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경원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교수
사진 한국일보 DB
플루이딕 스컬프처라는 디자인 키워드가 현 대자동차의 제품 전체로 번져 개성 있는 아이덴티티가 형성되고 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형태’를 의미하는 이 새로운 개념이 적용된 디자인은 적절한 운동으로 단련된 보디빌더의 근육 을 연상시켜 부드럽지만 강인한 힘을 느끼게 해준다. 원가 절감에 만 치중해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자동차 메이커는 결코 시도하기 쉽 지 않은 것이 바로 플루이딕 스컬프처이다. 다소간의 비용 상승을 감내하면서 따뜻한 감성이 통하는 아이덴티티를 형성하는 디자인 전략을 과감하게 추진하는 것이 최근 현대자동차 디자인경영의 힘 이다. 이와 같은 노력은 전 세계 시장, 특히 미국 시장에서 커다란 호응으로 보상받고 있다.
플루이딕 스컬프처의 의미
플루이딕 스컬프처는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개념이다. 하지만 이는 자동차 디자인에서 지난 100여 년간 이어져온 직선과 곡선의 교차 현상과 깊은 연관이 있다. 1900년대 초반에는 자동차들이 거의 모 두 마차처럼 ‘상자갑’ 같은 직육면체 형태를 띠고 있었다. 단단한 강 판을 다루는 기술이 모자라 곡선 차체를 만드는 것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30년대에 접어 들어서야 제조기술이 발달하 면서 ‘유선형 streamline’ 디자인 바람이 불었다. 1950년대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자동차가 점점 대형화되었고, 날개 모양의 꼬리날개 tail pin 를 다는 등 비행기 형태를 닮아가기 시작했다.
1970년대부터는 치솟는 유가에 따른 에너지 절약 요구가 커지면 서 골프와 포니처럼 각진 형태의 소형차들이 나타났다. 1980년대 에는 주행할 때 공기 저항을 최소화하도록 디자인된 ‘공기역학적 디 자인 aerodynamic design’이 경쟁적으로 개발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다시 상자 형태의 디자인이 나타나는 등 각 메이커의 디자인 전략에 따라 다양한 스타일이 공존하고 있다.
현대자동차의 플루이딕 스컬프처는 유선형이나 공기역학적 형 태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특성을 가진다. 유선형은 ‘눈물 방울’처럼 부드럽고 감성적인 곡선 형태를 의미하며, 공기역학적 형태는 기술 적으로 속도와 에너지 효용성을 높이는 데 중점을 둔다. 플루이딕 스컬프처는 감성과 기술을 융합해 유기적인 형태를 창출하는 디자 인 혁신 전략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매출증대로 이어진 독창적인 디자인
현대자동차 하면 ‘포니’를 연상하는 사람들이 많다. 1967년에 설립 된 현대자동차는 1976년 국내 최초 승용차인 포니를 개발했다. 파 워트레인과 플랫폼은 미쓰비시에서 들여왔지만, 포니는 세계적 인 자동차 디자이너인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이끄는 ‘이탈디자인 ItalDesign’이 독자 모델로 만든 차량이었다. 외국 부품의 조립 수준에 머물고 있던 우리 자동차 산업의 낮은 역량과 우수한 산업디자인 인 력이 없었던 당시 상황에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현대차의 기술과 디자인 역량은 매우 빠르게 성장했다. 신속히 사내에 디자인 전담부서를 설치하고 자동차 디자인 방법론 과 노하우를 축적해 1980년대 말부터는 독자적으로 디자인을 개발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이탈디자인과 현대의 디자인팀 이 각각 개발한 스쿠프(1990년 2월 출시)의 디자인 품평에서 현대 팀의 제안이 선택될 정도로 디자인 수준이 높아졌다. 이후에도 자 체 디자인한 아반테, 소나타, 그랜저 등 후속 모델들이 국내외 시장 에서 호평을 받으며 매출 신장에 크게 기여했다.
비근한 예로 최근 북미에서 ‘개성을 중시하는 젊은이들의 첫 차’ 로 각광받는 벨로스터를 보면 현대차의 디자인 파워를 실감할 수 있 다. 플루이딕 스컬프처의 특성이 잘 반영된 벨로스터는 시대를 앞 서가는 감각으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불룸버그통신의 제이슨 있다.
