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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와 나

STEVE AND ME


포춘 기고가 브렌트 슐렌더 Brent Schlender가 스티브 잡스의 연대기 기록자 겸 절친한 친구로서 20년 넘게 수집한 잡스의 이야기와 개인 사진들 중 일부를 공개했다.
Photographs by brent schlender

스티브 잡스의 화려한 경력에 대한 심층 기사를 썼던 우리 기자들 중 대 부분은 우리가 하나의 현대적 신화를 만드는 일에 공모했음을 조만 간 깨닫게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잡스가 클루니처럼 카리스마 넘치고 마키아벨리처럼 교활했던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가 구축 하도록 우리가 일조했던 그 전설은 잡스의 자아 ego를 부풀리는 것 이외에도 많은 목적에 이용되었다. 그는 자신의 상상 속에서 넘쳐나 는 경이로운 새 기술 제품을 시장에 출시하기 위해서는, 그 세대의 특징이 될 디지털 혁명의 스벤갈리 Svengali *역주: 다른 사람의 마음 을 조종해 나쁜 짓을 하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가 되어야 한다 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건 어떤 의미에선 억누를 수 없는 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스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역시 불화와 모순으로 점철된 삶 을 살았다. 그는 보란 듯이 권위를 비웃었다. 그리고 극단적인 자기 훈련을 몸소 실천했다. 그는 바보들을 용인하지 않았지만, 그가 필요한 것을 가진 한 ‘멍청이’를 얻기 위해 자신의 매력을 발 산하기도 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볼 수 없는 큰 그림의 굵직한 획들 을 그릴 수 있는 최고로 세밀한 관리자였다.

정말 좋아했던 멋진 걸프스트림 제트기 외에는 어떤 것에도 결코 만족한 적이 없었지만, 그 는 아주 소박한 가정생활을 했다. 결혼 후 아버지가 되고 나서는 더욱 그랬다. 그는 굉장히 사적 인 사람이었지만,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했다. 그는 대부분 사람들보다 건강을 훨씬 더 챙겼지 만, 결국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마지막 아이러니는 그가 죽었을 때 여러 모로 완전한 경 지에 도달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그 과정에서 그는 가끔씩 다른 사람들을 아주 냉혹하게 착취했다. 마찬가지로, 우리 기자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의 명성과 카리스마를 이용했다. 그 러나 그가 떠난 지금, 우리 모두의 삶을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잡스가 그 자신을 소진했음을 쉽 게 알 수 있다.

슐렌더는 애플 공동 설립자 잡스를 인터뷰하거나 그가 등장하는 행사에 참석할 때, 종종 카메라를 들고 갔다. 여기 실린 사진은 슐렌더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작품으로 잡스의 사적인 모습을 잘 보여준다. 프리젠테이션을 하거나 공식 사진촬영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가끔씩 초대받는 외부인으로서 잡스와 알고 지낸 지난 25년을 되돌아보니, 그의 이야기에는 내 가 결코 말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었다. 그것은 개인적인 신뢰 때문일 수도 있고, 내가 알아낸 것들이 전형적인 비즈니스 분석 기사에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것은 일종의 관 찰과 경험담들로, 내가 보기에 신화라면 어쩔 수 없이 축소할 수밖에 없는 어떤 3차원성 threedimensionality과 깊은 인간성을 잡스에게 부여한 셈이었다.

실제 잡스의 전설은 지난 몇 년간 너무나 판 에 박힌 뻔한 이야기 같을 때가 많았다. 또 많 은 면에서 그는 그런 식을 좋아했다. 그의 이야 기를 전달하려면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결 국 기사를 쓸 때 가장 큰 문제는 그가 기사로 알리기로 선택한 것이 무엇이든, 컴퓨터 마우스 든,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든, 픽사 영화든, 그 것에 대한 열망을 펼쳐 보이는 그의 놀라운 능 력을 묘사하는 적절하고 독창적인 방법을 생각 해내는 것이었다. 잡스가 아직 20대이던 초창 기 때 그의 엔지니어 중 한 명이 그를 “걸으면 서 말하는 현실 왜곡의 장 reality distortion field * 역주: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믿게 만드 는 잡스의 능력을 일컫는 말”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싫어했던 그 말은 줄곧 그 의 이름 앞에 따라다녔다. 마찬가지로 “뻔뻔하 다”, “변덕스럽다”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악명 높은 까다로운 성격을 묘사할 때 매우 자주 사 용하는 표현이 되었다.

