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틀리가 깨어났다. 전 세계 럭셔리 자동차 시장에서 무서운 기세로 영토를 확장해나가고 있다. 뮬산은 여왕 롤스로이스에 창끝을 겨눴다. 플라잉 스퍼는 수 많은 고급차 소비자들을 벤틀리 추종자로 만들었다.
신기주 기자 jerry114@hk.co.kr
벤틀리는 천사의 날개 깃털로 만들어졌다. 벤틀리의 문양은 대문자 B가 양쪽 날개를 활짝 펼친 모습 이다. 자세히 보면 오른쪽 날개의 깃털은 10개인 데 왼쪽 날개의 깃털은 9개뿐이다. 왜 그런진 아 무도 모른다. 단지 전설이 하나 전해질 뿐이다. 벤 틀리를 창업한 월터 오웬 벤틀리는 원래 비행기 엔진 개발자였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자동차로 눈을 돌렸다. 1919년 벤틀리 모터스를 세웠다. 월터 오웬 벤틀리는 무엇보다 빠른 차를 만들고 싶었다. 두 날개를 활짝 펴고 지상을 날듯 이 달리는 차가 벤틀리였다. 벤틀리의 문양에 천 사의 날개를 달았다. 그리고 한쪽 날개의 깃털을 뽑아서 벤틀리를 만들었다.
창업주의 소망은 이루어졌다. 벤틀리는 1924년부터 1930년까지 르망 24 레이스에서 5차례 연속 우승했다. 벤틀리는 빈티지 카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빠른 차였다. 속도에 도전했던 최초의 자동차였다. 오늘날 고성능 슈 퍼카들은 모두 벤틀리의 후예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벤틀리는 날개 를 접어야 했다. 자금난에 대공황까지 겹치면서 월터 오웬 벤틀리는 경영권 을 내놓아야 했다. 결국 벤틀리는 롤스로이스에 매각됐다. 월터 오웬 벤틀 리는 벤틀리가 롤스로이스에 매각될 때까지도 인수자가 누구인지 몰랐다. 롤스로이스와 벤틀리는 꽃마차를 탄 여왕과 갑옷을 입은 공작의 관계와 같다. 공작은 왕위 계승 서열에서 첫 번째인 귀족을 일컫는다. 여왕과 달리 직접 전장에 나가 싸운다. 여왕 입장에선 가장 위협적인 존재다. 롤스로이 스에 인수된 벤틀리는 유폐된 공작 신세였다. 롤스로이스는 스스로 정상 에 군림하기 위해 벤틀리를 그저 빠르고 힘센 고급차 정도로 무릎 꿇렸다. 벤틀리는 날개 잃은 천사였다.
뮬산은 공작의 반란이다. 마침내 벤틀리는 뮬산으로 롤스로이스의 권 좌에 도전했다. 1998년 롤스로이스 모터스는 폭스바겐과 BMW에 분할 매 각됐다. 폭스바겐과 BMW의 인수전에서 폭스바겐은 벤틀리를 차지했고 BMW는 롤스로이스를 가져갔다. 결국 롤스로이스와 벤틀리가 만들어지 는 영국 크루위 공장을 차지한 건 폭스바겐이었다. 마침내 벤틀리는 롤스 로이스의 그늘에서 벗어났다. 공작은 여왕의 성에서 탈출해서 자기 영지로 돌아갔다. 절치부심한 벤틀리는 2009년 롤스로이스 팬텀을 위협할 만한 새로운 기함인 뮬산을 선보였다.
벤틀리는 1980년대에도 한 차례 롤스로이스에 도전한 적이 있었다. 롤 스로이스가 벤틀리에게 독자 경영을 허락했던 시기였다. 그때 벤틀리는 첫 번째 뮬산을 만들었다. 뮬산은 큰 인기를 끌었고 롤스로이스 왕국에서 롤 스로이스와 벤틀리의 판매 비율도 역전돼 버렸다. 폭스바겐에게 인수되면 서 자치권을 되찾은 공작이 여왕에게 칼을 겨누면서 뮬산을 꺼내든 것은 역사가 있는 사건이었단 얘기다.
