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청한 기자 best@hmgp.co.kr
불, 바퀴, 단추처럼 인류 최고의 발명품으로 꼽히지만 항상 터부시된다. 또한 약국, 마트, 편의점에서 대놓고 판매되지만 선뜻 구입이 쉽지 않으며, 분명한 남성용품임에도 남성보다는 여성을 위한 제품이다. 마지막으로 성인용품도, 청소년위원회의 청소년 유해물건에도 포함돼 있지 않지만 인터넷으로 검색하려면 반드시 성인인증이 필요하다.
다름 아닌 콘돔 이야기다.
실제로 콘돔은 원치 않는 임신을 막아 여권신장에 크게 기여한다. 에이즈, 성병 등의 질병에서 인류의 건강을 지켜주는 수호자이기도 하다.
현존하는 피임법 중 피임과 질병예방 효과를 동시에 발휘하는 것은 콘돔이 유일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콘돔이라는 단어를 들어면 부적절한 남녀관계를 떠올린다.
그 때문인지 우리 주변에는 콘돔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나 평가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유별날 것 없는 얇고 신축성 강한 고무튜브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콘돔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최신 과학기술의 산물이다.
우연한 발견
사실 콘돔은 인류 역사만큼이나 긴 역사를 자랑한다.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기원전 1,000년경 고대 이집트 벽화가 있다. 이 벽화에 아마포 재질의 덮개를 성기에 씌운 남성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 단, 역사학자들은 이를 콘돔 본연의 역할보다는 종교적·위생적·장식적 목적의 착용으로 보고 있다.
피임과 성병 방지 용도의 콘돔은 17세기 중반 처음 등장 했다. 성병인 매독을 두려워했던 영국 찰스 2세의 주치의가 어린양의 맹장으로 콘돔을 만든 것이다. 이후 양이나 돼지의 창자, 생선의 부레, 가죽 등 주로 동물의 신체 일부로 만든 콘돔이 고위층을 중심으로 사용됐다. 특히 창자로 제작한 것은 미지근한 물에 닦아 여러 차례 사용할 수 있어 별도의 전문제조업체가 있었을 만큼 인기를 끌었다고 알려져 있다.
오늘날과 같은 고무 재질의 콘돔은 1884년 미국의 발명가 찰스 굿이어가 우연히 가황(加 黃) 작용을 거친 고무를 접하면서 개발됐다. 천연고무에 열을 가하면 탄성이 사라지지만 황 성분을 첨가하면 탄성이 훨씬 배가된다는 사실에 착안한 발명품이었다.
본래 천연고무는 2개의 이중결합을 가진 이소프렌 분자가 수없이 연결된 형태다. 이 고무를 가황하면 긴 이소프렌 고분자들이 이황화 결합에 의해 교차 결합한다. 고무분자와 고무분자가 서로 다리를 걸치는 모양을 해 다리결합 구조로도 불리는 교차 결합 상태가 되면 고무분자가 잘 미끄러지지 않을뿐더러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성질이 강해지며 탄성이 높아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라텍스 고무의 개발로 콘돔의 성능도 비약적인 향상을 이뤘다.
천연고무를 능가하는 소재의 진화
이와 관련 최근에는 천연 라텍스 고무를 모방한 폴리이소 프렌을 원료로 제작된 제품이 주목을 받고 있다. 고무나무 수액에서 추출한 천연 고무액에는 불순물이 많지만 폴리이 소프렌은 석유화학적 정제가 가능해 불순물 제거가 상대적으로 용이한 때문이다.
폴리이소프렌 콘돔은 특히 천연 고무에 알레르기를 가진 사람들에게 유용하다. 2009년 듀렉스가 출시한 ‘아반티 울티마’가 대표적이며 우리나라의 유니더스를 포함해 여러 제조사들이 상용화 기술 개발에 한창이다.
폴리우레탄을 원료로 한 합성고무 콘돔도 고무 알레르기를 가진 사람에게 추천할 만한 제품이다. 이 콘돔은 촉감 면에서 다소 비교열위가 있다는 평가를 받지만 전문가들은 우레탄 소재의 물성 조절 폭이 크다는 점에서 충분히 개선 가능한 한계로 판단한다. 일례로 일본 사가미의 ‘사가미 오리지널’은 특유의 고무냄새를 원천 봉쇄해 오랜 기간 스테디셀러로 자리잡고 있다.
