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 소재 사설식품연구소 매트슨의 바브 스터키 박사는 필자에게 불투명한 필름에 싸인 으깬 감자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상온 상태의 슈퍼마켓 진열대에 보관해도 수개월간 신선도가 유지되며, 포장을 개봉해 데우면 즉시 섭취가 가능한 으깬 감자 요리를 개발해 달라는 미국감자협회(USPB)의 요청에 따라 만든 시제품이었다. USPB에 더해 가공식품 제조기업 호멜도 소고기와 으깬 감자, 미트볼, 크림소스에 버무린 파스타로 구성된 즉석조리식품을 상온에서 1년 이상 보존 가능한 방법 개발을 의뢰한 상태다.
이곳의 연구자들은 지금껏 냉동요리, 분말형 즉석 케이크, 샐러드드레싱, 살사 소스 등 2,000종 이상의 장기보존식품을 개발해냈다.
하지만 상온의 진열대에서도 부패하지 않는 식품은 전혀 차원이 다르다. 냉동이나 캔과 병에 봉입하는 등 손쉬운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장기 보존성을 확보해야하기 때문이다.
물론 보존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다. 식품을 완벽히 멸균해서 밀봉하면 된다. 진짜 문제는 맛에 있다. 멸균을 하면 음식의 풍미와 식감, 영양소도 함께 떨어지는 것. 일례로 미 식품의약국(FDA)이 승인한 가장 보편적 살균기술인 레토르트(retort)는 압력용기에 식품을 넣고 122℃로 가열, 미생물을 박멸한다. 그러나 이 기술을 적용한 호멜의 소고기 즉석요리는 냄새가 애견용 통조림과 비슷해 입맛을 떨어뜨린다.
이에 메트슨의 연구자들은 추가적인 조미(助味)를 통해 레토르트 공법을 사용하고도 감칠맛이 도는 식품의 개발에 역점을 두고 있다. 이와 관련 선임 식품공학자 캔디스린 박사는 즉석 으깬 감자 요리를 통해 레토르트 공법의 한계를 보여줬다. 그녀의 작업대에는 거품기, 우유 혼합 크림 등 익숙한 주방용품들이 잔뜩 놓여있었는데 그들 사이에는 '아황산수소나트륨', '치킨 구이맛 조미료-실험용' 등의 라벨이 붙은 생소한 병들이 다수 섞여 있었다.
린 박사는 감자의 껍질을 벗겨서 냄비에 찐 다음 으깨서 믹싱볼에 담았다. 그리고는 우유 혼합 크림과 버터, 소금, 후추 등의 조미료를 첨가해 버무렸다. 완성된 으깬 감자는 고소한 버터 맛이었고 감칠맛도 좋았다.
다음 공정은 멸균. 린 박사는 전처리를 위해 레토르트용 비닐 파우치에 으깬 감자를 담아 옆방의 연구실로 가져갔다. 그곳에는 훈제기, 오븐, 와플 틀, 튀김기 등 필자가 아는 거의 모든 식품 가공용 기기가 있었다. 그녀는 진공포장기를 활용, 파우치 내부의 공기를 제거하고 불활성 질소를 채워서 밀봉한 뒤 증류기가 있는 파일럿플랜트로 향했다.
"대형 통조림 스프 공장의 증류기도 이거랑 비슷하게 생겼어요. 50배쯤 더 클 뿐이죠."
증류기에 물과 파우치를 넣고 1시간 정도를 기다리자 온도계가 212℃를 가리켰다. 바로 박테리아가 사멸하는 온도다.
이렇게 모든 작업을 끝낸 파우치 하나를 뜯어보니 파우치에 담기 전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맛은 전혀 아니었다. 처음에 느꼈던 신선한 맛과 향은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물에 젖은 종이를 씹는 듯했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밀폐식 고열 조리 이후의 무미건조한 맛을 '레토르트 맛(retort flavor)'이라 부른다.
"상온의 진열대에서 1년 이상 버티려면 음식을 완벽히 멸균해야 해요. 하지만 멸균을 거친 음식은 개 사료 같은 맛이 나기 십상이죠."
보존 처리
식품의 장기보존에는 대형 압력용기로 가열 멸균하는 레토르트 공법이 주로 활용된다.
스터키 박사에 의하면 레토르트 맛은 음식에 감춰져 있던 맛이다. 향기로운 휘발성 향미에 눌려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 레토르트 공정에 의해 저분자량의 향미가 파괴되면서 표면화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풍미를 좋게 만들 수 있을까. 가장 간단한 방법은 소금과 지방을 듬뿍 넣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소비자들로부터 외면 받기 십상이다. 그래서 등장한 게 린 박사의 작업대에서 봤던 특별한 조미료들이다.
그녀는 윅슨이라는 회사의 흰색 가루 조미료를 쓴다. 이를 으깬 감자에 소량 넣으면 레토르트 맛이 억제된다고 한다. 또한 유제품 감미료 전문 기업 에드롱의 제품은 레토르트 공법을 이겨내고 버터 맛을 유지시켜준다.
편리함의 부작용
즉석 식품은 편리하다. 하지만 그 대가로 맛은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른다.
이에 필자는 지난 1년간 보관했던 으깬 감자 파우치를 꺼내봤다. 조미를 완료한 제품이었지만 우중충한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흰색을 유지시켜주는 아황산수소나트륨의 부족 때문이었다. 전자레인지에 데운 뒤에는 질감이 점토질에 가깝게 변했고, 맛도 갓 만든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린 박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비자의 구매 욕구를 자극할 수 있는 맛과 외관, 풍미를 가졌다고는 보기 어려웠다.
나폴레옹 레시피
레토르트 공법은 17세기 나폴레옹의 군대가 사용했던 식품 살균법과 별반 다르지 않다.
사실 식품 본연의 맛을 빼앗은 뒤 첨가물을 넣어 맛을 되살리는 현재의 과정은 그리 똑똑한 행태로 보이지 않는다. 레토르트 공법이 1810 년경 나폴레옹의 군대가 사용했던 멸균법과 다르지 않음을 알면 더 그렇게 느껴진다. 그리고 최근에는 레토르트보다 뛰어난 멸균법들이 개발되고 있다. 프랑스 식품기업 크노르가 즉석 수프 제조공정에 도입한 전류(電流) 살균법이 그 실례다. 이 방식은 레토르트보다 수프 속 야 채를 단단하고 맛있게 보존한다.
문제는 식품업계의 보수성 때문에 신기술들이 정착하기까지 수십 년은 걸린다는 부분이다. 적어도 한동안 즉석식품은 편리할 뿐 맛은 없을 확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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