뮬산은 그럴 만한 차다. 서울춘천고속도로로 뮬산을 내몰았다. 뮬산 은 최고 출력 512마력의 V8 6,750cc 수제 트윈 터보 엔진을 갖고 있다. 최 고 속도는 시속 296km다. 지그시 가속 발판을 밟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시속 200km 언저리에 접근했다. 서울춘천고속도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 는 요금소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느새 200km를 훌쩍 넘겼을 수도 있었 다. 요금소를 통과해서 다시 가속했다. 뮬산이 멈췄다가 시속 100km까지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5.3초다. 순식간에 주변 차들을 압도해버렸다. V8 트윈 터보 엔진이 으르렁거렸다. 뮬산의 실내 장식은 1920년대와 1930 년대의 빈티지 카 시대를 연상시킨다. 송풍구를 여닫는 손잡이도 막대 모 양이라 예스럽다. 돌리는 아날로그식이나 누르는 전자식이 나오기 이전 시 대의 풍미다. 뮬산의 계기반은 요즘 차들과는 정반대로 돼 있다. 속도가 빨 라지면 속도계가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오른쪽 끝 위에서 왼쪽 아래로 내려간다. 엔진 회전 수를 알려주는 RPM 계기반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렇게 고전적인 매력을 갖고 있는데도 엔진음과 주행감은 중후장대하다. 엔진은 수동으로 변속할 때마다 포효한다. 뮬산 은 스포츠 모드, 벤틀리 모드, 컴포트 모드 세 가지 주행 형식을 선택할 수 있다. 또 원한다면 운전자가 스스로 주행 형식을 결정할 수도 있다. 뮬산은 최고급 럭셔리 세단인데도 주행 모드를 바꿀 때마다 역동적으로 변신한다. 컴포트 모드일 땐 꽃마차를 탄 듯 부드럽게 출렁거리다가도 스포츠 모드일 땐 바닥에 낮게 엎드린 채 달린다. 벤틀리 모드는 두 가지 즐거움을 한꺼번 에 누릴 수 있다. 벤틀리는 분명 마 차를 끄는 얌전한 백마가 아니다. 높 은 곳에서 직접 전투를 지휘하는 공 작의 거친 준마다. 운전대를 잡는 순 간부터 길들여야 한다. 뮬산은 분명 운전사를 두고 주인은 뒷좌석에 타 는 쇼퍼 드리븐 카다. 하지만 뮬산 을 운전하는 쾌감이란 게 있다. 벤 틀리는 날 때부터 타기 위해서가 아 니라 몰기 위해서 만들어진 차였다.
벤틀리는 분명 마차를 끄는 얌전한 백마가 아니다. 높은 곳에서 직접 전투를 지휘하는 공작의 거친 준마다
뮬산은 큰 차다. 길이가 6미터에 육박한다. 폭도 2미터 가까이 된다. 무게는 2.5톤이다. 하지만 뮬산을 몰다 보면 자꾸만 큰 차라는 걸 잊 게 된다. 운전석에 앉아 있으면 날렵 한 슈퍼카를 몰고 있다는 착각이 든 다. 기회만 되면 콘을 세워놓고 요리 조리 빠져나가는 슬라럼을 해봐도 좋겠다 싶다. 그래서 실수하기 쉽다. 뮬산을 몰고 비좁은 지하 주차장에 들어갔다. 진땀 나는 일이었다. 뮬산은 평민 대중차들이 다니는 좁은 골목 에는 안 맞는다. 맹수를 좁은 울타리에 가둬놓은 꼴이었다. 그나마 뮬산의 사방 감지기가 차를 지켜줬다. 조금만 장애물이 가까워져도 위험 신호를 보냈다. 안 그래도 벤틀리 관계자가 이런 말을 했다. "이상하게 뮬산은 시험 주행을 하다가 작은 접촉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아요. 요즘 들어 자동차 관 리에 더 신경을 쓰고 있어요." 뮬산의 가격은 5억2,700만 원이 넘는다. 작 은 흠집만 나도 값비싼 흉터가 될 수 있다. 그럴 만했다. 뮬산은 덩치는 크 지만 날렵하다. 그만큼 운전하기가 편하다. 익숙해지면 차를 제어하는 데 자신이 붙게 된다. 그러다 함정에 빠진다. 뮬산이 훨씬 더 크고 존재감이 있 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엉금엉금 지하 주차장을 빠져 나왔다. 뮬산은 분명 벤틀리의 기함이다.
벤틀리 콘티넨털 플라잉 스퍼는 다르다. 벤틀리는 뮬산과 아나지와 콘 티넨털과 슈퍼스포츠로 이어지는 장대한 제품군을 갖추고 있다. 폭스바 겐에 인수된 뒤 벤틀리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도 이렇게 다양한 제품군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고급 수제차인데도 선택의 폭이 넓단 얘 기다. 그중에서도 콘티넨털 시리즈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4도어 세단을 표방한다. 플라잉 스퍼는 콘티넨털 시리즈를 대표한다. 뮬산에 비해 외관 은 날렵하고 내부는 기능적이다. 뮬산이 완전무장을 한 공작의 자태라면 플라잉 스퍼는 가벼운 파티 연미복을 입은 모습이다. 그만큼 차의 움직임 도 산뜻하다.
이번엔 서울의 서쪽으로 갔다. 상암 월드컵 경기장 인근 도로에서 플라 잉 스퍼를 몰았다. 플라잉 스퍼는 5,988cc 12기통 트윈 터보 엔진을 갖고 있다. 최고 속도는 시속 312km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에 이르는 이 른바 제로백은 5.2초다. 정말 플라잉 스퍼의 순발력은 발군이다. 가속 발판 을 밟으면 튕겨 나가듯이 질주하기 시작한다. 정지 상태에서 주행 상태로 전환되는 게 순식간이다. 플라잉 스퍼의 실내는 뮬산 못지않게 고전적이다. 지팡이를 연상시키는 길고 뭉툭한 변속기 손잡이나 부드러운 가죽 의자 같은 요소들은 영락없는 벤틀리의 DNA다. 하지만 플라잉 스퍼에는 폭스 바겐의 DNA도 접목돼 있다. 벤틀리의 외형을 지녔지만 플라잉 스퍼는 폭 스바겐의 D형 플랫폼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폭스바겐과 벤틀리의 전통, 기술이 만나서 콘티넨털 플라잉 스퍼가 태어났다.