소재와 함께 콘돔의 성능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 요소는 윤활제다. 현재 대부분의 제품에는 폴리 다이메틸실록세인(PDMS) 을 주성분으로 하는 실리콘 오일이 사용된다.
장기간 보관해도 고무 소재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인체에도 무해하다. 하지만 실리콘 오일도 단점은 있다. 물에 잘 씻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콘돔 사용 후 남성들이 종종 찜찜한 느낌을 가지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이의 해결을 위해 친수성 오일을 사용한 제품이 개발되고 있지만 아직 시판품은 전무한 실정이다.
피임 성공률 99%… 사이즈가 중요
현재의 콘돔은 발전된 기술만큼 높은 수준의 성능을 자랑한다. 김재오 유니더스 개발부 차장은 “시중에 나와 있는 정상적인 콘돔은 피임 성공률을 99% 이상으로 봐도 좋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피임실패율이 10% 정도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올바른 사용법을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또 피임 성공률을 높이려면 자신에게 맞는 사이즈의 제품 선택이 중요하다. 너무 작으면 혈액순환을 방해해 발기력 저하가 유발될 수 있고, 반대의 경우에는 밀폐력이 저하돼 피임능력 상실이 야기될 수 있다.
김 차장은 “콘돔은 성감을 저해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임신과 성병에 대한 공포를 경감시켜줘 오히려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며 “이 같은 선입견 역시 자신과 맞지 않는 제품의 사용으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질병 예방과 관련해서도 김 차장은 “콘돔의 표면을 전자 현미경으로 3만배 확대한 결과, 어떠한 기공(氣孔)도 관찰할 수 없었다는 연구보고가 있다”며 “에이즈, 임질, 매독, 트리코모나스, 골반 내 장기 감염 등에 높은 예방 효과를 지녔다”고 강조했다.
35ℓ 공기도 거뜬
콘돔의 이런 성능은 기본적으로 엄격한 품질관리의 결과다. 콘돔은 사람의 몸에 직접 접촉할뿐더러 불량품에 따르는 부작용(?)이 크기 때문에 매우 까다로운 테스트가 진행된다. 유니더스의 경우 전수검사를 기본 원칙으로 삼고 있으며 수출물량 1억개 중 단 하나만 불량이 나와도 전량 폐기 처분한다.
검사는 파열 부피 실험, 핀홀 테스트 등이 있다. 이중 파열 부피 실험은 콘돔이 터질 때까지 압축공기를 주입, 주입된 공기량과 파열시점의 압력으로 물리적 특성을 평가하는 검사다. 이를 통해 물리적 안전성 측면에서 콘돔의 강도를 체크할 수 있다. ISO 규격에서는 1.0kPA의 압력, 18ℓ의 용량을 버틸 수 있어야 합격 판정을 받는다. 유니더스는 이보다 엄격한 2.0kPA, 35ℓ가 기준이다. 35ℓ면 1.5ℓ 탄산음료를 23개나 쏟아 부을 수 있는 양이다. 그러니 여성의 손톱과 같은 날카로운 물체만 조심한다면 말 그대로 콘돔이 찢어질 걱정은 기우에 불과하다.
하지만 아무리 물리적 안전성이 높아도 내용물이 샌다면 의미가 없다. 이를 잡기 위한 검사가 핀홀 테스트다.
제품에 미세한 구멍이 있어 내부의 물질이 새어나오지 않는지를 판단하는 시험으로 일정량의 물을 채워 넣고 누수 여부를 보거나 물속에 콘돔을 담그고 전기가 통하는지 전도성을 확인한다.
이와 함께 노화에 따른 성능 하락도 철저한 검수 대상이다. 특정 샘플을 골라 5년 동안 보관한 후에 물성을 체크하기도 하고 건조기에 넣고 일부러 노화시키기도 한다. 이렇게 유통과정에서 노출될 수 있는 주변의 온도변화에 고무재질이 변형되지는 않는지, 내구연한은 충분한지를 본다.
안전은 기본, 취향은 옵션
김 차장은 “최근 콘돔의 트렌드는 얇게, 안전하게, 다양하게의 3가지로 요약된다”며 “과거에는 피임과 질병예방에 중점을 두고 제품을 만들었다면 요즘은 추가적으로 디자인이나 소재, 윤활제를 달리해 사용자의 만족도를 향상할 수 있는 제품들이 주류를 이룬다”고 전했다.
