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글로벌 제약사들과 기술수출 계약을 맺으면서 받는 ‘선계약금’이 과거에 비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선계약금은 글로벌 제약사가 신약 후보 물질을 도입하면서 수출기업에 지불하는 돈이다. 기술을 가져간 글로벌 제약사가 해당 신약 후보 물질을 이용해 신약을 개발하다 실패하더라도 일단 선계약금을 받은 수출 기업은 글로벌 제약사에게 계약금을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 통상 선계약금 규모가 기술의 완성도·미래성장성·해당 기업에 대한 신뢰도와 비례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다. 이에 따라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의 선계약금 규모가 줄어드는 현상에 대해 ‘K바이오의 위기’라는 분석도 나온다.
11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2년 간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가 이뤄낸 주요 기술수출 규모는 7조5,000억원에 달했지만, 선계약금은 533억원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총 기술수출 금액의 1%에도 못 미친 것이다. 지난 2015년 한미약품(128940)이 기술수출을 이뤄낼 당시의 10% 수준에 비하면 10분의1 수준이다. 한미약품은 당시 사노피에 당뇨 신약 ‘퀀텀 프로젝트’를 총 4조7,000억원에 기술수출하면서 선계약금으로 5,000억원을 받았다.
최근 유전자치료제 개발기업 올릭스(226950)는 최근 프랑스 안과 전문기업 테아 오픈이노베이션에 리보핵산(RNA) 치료제 4개를 4,564억원에 기술이전하면서 선계약금으로 144억원을 받았다. 한미약품도 지난 8월 얀센에 수출했다가 반환된 비알코올성 지방간염 신약물질을 다국적 제약사 MSD에 8억7,000만달러(약 1조 391억원)에 수출했지만 선계약금은 1,000만달러(약 119억원)에 불과했다. 지아이이노베이션은 지난해 11월 중국 제약사 심시어에 면역항암제 후보물질인 ‘GI-101’을 총 9,000억원에 기술수출하면서 선계약금은 70억원을 받았다.
국내 제약·바이오업계의 선계약금 규모가 줄어든 이유는 계약의 질 보다 계약 성사 자체에 더 주력하기 때문이다. 특히 상장을 추진하고 있는 기업들의 경우 기술수출 실적 여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업계 한 관계자는 “기술특례상장을 위해서는 기술수출 실적이 사실상 필수”라며 “비상장 기업들의 경우 수십억원이나 수백억원 규모의 선계약금도 가뭄의 단비 같은 자금이기 때문에 일단 수출성사 자체에 목을 매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상장사들 역시 선계약금 보다 총 계약금을 늘리는 계약을 선호한다. 총 계약금 규모가 클 수록 주식시장에서 더욱 주목 받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주가부양을 위해 전략적으로 선계약금은 줄이고 총 계약금을 늘리는 계약을 맺는 경우가 잦다. 상장 바이오기업 한 관계자는 “기술개발 단계에 따라 지급 받는 총 계약금은 사실 언제 받을 수 있을 지, 실제 받게 될지 미지수인 경우가 많다”면서 “하지만 총 계약금 규모에 따라 해당 후보 물질의 잠재력과 연구역량을 동일시 하는 경향이 있다 보니 일단 총 계약금 규모를 늘리는 것이 주가에는 더 도움이 된다”고 전했다. 일부 제약·바이오 기업들은 총 계약 금액을 늘리기 이해 불리한 조건을 감내하는 경우도 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이나 유럽의약품청(EMA)의 허가 기간 등에 따라 계약금을 받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전문가들은 총 계약금 위주의 수출계약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고 우려한다. 선계약금 규모가 작으면 글로벌 제약사 입장에서는 비교적 큰 손해를 보지 않고 언제든지 기술도입을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경영에 어려움을 겪는 다국적 제약사들의 경우 선계약금이 적은 기술수출 계약 먼저 신약 개발 라인업에서 제외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업계 한 관계자는 “다국적 제약사들은 전체 계약 규모가 크더라도 선계약금이 적으면 언제든지 큰 부담없이 기술을 반환할 수 있다”며 “신약 후보 물질을 도입할 때부터 큰 금액을 들인 물질에 애착이 더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우영탁기자 ta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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