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스티브 잡스, 실패에서 성공을 캐낸 위대한 연금술사


인류 역사에서 전설은 대개 승리한 자의 몫이 된다. 승리의 행진이 자연의 법칙으로 멈춰야만 할 때 전설은 곧잘 신화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아는 스티브 잡스는 승자였다. 그러나 잡스의 승리는 항상 그의 실패로부터 나왔다. 그는 실패를 성공으로 바꾼 실패의 연금술사였다. 그가 신화의 세계로 한걸음 더 멀어지기 전에 잡스의 실패를 되짚어봤다. 그의 실패는 곧 승리의 역사였다.
한정연 기자 jayhan@hmgp.co.kr

1. 쿠데타로 내몰린 창업자, 근성을 키우다

1985년 9월 17일. 23세에 애플을 세워 IT업계의 신화를 이룩했던 스티브 잡스가 불과 31세의 나이에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쫓겨난다. 잡스에게 “평 생 설탕 물만 팔 셈이냐”는 얘기를 듣고 애플에 합류한 전 펩시콜라 사장 존 스컬리는 공적이었던 IBM과의 전투 대신 창업주와의 사내전투를 벌 여 결국 승리를 쟁취했다.

스컬리는 잡스를 ‘기술발전에 대한 맹목적 비전’과 ‘취미에 대한 정열’ 을 지닌 고집불통으로 몰아세웠다. 잡스는 사내 권력다툼에서 패한 그 해 5월부터 공식 사임한 9월까지 4개월간 ‘시베리아’로 불리던 자신의 사무 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30대 초반의 이 젊은이는 그곳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실패를 되짚어봤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잡스는 애플이 1980년 1억1,790만 달러 매출 로 미국 PC시장의 32%를 차지했었다는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지 않았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에 대기업 IBM이 진출한 것도 ‘환영한다’는 광고 문구를 통해 비웃었던 그였기 때문이다. IBM의 무차별적인 밀어내기에 애플의 매출과 점유율이 서서히 떨어졌지만 그는 아랑곳없이 신제품 개발 에 매달렸다.

그는 매킨토시라는 현대 컴퓨터의 아이콘에 변화를 꾀하던 중이었다. 그에게 매킨토시는 지금 애플의 독특한 제품들처럼 여전히 불완전해 보 였다. 메모리 용량이 부족하고 호환되는 고성능 프린터도 없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잡스는 최고의 제품을 다소 불완전하게 만들어 이와 관련된 다 른 제품 시장을 만드는데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대기업 출신인 존 스컬리 CEO는 이를 기다리지 못했다. 잡 스의 고집불통과 카리스마, 봉건적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해 이사진을 포섭했다. 그래서 잡스는 결국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버림을 당하고 말았다.

잡스는 당장은 소비자가 원치 않아도 언젠가는 자신처럼 간절히 원할 제품을 만들고 싶었다. 그는 “애플은 컴퓨터를 철학으로 생각하는 정신에 서 시작됐다. 이처럼 철저히 상품화된 컴퓨터를 만든다면 나는 애플을 버 릴 수밖에 없다”는 말을 남기고 단 1주를 제외한 애플 주식 모두를 시장 에서 처분하고 회사를 떠났다.

2. 넥스트, iOS의 근간이 되다

애플에서 쫓겨난 억만장자 청년 스티브 잡스. 여전히 배가 고팠던 그는 직 선적인 성격의 소유자답게 애플에 복수하겠다고 공언을 했다. 애플보다 나은 제품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래서 만들어진 회사가 넥스 트였다. 최고급 사양의 컴퓨터를 만들어 학교 같은 공공기관에 납품하겠 다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다.

넥스트의 제품은 말 그대로 최고였다. 성능도 그랬지만 일단 가격이 최 고가였다. 1980년대에 대당 5만 달러가 넘는 제품을 살 수 있는 곳은 기 껏해야 CIA 같은 첩보기관밖에는 없었다. 그나마도 비싼 하드웨어가 아닌 CIA용 고성능 소프트웨어였다. 잡스는 8년 동안 넥스트를 5만 대밖에 팔 지 못했다. 하지만 넥스트의 운영체계(OS)는 예외였다. 현재 애플의 핵심기술 상당수가 넥스트에서 나왔다. 현존하는 최고의 OS라는 맥OS X(10)의 토대는 넥스트에서 만든 잡스의 작품이었다. 아이 폰 iOS의 근간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잡스 없는 애플은 잘 돌아가고 있었을까? 처음에는 그럭저럭 잘 견뎠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MS가 윈도 시리즈를 여러 회사에 팔며 ‘표준화’라는 돈다발에 도전하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애플은 모 토롤라, 파워컴퓨팅 같은 PC 제조업체에 자사의 OS를 팔기 시작했다. 그 러나 이런 복제품들은 회사 경영을 더 악화시켰다. 1996년 애플은 1분기 에만 6,900만 달러 손실을 기록했다.