현실적으로 그의 재능과 괴팍함은 아주 다 양하고 상호 보완적이고 이례적이어서 그의 천 재성을 이해하고 묘사할 때 아주 재미있고 다양한 방법이 사용될 수 있었다. 로스 페로 Ross Perot는 그를 “내가 본 최고의 1인 밴드”라고 불 렀다. 비즈니스 전문가 짐 콜린스 Jim Collins는 그 를 “비즈니스의 베토벤”이라고 비유했다. 나는 몇 차례 포춘 커버스토리에서 애플의 잡스를 컴 퓨터 업계의 “수석 미학 담당 책임자”, 그리고 픽사의 잡스를 “가상 현실의 독창적 기획자”라 고 불렀다. 그리고 애플 성장에 터보 엔진 역할을 한 아이팟을 공개하기 전인 2000년대 초반.애플이 힘들었던 시기.에는 그를 “찌그러져가는 왕국의 늙어가는 왕자”라고 놀렸다. 사실, 그 기사를 본 “뻔뻔하고 변덕스 러운” 잡스는 곧바로 나에게 전화를 걸어 그걸 보고 얼마나 유쾌하게 웃 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정말이다.

스티브 잡스를 처음 만난 건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술 담당 기 자가 되어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으로 이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87년 2월이었다. 1985년 애플에서 쫓겨난 후 잡스가 “황야의 기간 wilderness period”초창기를 보낼 무 렵이었다. 몇 개월 만에 잡스는 일단의 애플 동료들을 고용해 새 컴퓨 터 회사를 창업했다. 사명은 절묘하게도 넥스트 Next였다. 1986년 그는 나중에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될 디지털 애니메이션 전문 회사 를 조지 루카스에게서 1,000만 달러에 충동적으로 인수했다. 정말 거 저나 마찬가지였다. 10년이 지난 1995년 상장되면서 결국 잡스를 억만 장자로 만들어 준 거래였다. (2006년 디즈니가 픽사를 인수하면서 잡 스가 디즈니 최대 주주 겸 이사가 되었을 때, 그의 주식 가치는 수십억 달러에 달했다.)

넥스트와 픽사를 홍보하고, 비즈니스 및 기술 석학으로서 자신의 신 뢰를 재건하기 위해 대중의 시야에 남길 원했던 잡스는 나와의 관계를 돈독히 했다. 그는 내가 월스트리트저널의 애플 취재 담당기자라는 사 실을 안 후 내가 정보를 교환하길 원할 때나 쿠퍼티노 Cupertino에서 일 어나고 있는 드라마의 진정한 역동성을 이해하기 위한 다른 경로가 필 요할 때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1989년 포춘으로 옮기기 전 나는 월스트리트저널에 넥스트와 픽사 에 대한 여러 개의 장편 기사를 썼다. 잡스와 나는 개인적으로 잘 맞는 것 같았다. 나이도 같고, 비슷한 청소년기를 보냈기 때문이기도 했다. 책, 영화, 음악에 대한 취향도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다. 몇 년이 지난 후 우리는 고등학교 때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잡스의 여동생인 소설가 모나 심슨 Mona Simpson과 거의 결혼할 뻔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상은 정말 좁다. (태어나자마자 입양된 잡스는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여동생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항상 기자였고 잡스는 취재원 겸 취재대상이었다. 나는 손에 잉크나 묻히는 기자 나부랭이였고, 그는 록스타였다. 무엇보다 그 는 그의 이야기가 가능한 한 많은, 가능한 한 최고의 청중들에게 들려 지기를 원했다. 나는 그렇게 해줄 수 있었다. 나는 그가 심지어 더 큰 것 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맨 앞자리를 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그래서 지난 20년간 우리의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관계의 가장 중요 한 목적은 언론적인 거래였다. 그리고 모든 거래가 그를 만족시킨 것은 아니었다.

나의 목표는 잡스를 만났을 때 그가 기조연설 모드에서 벗어나 비즈니스, 기술, 예술, 미디어, 정치 및 시사, 심지어 그의 개인사에 대해서까지 즉흥 적으로 대답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의 즉각적인 분석은 직설적이었지만, 그만큼 날카로웠다. 그럴 때면 그의 통찰력과 지성의 진정한 깊이를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적에 대한 그의 집착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민한 그의 머리를 돋보이지 않게 하는 위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식 인터 뷰를 하지 않는 시간에 잡스에게서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뉴욕 시 포춘 본사의 나의 상사들이 그를 인터뷰하는 나와 함께 가기 위해 시 간에 맞춰 출장을 올 정도였다.