하퍼는 “벨로스터에 비하면 혼다 시빅은 신석기 시대의 유물처럼 느껴진다”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미국에 첫 출시된 지난 9월에 834 대가 팔린 벨로스터는 한 달 만에 판매량이 3,724대로 급상승했다.
연공서열 파괴와 디자인
현대자동차의 디자인 개발을 주도하고 있는 디자인센터는 경기도 남양만에 자리 잡고 있는 연구개발본부에 소속되어 있다. ‘인간중 심의 가치경영 실현’이라는 현대차의 경영 이념과 같은 맥락에서 디 자인센터는 ‘고객을 위한 디자인 혁신’을 목표로 삼고 있다. 디자인 센터는 기획과 개발 업무가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디자인기획지원 팀, 스타일링 실무팀, 글로벌 디자인 TFT, 감성디자인실 등 1실 8팀 제로 운영되고 있다. 미국, 유럽, 중국의 디자인센터에선 현지 고객 의 요구에 부응하는 모델 개발과 정보 수집을 하고 있다.
현대차 디자인센터에선 오래 근무한 디자이너들을 우대하는 이 른바 ‘연공서열’이 사라진 지 오래다. 디자이너들이 창의적인 아이 디어를 지속적으로 발굴할 수 있도록 해외 명소는 물론 서울의 대 학로, 홍대 앞, 가로수길 등에서 근무하는 ‘디자인 아웃 핏터 Design Outfitter’ 제도도 운영하고 있다. 또한 독창적인 디자인의 개발에 기여 한 디자이너들에겐 인센티브 제공과 인사 고과 반영 등으로 강한 동 기유발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
차가운 쇠에 따뜻한 감성을 입힌다
‘플루이딕 스컬프처’를 앞세워 혁신적인 디자인 개발을 진두지휘하 고 있는 디자인센터장은 오석근 부사장이다. 서울대 미대에서 산업 디자인을 전공한 오 부사장은 1984년 울산의 현대자동차 디자인실 에 입사한 이래 28년 동안 한길을 걸어온 ‘현대 맨’이다. 오 부사장 은 1989년 회사의 지원으로 미국 아트센터 디자인대학(ACCD)에서 수학했다. 로스앤젤레스 북미 디자인센터와 프랑크푸르트 유럽 디 자인센터에서 수석디자이너로 일하며 세계 최고 수준의 디자인역 량과 감각을 익히기도 했다.
1990년대 초반 현대차 최초의 콘셉트카 ‘HCD 1’을 개발한 오 부 사장이 ‘플루이딕 스컬프처’를 현대차 디자인 전략의 핵심으로 이끌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의선 부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기아차에서 디자인경영으로 큰 성과를 거둔 경험이 있는 정 부 회장은 2009년 8월 현대차에 부임한 이후에도 새로운 디자인경영 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외국 슈퍼 디자이너를 영입하는 대신 현대 차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국제적인 경험도 많은 오 부사장 을 중용해 큰 성과를 내고 있다. 정 부회장의 디자인경영 스타일은 한마디로 ‘디자인 지향적인 의사결정 Design-Oriented Decision Making’이다. 제품은 물론 기업 이미지와 브랜드 관리에서도 디자인을 다른 어떤 요소보다 중시함으로써 독자적인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고 있기 때 문이다. “단단한 쇠가 따뜻하게 느껴지도록 하라”는 정의선 부회장 의 특별한 당부가 제품은 물론 기업 이미지와 브랜드 디자인에도 녹 아 들어 새로운 현대차의 아이덴티티가 숙성되고 있는 것이다. 창 립 40여 년 만에 ‘빠른 추종자 Fast Follower’에서 ‘트랜드 주도자 Trend Initiator’로 변화하며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로 성장하고 있는 현대 자동차의 무서운 상승세는 바로 디자인 혁신 경영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정경원 교수는...
한국디자인진흥원 원장을 역임한 바 있는 정경원 교수는 국내 산업디자인 분야를 대표하는 최고 전문가 중 한 사람이다. 현재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서울시 문화관광디자인본부장(부시장)을 역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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