현재 국내에서 가장 사랑받는 제품으로는 두께 0.02㎜ 미만의 극초박형 콘돔을 꼽을 수 있다. 온라인 성인용품 판매사이트인 만냥닷컴의 한 관계자는 “최근 쏟아지는 기능성 콘돔 중 '스킨레스 3000', '슈퍼씬' 등 극초박형 제품의 판매가 압도적”이라며 “최대한 착용 안 한 듯한 느낌을 주는 제품을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것 같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또 “조금이라도 더 얇고 강하게 제작되는 것이 콘돔 진화의 기본 트렌드”라며 “천연 알로에 젤을 바른 일본 오카모토의 ‘쉬’처럼 여성들의 만족감 증대를 고려한 제품들의 인기도 꾸준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초박형 콘돔은 그 제조에 있어서도 다를 수밖에 없다. 김 차장은 “여러 가지 정밀한 기술을 요하지만 특히 황 성분이 포함된 분말 입자를 고무액과 혼합하기 전 1마이크로미터(㎛, 100만분의 1m) 수준까지 세밀하게 분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며 “ 불순물 제거를 위한 필터링 역시 더 정교함이 요구된다”고 설명했다.
한편 벤조카인 같은 마취성분을 내부에 도포해 사정 시간을 연장시켜주는 사정 지연 콘돔 또한 기능성 콘돔을 말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만냥닷컴 관계자는 “사정 지연 콘돔은 기능성 콘돔의 전통적 강자”라며 “판매율 추이에서도 시장 흐름에 관계없이 항상 상위권을 점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알려줬다. 유니더스의 베스트셀러 ‘롱 러브’도 이의 일종이다.
이밖에도 무독성 발광물질을 바른 야광 콘돔을 비롯해 향기 콘돔, 진동 콘돔, 스프레이형 콘돔 등 다양한 기능성 제품들이 차별화를 내세워 소비자의 간택을 받고 있다. 김 차장은 “성에 개방적인 미국에서는 이미 많은 사용자들이 모양과 윤활제의 종류에 따라 취향에 맞는 제품을 고른다”며 “우리나라도 점차 콘돔을 터부시했던 것에서 벗어나 커플의 기호를 바탕으로 선택의 폭을 넓히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처럼 콘돔의 진화는 이제 단순한 피임과 위생의 수준을 넘어 각 개인의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는 기술적 업그레이드를 거듭하고 있다.
기상천외한 콘돔 사용법 콘돔은 특유의 탄성을 바탕으로 본래의 용처를 넘어 다방면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작년 남아공 월드컵 때는 무료로 나눠준 콘돔을 관중들이 풍선처럼 불어 날리다가 물의를 빚기도 했다. 콘돔은 때로 마약 운송수단이 되기도 한다. 가장 최근에는 지난 9월 뉴질랜드에서 솔린다 아리르티자발 베가라는 여성이 마약을 담은 콘돔을 삼켜 밀반입하려다가 사망한 사건이 있다. 경찰당국에 따르면 몸속의 콘돔이 항공기 안에서 터지면서 대량의 마약이 체내에 흡수돼 숨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는 반대로 콘돔이 의료용으로 쓰여 생명을 살린 경우도 있다. 2008년 영국의 의학전문저널 트로피칼 닥터에는 콘돔을 사용해 분만 직후 출혈을 막은 사례가 소개됐다. 매년 13만2,000명의 사망자를 내는 분만 직후 출혈을 막기 위해 방글라데시의 한 병원에서 부풀린 콘돔을 카테터와 함께 자궁에 삽입한 것. 그 결과, 23명의 환자들이 무사히 출혈을 멈췄다고 한다. 국내 콘돔제조기업 유니더스의 또 다른 주력상품 중 하나가 의료용 장갑이니 어떻게 보면 콘돔과 의료용품은 사촌 지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장 황당한 콘돔의 활용은 중국에서 있었다. 지난 8월 중국중앙방송(CCTV) 기자가 마이크에 콘돔을 씌운 채 생방송을 감행해 화제가 된 것. 태풍 무이파의 현장 상황을 전하기 위해 산둥성 룽청시를 찾은 스진빈 기자가 마이크에 씌울 방수 도구가 없자 임기응변으로 콘돔을 마이크에 씌웠다. 이 해프닝은 국내에서도 ‘대륙의 앵커’, ‘콘돔 마이크’ 등으로 회자되며 일상에 지친 누리꾼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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