현재 타임의 편집장인 존 휴이 John Huey는 2003년 쿠퍼티노에 있는 애플 본사에서 나와 함께 잡스를 만난 적이 있었다. 이 만남은 인터뷰 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우리의 모기업이었던 AOL 타임 워너의 문 제 해결을 위해 잡스의 조언을 듣기 위해서였다. 잡스는 못 믿겠다는 표 정으로 우리를 쳐다보고는 백미러로 사물을 보는 것이 얼마나 시간 낭 비인지에 대해 중얼거렸다. 그러곤 20분 동안 전화접속 인터넷 서비스인 AOL의 비즈니스 모델이 왜 부적당하며, 훨씬 더 전망 있는 광대역 비즈 니스 모델의 확장을 둔화시킬 수밖에 없는지를 방법론적으로 아주 자 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온라인 콘텐츠를 우편엽서 만들듯이 하는 AOL의 행태가 너무나 가망 없는 지난 세기의 방식이라고 신랄하게 비 판했다.



“글쎄, 이 말은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의미로 들리는데” 라고 휴이는 말했다. 그러자 잡스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나는 당신들 이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다만 관심이 없을 뿐이다” 라고 말했다. 그러곤 화이트보드로 걸어가서 15분 동안 그의 머리 위로 AOL을 미디어 회사로 만들기 위한 전략을 그려 나갔다. (그가 말한 전략 은 수년 후 타임 워너에서 분사한 AOL이.성공과 실패를 모두 경험하긴 했지만.결국 따르게 된 과정이었다.)

그는 “나라면 이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아까 말했듯이 나는 관심이 없 다” 며 쓰고 있던 마커의 뚜껑을 소리 나게 닫으며 말을 끝냈다.

가장 계몽적인 만남들은 잡스가 갑자기 나의 집으로 먼저 전 화를 걸어와 만난 경우였다. 그럴 땐 언제나 아주 구체적 인 목적이 있었다. 1995년 5월 어느 토요일 아침, 그는 전 화로 초등학교에 다니는 내 두 딸을 데리고 팔로알토에 있 는 그의 집으로 당장 와달라고 말했다. “오늘 아침 리드 Reed를 보살피고 있는데, 아이들에게 보여줄 멋진 것이 있다”는 말만 했다. 우리가 도착하자, 파란색과 빨간색 실크 스카프를 두른 채 “나는 마녀 다!!!”라고 외치는 세 살 난 리드 잡스가 부엌 문에서 우리를 맞았다.

아이들에게 튀긴 팝콘과 주스를 준 후, 잡스는 우리를 지하로 데리고 가서 비디오 테이프를 플레이어에 밀어 넣었다. 음악소리가 커지면서 영화 의 오프닝 크레딧 opening credit 같은, 읽기 어려운, 연필로 그린 스토리보드 *역주: 영화 등의 줄거리를 보여주는 일련의 그림이나 사진가 연이어 스 크린에 등장했다. 그리고 갑자기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컬러 애니메이션이 상영되었다. 그 영화는 겨우 절반 정도 완성되어 있었지만, 세 아이는 마 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그 영화에 빠져들었다. 사운드트랙은 완벽했지만, 그때까진 전체 장면들은 부분적으로만 애니메이션이었고, 여전히 스토리 보드 형태였다.

이것이 바로 6개월 뒤 개봉해 픽사를 세상에 알린 영화 ‘토이 스토 리’의 초기 컷이었다. 이사회도 이렇게 많은 장면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 나 이것이 스티브 잡스 스타일의 시장조사 방식이었다. 상영이 끝나자, 그는 (내가 아니라) 내 딸들에게 “어떻게 생각해? 포카혼타스만큼 좋 니?”라고 물었다. 그레타 Greta와 페르난다 Fernanda는 강하게 고개를 끄 덕였다. “그럼, 라이온킹만큼 좋니?” 페르난다는 대답하기 전에 잠시 생 각하더니 “토이 스토리를 5~6번 더 보기 전까지는 대답할 수 없어요” 라고 말했다.

잡스와의 만남은 항상 재미있지만은 않았다. 1995년 크리스마스 다 음 일요일에 잡스는 애플에서 펼쳐지고 있는 드라마의 배경에 대한 이 야기를 들려 주려고 나를 자신의 집으로 불렀다. 선 마이크로시스템스 나 필립스 NV가 어려움에 처한 애플을 인수하려 한다는 소문이 들리 던 때였다. 잡스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인 오라클의 설립자 겸 CEO 래 리 엘리슨과 함께 애플을 인수할지 심사숙고 중이라는 암시를 주었다. 그건 이상한 전략 같았다. 나는 그에게 문제를 만들려고 하는 것처럼 들린다고 말했다. 잡스는 그에 대해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라 고 대답했다. 그는 나에게 비밀유지 맹세를 하게 한 후 밖으로 나와 내 차까지 배웅해 주었다. 커브에 주차된 낡은 1976 도요타 셀리카 Celica를 본 그가 갑자기 멈춰 섰다. “아이들을 저 차에 태우고 다니지 않았으면 좋겠다! 농담 아니다. 그 차는 에어백도 없다. 폐차시켜버려라.”

