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청정에너지인 원자력 발전을 외면하면서 원전 신규 건설 중단에 이어 차세대 원전 개발도 크게 위축되고 있다. 원전 개발에 사실상 두 손을 놓고 있는 셈이다. 대신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천연가스(LNG) 발전을 늘려 자기모순에 빠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영국 등 선진국이 탈탄소를 위해 원전 활용을 추구하는 것과 달리 국내에서는 2050년 탈탄소 목표를 제시하고도 탈원전에 가까운 에너지 전환 정책으로 인해 수십 년간 축적한 원전 기술이 사실상 ‘사장(死藏)’되고 있다.
29일 관계 부처와 원자력계에 따르면 차세대 소형모듈원자로(SMR)의 실증을 위한 투자 계획조차 수립되지 못하고 소듐냉각고속로(SFR) 파이로프로세싱 등 사용 후 핵연료 재활용 연구개발(R&D) 사업도 사실상 종료될 위기에 처했다. SMR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지원하는 차세대 원전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지난 1997년 개발에 들어간 뒤 2012년 원자력위원회로부터 표준설계 인가를 받았지만 실증 투자를 앞두고 멈춰버렸다. 바이든 행정부가 적지 않은 예산을 투입할 것으로 보이는 사용 후 핵연료 재활용 기술도 올해 한미 공동 R&D가 종료될 예정이어서 사업 지속이 불투명해졌다. 이 사업은 내년 사업 연장 여부를 재검토하게 되나 재개 결정이 나더라도 예비타당성 검토를 거쳐야 해 2023년에나 연구가 재개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 임기 내 신규 원전 건설은 탈원전 기조에 맞춰 결국 최종 무산됐다. 산업통상자원부는 확정을 앞둔 9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신한울 원전 3·4호기 건설 계획을 최종 배제했다. 이로써 국내 원전은 오는 2034년까지 현 24기에서 17기로 줄어들게 됐다.
하지만 세계 각국은 원전이 탄소 감축은 물론 전력 수요 충족에도 효율적이라고 판단해 신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바이든 당선인은 후보 시절부터 SMR을 2050년 미국 탄소 중립 달성의 핵심 기술로 꼽았다. 10월 SMR과 선진 원자로 지원책을 발표한 미국 에너지부는 7년간 32억 달러를 지원한다. 2035년 기존 원전 가동을 중단하는 영국은 최근 롤스로이스 컨소시엄과 합작해 5년간 최소 2억 파운드(약 2,944억 원)를 들여 SMR을 최대 16기까지 짓기로 했다. 우리나라가 내년에 SMR(SMART) 혁신 기술과 광의의 SFR 연구에 각각 65억 원과 58억 원을 배정하기는 했으나 구색 맞추기에 그치는 것과 대조적이다. 정부가 원전 해체나 방사선 활용 기술에 대한 투자확대도 공언하고 있으나 아직 뚜렷한 진척은 없는 상태다. 온기운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는 “원전을 적폐로 보는 탈원전이 폐기되지 않는 한 탄소 중립은 구호에 그칠 것”이라고 꼬집었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세종=조양준기자 mryesandno@sedaily.com
바이든 ‘차세대 원전’ 올인...韓은 8년 전 설계 인가받고도 제자리
[원전 없이 탈탄소 없다]
美, 차세대 원전기술 개발 위해 7년간 32억 달러 공격적 투자
韓은 탈원전 정책에 발목 잡혀 실증 투자 단계서 올 스톱 위기
美 기업, 한국이 공들여온 사우디와 차세대 원전 계약까지 눈독
“우리나라가 미국과 다목적 소형모듈원자로(SMR·Small Modular Reactor) 등 차세대 원전 개발에 공조하고 사용 후 핵연료 관리·재활용(파이로프로세싱)을 위한 공동 연구개발(R&D)도 지속해야 합니다.”
임채영 한국원자력연구원 혁신원자력시스템연구소장은 29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는 한미 간 신규 원자력 협력 추진이 보류됐으나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는 기후변화 대응과 동맹 관계 강화 차원에서 협력에 나서야 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SMR은 최소 8조~10조 원 이상이 드는 기존 대형 원전에 비해 1조 5,000억 원이면 건설할 수 있고 안전성도 훨씬 뛰어나며 모듈화와 현장 설치를 통해 경제성도 보완하는 차세대 원전이다. 사용 후 핵연료를 재활용하는 파이로프로세싱 기술은 시간은 꽤 걸리겠지만 완성될 경우 기존 원전보다 170배 많은 에너지를 낼 수 있다. 하지만 일부에서 ‘돈 먹는 하마’라는 주장이 나오며 지난 10년간 진행됐던 한미 공동 R&D가 연말 이후 불투명한 실정이다.