벤틀리의 날개 문양은 차종마다 색깔까지 다르다. 아나지 같은 럭셔리 모델은 빨간색이다. 콘티넨털처럼 성능 위주의 차량은 검은색이다. 전통적 인 벤틀리의 상징색은 초록색이고 아주어 같은 컨버터블 차종은 푸른색 이다. 성능을 강조하는 플라잉 스퍼의 검은색은 벤틀리를 대표한다. 플라 잉 스퍼는 벤틀리의 모든 차종 가운데에서도 가장 인기가 좋다. 영국의 전 통과 독일의 합리성이 가장 잘 결합된 차종이기 때문이다. 1998년 폭스바 겐에 인수된 이후 벤틀리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BMW에 인수된 롤스 로이스는 팬텀과 고스트라는 2개 차종만 갖고 있다. 롤스로이스는 새로운 차종을 만들지 않는다는 방침을 갖고 있다. 최근에 선보인 고스트 역시 롤 스로이스의 첫 번째 차종이었던 실버 고스트의 재현이다. 반면에 벤틀리는 역동적이다. 다양한 제품군으로 다양한 소비자들을 공략하고 있다. 그중에 서도 가장 큰 시장 점유율을 갖고 있는 게 검은색 콘티넨털이고 플라잉 스 퍼다. 플라잉 스퍼는 영국 크루위 공장에서 물량을 다 소화하지 못해서 폭 스바겐의 독일 드레스덴 공장에서도 생산된다.
뮬산은 이미 롤스로이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롤스로이스를 타고, 홍라희 리움 관장은 벤틀리 뮬산을 탄다
플라잉 스퍼는 이름처럼 바람을 박차고 달린다. 플라잉 스퍼의 엔진은 폭스바겐의 아우디 A8에도 탑재된다. 하지만 플라잉 스퍼는 A8보다 한 수 위다. 트윈 터보를 통해 더 큰 힘을 뿜어낸다. 플라잉 스퍼의 날렵한 외관과 만나면서 한때 르망24를 제패했던 최초의 슈퍼카인 벤틀리의 전통이 완결 된다.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강변 북로로 접어드는 곡선 구간에서 급가 속을 했다. 플라잉 스퍼는 4도어 세단이다. 긴 차제 길이에도 불구하고 미 끄러짐이나 흔들림이 없다. 언덕길에서 멈췄다가 급가속하면 무거운 차체 와 넘치는 힘 때문에 바퀴가 감기는 요란한 스쿼트 현상도 일어난다. 이럴 때면 길을 가던 행인들의 시선이 플라잉 스퍼로 쏠릴 수밖에 없다. 어쩌면 플라잉 스퍼야말로 벤틀리를 즐기는 최상의 선택일 수 있다. 벤틀리의 매 력을 두루 갖췄으면서도 턱시도를 입은 것처럼 멋있고 가볍다.
얼마 전 있었던 영국 왕실의 결혼식에서 윌리엄 왕자는 왕자비 케서린 미들턴과 함께 푸른색 벤틀리를 탔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찰스 왕세자가 스무 살 생일을 맞았을 때 선물했던 벤틀리였다. 가솔린 대신 알코올로도 주행할 수 있도록 특수 제작된 차다. 벤틀리는 그렇게 한사코 귀족적이기 만 한 차였다. 롤스로이스에 인수된 이래 70년 동안 벤틀리는 잠들어 있었 다. 이제 벤틀리가 깨어났다. 무서운 기세로 전세를 역전시키고 있다. 플라 잉 스퍼는 영국 럭셔리 자동차의 대명사가 됐다. 뮬산은 이미 롤스로이스 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롤스로이스를 탄다. 홍라희 리움 관장은 벤틀리 뮬산을 탄다. 뮬산이란 이름은 르망24 레이스 가 열리는 프랑스 사르트 경주장에서 따왔다. 사르트 경주장엔 6km에 이 르는 직선 주로가 있다. 여기에서 경주 차들은 최고 속도에 도달하게 된다. 자동차 성능의 궁극적인 시험대인 셈이다. 직선 주로의 마지막에 뮬산이 있다. 뮬산은 직각으로 꺾이는 회전 구간의 이름이다. 뮬산에서 운전자들 의 담력과 실력이 판가름난다. 벤틀리가 르망24에서 우승할 수 있었던 건 뮬산을 정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뮬산은 자동차 성능의 궁극을 뜻하는 단어다. 벤틀리가 뮬산을 향한 직선 주로에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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