒤집어 ‘상황이 나빠지면 추경 편성이 가능하다’로 읽는 게 요령이다. 기재부는 추경 가능성을 일축했으나 내부적으로는 신종 코로나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과 대응 방안 등을 시나리오별로 검토하고 있다. 대응 카드 가운데 하나가 재정 실탄의 보강, 다시 말해 추경 편성이다.



시계추를 거꾸로 돌려 메르스가 창궐했던 2015년 초여름 상황으로 되돌아 가보자. 당시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6월7일 기자간담회에서 “추경을 할 단계가 아니다. 예비비로 충분하다”고 일축했다. 그때는 이미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메르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던 시기였다. 최 부총리의 말은 일주일 뒤인 15일 국회 답변 과정에서 “6월 말까지 종합적으로 판단하겠다”로 달라졌다. 그는 결국 25일 “15조원 이상 재정을 보강하겠다”며 추경 편성을 공식화했다. 메르스 감염 첫 확진 판정이 나온 5월20일로부터 36일째다.

2015년 7월 방문규 기획재정부 2차관이 정부세종청사에서 메르스 피해 극복과 경기 살리기를 위한 추가경정예산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추경은 대개 정부는 입을 닫고 여당에서 먼저 거론한다. 이번에도 조짐이 엿보인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를 관장하는 최운열 더불어민주당 제3정책조정위원장은 “추경 편성 등 강력한 대처가 필요하다”고 운을 뗀 바 있다. 아직 여당 내에서 공식화하지 않았을 뿐 사태가 잠잠해지지 않는 한 추경 카드는 여권 내에서 언제든 힘을 받을 사안이다. 정부는 일단 가용재원 3조4,000억원 규모의 예비비를 투입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비상금의 성격상 다 털어먹기도 어렵다. 만약 올해 추경을 편성하면 6년 연속이다.

추경 편성 여부를 속단하기는 이르다. 감염 확산과 그에 따른 경제적 충격이 변수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국내 첫 확진 판정이 난 시기는 지난달 20일. 최소한 2월 실물경제지표가 확인되는 3월은 돼야 정부 대응 방향을 어느 정도 예측해볼 수 있다. 3월1일 수출입 통계와 중순의 고용동향, 하순의 산업활동동향 등은 이번 사태의 경제적 충격을 가늠하는 1차 지표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이번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1·4분기 성장률(4월23일 발표)이 최대 0.7%포인트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예측했다.

물론 추경 카드를 쉽사리 빼들기 어려운 상황 논리가 있다. 우선 4·15총선이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 추경을 편성하다가는 선심성 ‘정치 추경’ 논란이 거세질 수 있다. 2000년 이후 4월 총선 전 ‘벚꽃 추경’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홍 부총리의 지적처럼 예산안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추경 카드를 꺼내 드는 것도 꺼림칙한 대목이다. 가용 실탄인 세계잉여금이 2조원 남짓 불과한 것도 제약 요인이고 문재인 대통령의 과거 발언도 부담이다. 문 대통령은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 정부의 메르스 추경에 대해 “정부가 제대로 대처했으면 천문학적인 국민 세금이 추가될 일이 없을 것”이라며 “이번 추경은 전적으로 정부의 무능을 드러낸 것”이라고 날을 세운 바 있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2013년 추경은 국회 통과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다. 정홍원 국무총리가 4월 국회에 출석해 “정부의 미흡한 경제 예측과 세입 전망으로 인해 추경 예산안을 편성한 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사과하는 모습. /연한뉴스


2017년 7월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열린 추경예산안 심사 광경. 문재인 정부의 추경 편성에 반발한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 소속 의원들은 불참했다./서울경제DB


그럼에도 정부가 작심만 한다면 추가 실탄 확보는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니다. 추경은 국회에서 불패신화를 이어왔다. 정부 수립 후 지금껏 추경 편성은 지난해 4월 6조원 규모의 청년 일자리 추경까지 모두 91차례. 단 한 번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적이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수경기가 바닥 밑 지하실이고 민생이 도탄에 빠졌다고 아우성이면 무턱대고 반대하다가는 거센 정치적 역풍을 맞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여소야대라도 민생을 살피자는 논리를 앞세우면 야당이 배겨날 재간이 없다. 추경 카드는 여당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꽃놀이패다.

추경의 유혹은 매혹적이다. 정부 여당 입장에서는 경기가 주저앉는 상황에서 자연재해와 고유가 같은 돌발 악재는 ‘울고 싶은 데 뺨 때린 격’이다. 추경 명분에 그만한 게 없다. 정부는 최근 20년 동안 17차례의 추경을 편성했다. 2007년과 2010~2012년, 2014년을 제외하고 매년 추가로 재정이 투입된 연유다. 2001년과 2003년에는 두 차례 추경이 편성됐다. 추경을 남발하는 사이 재정 규율이 무뎌지고 나라 곳간은 허물어졌다.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12년 연속 재정 적자를 기록했다. 재정 적자는 국가 부채로 남아 미래세대의 부담으로 남게 된다.

