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견이 없는 1등을 부를 때 '최고' 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그런 점에서 파텍 필립은 의심할 여지 없는 최고의 명품 시계다. 최고와 최고는 통하기 마련이다. 사회 각층 최고의 유명인들이 사랑한 파텍필립의 브랜드 스토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정운섭 기자 sup@hk.co.kr
보석 하나 박히지 않은 손목시계가 경매에서 66억 원에 팔렸다. 2010년 제네바 포시 즌즈 호텔에서 열린 크리스티 경매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 믿기 어려운 소식의 주인공은 파텍필립이 1943년에 생산해 현재 단 두 개만이 남아 있 는 시계 '크로노그래프 1527' 이다. 파텍필립은 매년 세계 각국 경매 장에서 시계부문 최고가를 경신하며 몸값과 위상을 높이고 있다.
1999년 소더비 경매에선 1933년 제작된 18K 골드 시계가 1,100 만 달러(약 123억 원)에 낙찰됐다. 1951년 제작된 한 시계는 23억 원 에, 1939년 제작된 한 시계는 45억 원에 팔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값어치가 떨어지는 일반적인 여느 기계와는 달리 파텍필립의 기계식 시계는 오래될수록 오히려 가치가 높아지는 골동품 같은 특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그래도 자그마한 손목시계 하나가 수십억대가 넘는 가격 에 팔리는 광경은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도대체 어떤 가치를 지녔 기에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파텍필립과 경쟁 관계에 있는 브랜 드 관계자는 말한다. "물론 최고의 기술력이 집약된 시계 자체가 갖 는 가치도 있겠지만, 업계 1인자가 갖는 브랜드의 절대적인 파워가 주효하게 작용했다고 봅니다. 최고는 무조건 파텍필립이라는 인식 이 있으니까요. 최고는 유니크합니다. 경매에서 최고가로 낙찰되는 제품 역시 다른 브랜드에서는 찾을 수 없는 그런 특별함을 가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명품시계라고 다 똑같은 명품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세계 시계 업계에는 누구나 인정하는 엄연한 서열이 있다. 역사와 전통, 기술 혁신, 인지도, 예술성 등을 기준으로 최정상급 브랜드를 따진다. 하 지만 평가 기준에 따른 점수가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관점에 따라 순위를 놓고 의견이 달라지기도 한다. 바쉐론 콘스탄틴과 브레게가 그렇다. 어느 브랜드를 2위로 볼 것인가에 대 해선 늘 다른 관점이 존재한다.
하지만 파텍필립은 아무도 이견을 달지 않는 'No.1' 브랜드다. 파 텍필립이 최고로 인정받는 이유 중 하나는 대를 이어온 가족 경영의 역사가 지닌 가치다. 1839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시작된 파텍필립은 1932년 현 오너인 티에리 스턴의 증조부인 장 스턴이 인수한 이후 4 대째 독립 가족경영을 이어오고 있는 유일무이한 기업이다. 스와치 그룹과 리치몬트그룹, LVMH그룹 등 거대 명품시계 그룹이 벌이는 치열한 시장 경쟁 속에서도 세계 최고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오로지 품질만을 위해 달려온 파텍필립의 장인정신이 있 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파텍 필립 창업자 앙투안 노르베르 드 파텍은 1839년 러시아의 강압 통치를 받던 폴란드를 떠나 스위스로 건너 온 망명객이었다. 스위스에 정착한 젊은 망명객은 당시 나라 전체를 들썩이게 했던 시계 산업에 주목했다. 그는 시계 장인 프란시스체크 차펙과 손잡 고 1839년 제네바에 시계 상회 '파텍 차펙' 을 설립했다. 하지만 둘의 만남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업 방향에서 이견을 보였던 차펙이 6년 도 되지 않아 회사를 떠난 것. 차펙이 떠난 자리는 또 다른 시계 장 인 장 아드리앙 필립이 채워주었다. 1844년 파리 박람회에서 금상 을 차지한 실력파 기술자였다. 파텍은 회사 이름을 두 사람의 이름 을 딴 파텍필립으로 바꿨고, 이후 두 사람은 수많은 걸작품으로 파 텍필립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1846년 처음으로 독립 분침을 시계에 적용했다. 2년 후에 는 자동 태엽을 개발해 정확도를 높였다. 품질에 대한 이들의 고집 과 명성은 금세 유럽 전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851년 이 신생 브랜드에 날개를 달아준 특별한 계기를 맞았다. 영국의 빅토 리아 여왕이 런던의 한 전시회에서 금상을 받은 파텍필립 시계를 구 입한 것이었다. 이는 유럽의 왕가와 당대의 귀족, 그리고 유명인사 와 시계 수집가들에게 최고의 브랜드로 인정받게 되는 중요한 디딤 돌이 되었다.
파텍필립의 기술 혁신 행보는 하이엔드 워치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1845년 미닛 리피터를 탑재한 회중시계를 최초로 출시했다. 미닛 리피터는 소리로 시간을 알려주는 최고급 시계 기술이다. 이 후에도 용두로 시간을 조정하는 와인딩 시스템을 특허 출원한 것을 시작으로 세상에서 가장 작은 시계, 광전자 시계, 원자력 시계 등을 선보이며 시계 산업의 역사를 새롭게 써나갔다.