1년 후인 1996년 말, 잡스는 엘리슨과 함께 애플을 인수하는 대신, 애플 CEO 길 아멜리오 Gil Amelio를 설득해 4억 달러에 넥 스트를 인수하게 하고 자신을 특별 고문에 앉히도록 했다. 그 리고 애플에 입성한 잡스가 쿠데타를 기획하고, 자신의 넥스트 팀을 경영진에 앉히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확히 7 개월이 소요됐다. ‘황야의 시기’가 끝나고 스티브 잡스 신화의 속편이 막 시작되려던 참이었다.

그 후로 7년간 나는 잡스의 변혁적인 리더십에 대한 4편의 커버스토리 를 썼고, 다른 기사들도 편집했다. 그는 포춘에 맥 OS X 운영체제를 최초 로 볼 수 있는 독점권한을 주었다. 그는 또한 맥월드 기조연설의 최종 리 허설 동안 자신이 얼마나 신경질적으로 변하는지 볼 수 있는 기회를 기자 로선 유일하게 나에게 주었다. 2001년 아이팟이 공개되기 수주일 전에 그 는 첫 아이팟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물론 보도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했다. 그가 그렇게 한 주된 이유는 그의 제품 소개 발표에 대한 내 생각을 알기 위해서였다. 그는 1년 후 아이튠스 뮤직 스토어 온라인 출범 전에도 포춘에 이 사실을 처음으로 공개해주었다.

그는 우리가 그에 대해 썼던 여러 이야기들 중 몇몇에 대해선 심각하 게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 불만을 맨 처음 듣는 사람은 나였다. 우리가 2001년 6월 ‘위대한 CEO, 연봉 절도의 내막 Inside the Great CEO Pay Heist’이라는 커버스토리의 이미지로 그를 사용했을 때, 그는 포춘 에 애플 광고를 영구적으로 게재하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나는 그 기사를 쓰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편집장에게 편지를 써서 그 기사가 불공정하게 그를 폄하하고 있다고 주장하라고 종용했다.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원한을 품지 않았다. 적어도 나에게는.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내가 다룬 여느 유명인보다 스티브 잡스에게 더 강 한 애착을 느낀다. 그처럼 나도 병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15년 전 나 는 첫 번째 심장마비를 겪었다. 그 소식을 들은 잡스는 내 병실에 전화를 걸어 오랫동안 담배를 피운 나를 호되게 나무랐다. 6년 전 인공심장판막 에 생긴 염증이 뇌척수막염으로 발전하면서, 나는 거의 사망 직전까지 갔 었다. 이로 인해 나는 청력을 상당부분 잃었다. 나는 5주 동안 병원에 있 었다. 내가 망상 증세를 보이고 있었음에도 잡스는 그때 두 번이나 병문안 을 왔다. 내가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써 주었 다. 그중에는 반복되어서는 안 될 빌 게이츠에 대한 농담도 있었다.

병석에서 돌아온 나는 ‘왜 어떤 기업가들은 심지어 자신들이 세운 기 업보다 더 빠르게 비즈니스 리더로서 성공하는가’라는 주제로 책을 쓰려 했다. 그래서 ‘파운더스 키퍼스 Founders Keepers’라는 책을 집필할 프로젝트 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잡스는 빌 게이츠, 마이클 델, 앤디 그로브와 함께 그 책의 주요 취재 대상이 되기로 동의해 주었다. 그들 모두 2008년 11월 말 실리콘 밸리에서 나와 만나 원탁 토론을 하기로 했다.

그 회의가 있기 1주일 전, 잡스는 우리 집으로 전화를 걸어 “이러고 싶진 않지만, 나는 그 회의에서 빠져야겠어”라고 말했다. 내가 끼게 된 보청기 때 문에 그렇게 들렸는지 모르지만,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잠겨 있었다. “내가 이 회의를 취소하는 이유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지 않을 거라 고 믿네. 진실을 말할게. 나는 확실하게 내 건강 문제의 진짜 원인을 알아내 야 해. 지금 나는 누굴 만날 상태가 아니야. 그리고 추수감사절 후에 장기 병가를 낼 거야.” 3주 후 그는 간 이식수술을 받았다. 우리는 그 후에 몇 번 밖에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그리고 3년 후 그는 우리 곁을 떠났다.

스티브 잡스는 분명 기자들에게 꿈의 인터뷰 상대이자 살아 있는 전 설, 프리마돈나였다. 그는 자신이 원할 때는 은근한 매력을 한껏 발산하기 도 하고,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심통 난 불평꾼이 되기도 했다. 그 는 가족을 사랑했다. 그렇다. 그는 실제 삶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 러나 삶이 그를 저버렸다. 바꿔 말하면 그 역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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