길버트 아멜리오 CEO가 구원투수로 등장했다. 아멜리오가 할 수 있 는 유일한 선택은 낡은 맥의 OS를 바꿔야 할 때 내부 개발을 포기하는 것 정도였다. 아멜리오는 애플 전 간부가 만든 ‘비오에스’라는 OS를 사들 일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하게 걸려온 전화 한 통이 애플, 그리고 잡 스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넥스트의 한 직원이 뜬금없이 애플에 전화를 걸 어 자사의 OS를 사라고 권유했던 것. 1996년 12월 스티브 잡스는 애플로 돌아와 사장단 앞에서 넥스트 시연회를 가졌다. 결과는 대성공. 애플은 그 후 넥스트를 인수했다.

잡스는 특별고문 역으로 애플로 돌아온다. 12년 만이었다. 이 신비롭고 괴팍했던 천재는 관료화된 애플을 다시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어갔다. ‘애 플 마니아’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혁신적인 그리고 대중적이지 않았던 제 품이 대박을 치자 ‘애플=잡스’라는 공식이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다. 3. 비난 받던 OS 폐쇄정책으로 기사회생 애플은 세계 최초로 휴대용 디지털 기기(PDA)인 ‘뉴턴’을 만들었다. 하 지만 이를 수십억 달러짜리 시장으로 개척한 회사는 ‘팜’이었고, 막대한 수익을 챙긴 회사는 휴렛패커드(HP)였다. 자사 OS를 공개할 생각이 없 었기 때문에 애플 제품의 대중화는 불가능했다. 애플이 그래픽 기반의 PC 시장을 처음으로 열었지만, 이 시장을 독차지한 회사는 마이크로소 프트(MS)였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해 준다. 잡스의 OS 라이선스 정책은 철저한 폐쇄주의였다.

애플은 과거엔 ‘하드웨어’를 파는 회사였고, 지금은 ‘라이프 사이클’을 파는 회사다. 한 번도 OS와 같은 소프트웨어를 돈 받고 판 적이 없다. 소 프트웨어는 제품을 더 많이 팔게 하는 동력일 뿐이었다.



잡스가 빠진 1990년대 애플이 처음으로 OS를 라이선스 비용을 받고 팔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서 얻게 된 적은 이익은 오히려 애플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래서 잡스가 1997년 애플에 복귀한 후 가장 먼저 손 댄 부 분이 OS 부문이었다. 2000년대 초반 잡스가 아이맥용 소프트웨어를 만 들었지만 그래픽 소프트웨어 제작사이자 협력사인 어도비가 협력을 거부 했다. 잡스는 마지못해 소프트웨어를 스스로 완성시켰다. 단지 아이맥을 팔기 위해서였다.

잡스가 폐쇄정책을 유지한 건 장기적으로 이득을 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애플은 아이튠즈로 모든 SW 및 음악, 영상 콘텐트를 입력해 야 한다. 때문에 전 세계 콘텐츠 제작자들이 애플과 기꺼이 손을 잡았다. 아이튠즈에겐 불법 다운로드 걱정도, 해킹 걱정도 없었다. 안전하게 제값 을 받고 팔릴 수 있는 콘텐츠 세계 장터를 통해 애플은 해마다 엄청난 수 익을 올렸다. 아이폰, 아이패드 등 애플이 내놓은 새로운 모바일 기기들은 콘텐츠 소비자를 실어 나르는 수송선 역할을 했다.

4. 해킹 당한 앱스토어, 새 생태계를 만들다

1984년 최초의 매킨토시 컴퓨터가 출시됐지만 잡스는 냉각팬이 작동하는 소리가 거슬린다며 이를 장착하지 않았다. 매킨토시는 금세 뜨거워져 툭 하면 전원이 나갔다. 소비자들은 자체적으로 뜨거워진 컴퓨터를 식혀주 는 ‘맥 굴뚝’을 만들었다. 다른 기업들과 상생하는 애플의 에코시스템(공 생 생태계)은 이때부터 생겨났다.

액세서리 시장이 꿈틀거렸다. 현재 미국에서 출시되는 대부분의 차량에는 아이폰을 충전할 수 있는 도크가 달려 있다. 많은 아이팟, 아이폰 이용자는 집에서도 스피커가 달린 도크를 이용한다. 애플의 한 내부인사는 “배터리 용 량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적어도 미국처럼 애플에 익숙해진다면, 언제 어 디서나 충전할 수 있기 때문에 배터리 용량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모든 크고 작은 파생시장은 결국 모든 것을 통제하고자 하 는 스티브 잡스의 욕심 때문에 형성됐다. 이는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다루는 방식과 무척 유사했다.