추경은 돌발 리스크를 관리하고 가라앉은 경기를 자극할 마중물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순기능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치러야 할 대가 또한 크다. 단기부양 효과를 거둘지언정 중장기적으로 독이 된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여유자금이 없어 국채를 찍어내야 할 상황이면 시중금리 상승을 유발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지난해 4월 미세먼지 추경을 설명하는 모습. 전체 추경 6조7,000억원에서 미세먼지 재원은 2조2,000억원에 불과하다. /연합뉴스




추경은 남발도 우려스러운 대목이지만 맞춤형 긴급수혈이라는 원래 취지에서 벗어나 종합선물세트형 선심성 경기부양책으로 전락한 것도 큰 문제다. 2015년 메르스 추경은 세수 부족에 따른 세입 경정과 가뭄 극복, 청년 실업 대책까지 끼워 넣으면서 15조원 규모로 늘어났다. 야당 시절 메르스 추경을 그토록 비판했던 문재인 정부는 지난해 미세먼지 추경을 한다면서 ‘민생안정’을 추가했다. 추경 실탄 6조원 가운데 미세먼지 재원은 2조원으로, 배보다 배꼽이 더 컸다.

습관성 추경은 허술한 추경 요건도 한몫을 한다. 국가재정법은 △전쟁과 대규모 재해 △경기침체, 대량실업, 남북관계 변화 등 대내외 여건의 중대 변화 또는 그럴 우려가 있는 경우 등에만 추경을 편성할 수 있도록 제한하고 있다. 이 중 경기침체와 대량실업 발생과 그럴 우려는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나 다름 없다.

문재인 정부 출범 첫해인 2017년 7월 일자리 추경은 적법성 여부를 두고 정치권에서 논란이 일었다. 김광림 자유한국당 의원이 “추경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발언하는 동안 국회 벽에 걸린 스크린에 추경의 법적 요건을 설명하는 문구가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의 추경 편성안은 국회에 제출될 때마다 논란이 불거졌다. 야당은 선심성 추경이네, 적법하지 않네 하며 반발하고 여당은 민생을 외면할 거냐며 갑론을박하다 국회를 파행으로 몰았다. 여야가 싸움박질하는 통에 제대로 된 심사는 늘 뒷전이었다. 추경 처리에 106일이나 걸린 적도 있다. 정치권이 ‘내로남불’ 추경을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고무줄 추경 요건부터 구체화해 재정 규율을 바로잡고 소모적 논란도 줄여야 한다. /권구찬선임기자 chans@sedaily.com

2002년 태풍루사 추경은 모범 사례…4조원 전액 수해복구 투입
■단 사흘만에 국회 통과 ‘최단기’

국채 발행없이 가용재원 총동원

태풍 ‘루사’로 하행선이 절단된 경부선 상행선 감천철교를 새마을호 열차가 불을 밝힌 채지나고 있다./연합뉴스


최근 20년 동안 17차례 편성된 추경예산 가운데 가장 모범적인 사례는 지난 2002년 태풍 루사 때의 추경이 꼽힌다. 그해 8월 말 한반도를 강타한 가을 태풍의 위력은 강했다. 일일 강우량이 1904년 기상관측 이후 가장 많은 870.5㎜를 기록하면서 사망· 실종자만도 246명에 달했다. 경제적 피해는 역대 최악인 5조5,000억원으로 집계됐다.

2002년 추경은 편성 목적이 분명했다. 사용 내역 대부분이 도로와 철도 등 사회간접자본(SOC) 시설의 긴급복구 비용과 김해· 합천· 함안 등 3개 특별재해지역에 대한 피해복구 지원이었다. 지금처럼 선심성 경기부양책은 일절 끼워 넣지 않았다. 정부가 9월 국회에 제출한 추경 규모는 4조1,000억원. 재해대책 예비비를 1조3,000억원에서 4조 9,000억원으로 증액하고 지방교부금 정산분 5,000억원을 앞당겨 편성했다.

통상 전국 단위의 선거를 앞두고 있으면 추경 편성은 금기시해왔다. 2002년 가을은 16대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하지만 국회에 제출된 추경안이 재해복구 용도에 한정되다 보니 추경을 둘러싼 정치적 논란을 낳지 않았다. 이 덕분에 정부가 국회에 상정한 지 단 사흘 만에 추경안이 통과됐다. 역대 최단기간으로 기록된다.

재원 조달도 모범적이다. 국채 발행이 없이 기존 가용재원을 총동원했다. 한은잉여금 초과납입분 1조9,000억원을 비롯해 한국통신(현 KT) 주식 매각 초과수입분 1조3,000억원, 세계잉여금 5,000억원, 이자예산 불용액 4,000억원을 끌어다 썼다.

2002년 추경이 물타기식 부양책으로 변질되지 않았던 것은 그해가 외환위기 충격에서 벗어나 경기회복 국면이었던 측면도 있지만 당시만 해도 건전·균형재정을 달성해야 한다는 정부의 의지가 뚜렷했던 영향도 컸다. /권구찬선임기자 chan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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