바이든 당선인은 내년 1월 20일 취임 이후 청정에너지 확대와 기술혁신 등 그린 뉴딜에 4년간 2조 달러(2,300조 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태양광·풍력뿐 아니라 배터리, 재생 가능 수소, 선진 원자력 R&D 기술 개발과 상용화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 중 지난 1979년 펜실베이니아의 스리마일아일랜드(TMI) 원전 사고 이후 신규 원전 중단으로 돌아섰다가 차세대 소형 원전을 적극 키우기로 한 점이 눈에 띈다.
임 소장은 “미국은 원자력 발전량이 전체 발전량의 20%에 그치나 온실가스 감축 기여도는 60% 이상”이라며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행정부처럼 기존 원전을 대체하고 수출이 가능한 소형 SMR 개발을 계속 지원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국에서는 기존 원전이 천연가스나 재생에너지 등보다 경쟁력이 떨어져 SMR을 적극 지원한다는 것이다.
미국 에너지부(DOE)는 10월 SMR과 선진 원자로 지원책을 발표했다. 뉴스케일사에 SMR 12기를 발주한 UAMPS(유타·캘리포니아·아이다호·네바다·뉴멕시코·와이오밍에 전력을 서비스하는 회사)의 무탄소 전력 사업에 다년간 14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했다. 또한 앞으로 7년 이내에 가동할 수 있는 선진 원자로 건설을 위해 테라파워와 X-Energy를 선정하고 초기 선진 원자로 실증 프로그램(ARDP)에 각각 8,000만 달러를 지원, 7년간 총 32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빌 게이츠가 투자한 테라파워는 GE-히타치, 백텔 등과 나트륨 원자로(345MWe)를 실증하고 X-Energy는 소형 고온가스 냉각로(Xe-10, 80MWe) 4기와 핵연료 제조시설을 건설하기로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1997년부터 개발했던 SMR(SMART)의 표준설계 인가를 지난 2012년 원자력위원회로부터 받은 뒤 수출에 대비해 표준설계 변경 인가를 추진하고 있으나 정작 국내 실증을 위한 투자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SMART 혁신 기술 연구에만 내년 65억 원이 잡혀 있을 뿐이다. 미국·캐나다·중국·러시아·영국·아르헨티나 등이 민간 기업과 함께 SMR
의 R&D와 일부 실증에 적극 나서는 것과 대조적이다.
미국 뉴스케일사는 우리나라가 2015년 사우디아라비아와 양해각서(MOU)를 맺고 공을 들여 온 차세대 원전 수주에도 뒤늦게 뛰어들며 적극 로비하고 있다. 사우디는 차세대 원전 2기(기당 1조 5,000억 원)와 대형 원전을 짓기로 했는데 현재 저유가로 인한 재정압박으로 국제 입찰을 미루고 있다. 강한옥 원자력연 박사는 “우리나라가 소형 원자로에서 제일 먼저 출발해 개발 단계가 꽤 진행돼 있는데 다른 나라가 따라잡아 장점을 잃어버리고 있다”며 “서해안에 많이 분포된 화력발전소 중 한 기만 1조 5,000억 원 정도 들여 SMR로 대체해 실증한다면 수출산업으로 키울 수 있다”고 힘줘 말했다. 이어 “요르단 등에서도 인구 10만명 정도가 전기를 쓰고 열을 활용해 해수를 담수화할 수 있는 SMR 수주를 알아보고 있으나 유가나 가스값도 싸고 우리나라에서 실증이 이뤄지지 않아 여의치 않은 실정”이라고 했다.
여기에 지난 10년간 추진해왔던 미국과의 파이로프로세싱 공동 R&D가 올해 종료되고 내년 재검토 절차를 거치기로 했다. 이 절차를 통과하더라도 예비 타당성 검토를 해야 돼 2023년에나 연구가 재개될 수 있다. 원자력연구원은 그동안 7,000억여 원을 들여 미국 아르곤연구소와 파이로프로세싱과 소듐냉각고속로(SFR)를 연구해왔다. 우여곡절 끝에 국회에서 내년 광의의 SFR 연구비로 58억 원이 통과되기는 했지만 연구 지속성에 빨간불이 켜진 셈이다. 장윤일 미국 아르곤국립연구소(아이다호국립연구소로 통합) 석학연구원은 “파이로프로세싱 기술에 앞으로 10년간 1,000억 원씩 1조 원만 투자하면 결실을 볼 수 있는데 중단돼 참으로 답답하다”며 “중국과 인도가 이 기술 개발에 적극적인데 사용 후 핵연료를 파이로프로세싱으로 SFR에서 태우면 현재보다 170배 많은 에너지를 창출하며 처리 기간도 30만 년에서 300년으로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일부에서는 현 정부가 한반도 경제공동체에 대비해 북한의 전력난을 타개하기 위해서도 차세대 원전 투자를 늦춰서는 안된다는 제안을 하고 있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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