특히 시계기술의 척도를 보여주는 시계 무브먼트를 직접 생산하 면서 명성을 쌓았다. 무브먼트는 시계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을 만 드는 장치다. 손으로 태엽을 감는 기계식 수동 무브먼트, 태엽을 감 지 않아도 되는 기계식 자동 무브먼트, 그리고 건전지를 넣는 자동 시계인 쿼츠 무브먼트가 있다. 그중 기계식 무브먼트는 고도의 기 술력이 요구되는 특별한 장치로, 오늘날까지도 기계식 무브먼트를 직접 생산해 시계를 만드는 회사는 손에 꼽을 정도다.
이브 카바디니 파텍필립 부사장은 말한다. "파텍필립의 기술은 이제 세계 고급 시계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지난 2009년 탄생한 파 텍필립 실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이는 그 어느 공식 실보다도 최고의 품질을 증명하는 인증입니다."
파텍 필립의 기술력과 디자인은 과거 제네바 실 스탬프를 획득하 는 것으로 그 완성도를 증명했었다. 제네바 실은 세계 최고의 시계 임을 인증하기 위해 매년 1만 개가 넘는 시계들을 심사해 단 10개에 게만 부여하는 품질 보증서이다.
제네바 실은 파텍 필립의 뛰어난 기술력을 증명하는 기술 표준 역할을 했다. 제네바 실 마크를 파텍필립의 로고로 착각하는 사람 들이 많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그런 제네바 실을 거부하고 독립적인 기술 표준인 파텍필립 실을 만들어 낸 건 그만큼 파텍필립 의 자존심이 높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끊임 없는 기술 혁신과 품질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는 파텍 필 립의 정신은 수많은 유명 인사들을 마음을 매료시켰다. 로마 교황 들을 비롯해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마리 퀴리, 러시아 최고의 작곡가 차이코프스키,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등 수많은 유명 인사들이 파텍필립의 마니아가 되었다.
파텍필립은 돈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살 수 있는 시계가 아니었 다. 인기 있는 시계를 구입하기 위해선 본사 직원과 몇 번의 인터뷰 를 거친 후 짧게는 몇 달에서 길게는 몇 년씩 기다려야 한다. 강력한 인지도를 바탕으로 생겨난 브랜드 파워는 파텍필립이 글로벌 시계 브랜드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현재 파텍필립은 전 세계 60개국에 450개의 공식 매장을 가지고 있다. 연간 1,500만 개의 부품과 약 4만5,000개의 시계를 생산한 다. 자체 개발한 23개의 기본 칼리버와 50가지 무브먼트를 갖추고 있다.
"단독 매장 오픈으로 한국 시장 본격 공략"
카바디니 파텍필립 부사장 인터뷰
파텍필립이 한국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서울 압구정동 갤러리아 명품관에 정식으로 단독 부티크를 열고 본격적인 시장 개척에 나선 것. 파트너는 서울 강남지역 딜러로 선정된 국내 최대 시계 수입업체 우림FMG다. 그동안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시계 매장에 쇼파드와 함께 입점했던 파텍필립이 국내에 단독 매장을 열고 한국 시장 공략에 닻을 올린 것이다. 다음은 이브 카바디니 파텍필립 부사장과 가진 서면 인터뷰 내용이다.
새롭게 단독 부티크를 열게 된 배경은?
파텍필립이 아시아 시장에 진출한 지는 매우 오래되었다. 한국에 입성한 지도 20년이 넘었다. 하지만 솔직히 시장 개척을 많이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전반적인 수요가 생산을 초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경우 기존 매장위치가 서울 및 한국시장에 최적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새롭게 강남에 부티크를 개장하게 됐다.
한국 시장에 투자를 감행한 이유는?
지난 5~10년을 돌이켜보면서 한국 시장이 많이 성숙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소비자들의 시계에 대한 지식수준 또한 매우 높아졌다. 한국 소비자들은 기계식 시계 및 컴플리케이션 시계에 대해 더 많은 투자를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 명품 시계에 대한 수요 확대가 이루어질 수 있는 시점에 왔다는 게 우리의 판단이다.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파텍필립은 가족소유의 독립기업이다. 가문의 목표는 늘 많은 시계 전문가들로부터 '파텍필립 시계가 세계 최고' 라는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항상 기업의 초점은 품질이었다. 1839년부터 이어져 온 최고의 전문성과 품질관리는 어떠한 것과도 타협하지 않는 파텍필립의 고집이 있었기 때문에 이룰 수 있었던 명성이라고 생각한다.
기술 전승과 발전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나?
파텍필립은 진정한 시계제작자로서 디자인에서 생산, 유통에 이르기까지 시계를 만드는 모든 과정을 직접 통제하고 있다. 아직도 수백 년간 사용해온 전통 기술과 도구 등이 칠보작업 및 각인작업 등에 변함없이 활용되고 있다. 연구개발실 소속 40명 이상의 연구원들이 새로운 기술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새로운 시계 및 칼리버 개발, 무브먼트 신뢰성 개선 등에 꾸준히 접목되고 있다. 현재까지 75건 이상의 특허를 획득했다는 사실이 회사의 이러한 노력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