2007년 중순 아이폰이 출시되자 또 한 번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아 이폰으로 통하는 모든 데이터는 아이튠즈라는 동기화 프로그램을 통해 아이폰에 접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애플 마니아이자 컴퓨터에 능숙한 일 부 아이폰 구매자들이 해킹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아이폰에서 구동시키기 위해서였다.

애플은 아이폰에 제3자가 만든 앱을 넣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결국 백기를 들어야 했다. 해커들이 만든 대표적인 프로그램이 지금 아이폰의 대표적인 앱으로 자리잡은 ‘위치찾기’ 같은 것이었다.

2008년 2월 애플은 아이폰용 소프트웨어 개발도구인 SDK (Software Developer’s Kit)를 공개하고 누구나 앱을 만들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6개월 후 드디어 앱스토어가 문을 열었다. 앱의 진화는 스마트폰 시장의 성장을 이 끌었다. 앱스토어는 개발자들의 금광이었고 아이폰 이용자들의 놀이터였다. 잡스는 2000년 파워맥 큐브를 만들었다. 가로세로 높이가 20㎝인 투 명한 입방체 제품은 디자인, 성능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가 없었다. 하지 만 1년에 10만 대도 팔지 못했다. 첫 번째 맥처럼 냉각팬이 없는 조용하고 강한 제품이었다. 큐브는 2,000달러였다. 기존 애플의 프로페셔널용 제품 과 비교해 비싸지 않았지만, 주 고객인 그래픽 전문가들은 쉽게 업그레이 드할 수 있는 제품을 원했고 일반 사용자들은 조금 더 싼 제품을 원했다. 잡스는 1년 만에 큐브의 생산을 중단했다. 당시 잡스는 “독특한 이 컴 퓨터의 업그레이드가 진행될 수 있지만, 아직까진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큐브의 부활을 기대했지만 결국 그 제품을 다시 볼 수는 없었다.

5. 프레젠테이션의 마법

스티브 잡스의 최고 무기는 프리젠테이션이었다. 애플 제품을 소개하는 자리에는 항상 잡스가 있었다. 애플의 디자인을 책임지고 있는 조너단 아 이브가 “내가 디자인 한 제품을 잡스가 소개할 때면 상처를 받곤 했다”고 할 정도로 잡스의 프리젠테이션은 철저한 1인 체제였다. 그리고 그 만큼 효과를 봤다.

잡스는 건강 악화설로 애플 주가가 빠질 때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극적으로 등장해 신제품을 소개해왔다. 그만의 깜짝 쇼였다. 대중은 잡스 와 그가 들고나올 혁신적인 아이폰5를 학수고대 기다렸다. 그러나 10월 4 일 캘리포니아 쿠퍼티노의 애플 본사 강당에는 스티브 잡스도, 아이폰5 도 없었다. 8월 잡스 후임으로 애플의 사령탑을 맡은 팀 쿡 CEO는 기존 제품의 성능을 개선한 아이폰4S를 내놓으며 행사를 비공개로 진행했다. 기대 만큼 실망도 컸다. 애플 주가는 5%나 급락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아이폰4S가 (시장에) 감명을 주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영국의 IT 전문 컨설팅업체 ‘오범’도 “1년 동안 새 제품을 기다려온 애플의 충성고객들이 1년을 더 기다릴 수 밖에 없게 되었다”는 보고서를 냈다.

10월 6일 스티브 잡스는 췌장암으로 결국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아 이폰을 손에 쥐고 있을 370만 명의 한국 고객을 포함해 수많은 세계인들 에게 그의 죽음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이폰 4S가 ‘잡스의 유작’ 혹은 ‘4S(For Steve)’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잡스의 마지막 깜짝 쇼라도 된 듯 아이폰4S의 판매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탄생에서 애플 창업까지
스티브 잡스는 1955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대학원생 친부모로부터 태어난 그 는 세상의 빛을 보자마자 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됐다. 그의 친부모는 잡스를 입양 보내 며 대학에 보내달라는 조건을 걸었다고 한다. 잡스는 사과 등 과수원이 많았던 캘리포니아주 마운틴뷰에서 기계공인 양부모 밑에서 넉넉하지 않은 성장기를 보냈다.

그가 리드대학을 중퇴할 당시 마운틴뷰 인근에는 첨단기술을 연구하는 작은 회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스티브 잡스의 실제 고향이 실리콘밸리로 변신하고 있었다. 대학을 중퇴한 그는 그 때 음료수병을 주어다 판 돈으로 인도여행을 떠났다. 아타리라는 비디오게임 업체에 서 일하던 때의 일로, 그의 대단한 모험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잡스는 또 다른 천재 스티브 워즈니악을 만나 양부모 차고에서 PC를 만들어 애플이란 회사를 창업한다. 그리고 1983년 애플이 상장된 후 포춘 500대 기업에 오른 청년 사업가로 월스트리트의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된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경 마켓시그널

헬로홈즈

미미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