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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vs 중소기업] 기술혁신의 주체는?

언제나 기업의 규모는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규모가 크다는 사실 하나가 강점으로 작용, 글자 그대로 '큰' 성과를 내면서 찬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중소기업 시장을 침식해 사회의 공적(公敵)이 되기도 한다. 과연 큰 것이 좋을까, 아니면 작은 것이 좋을까.

다윗과 골리앗을 생각하면 작은 쪽에 한 표를 던지고 싶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헤비급과 라이트급의 대결에서 이왕이면 헤비급이고 싶은 게 모든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그렇다면 기술혁신도 큰 기업이 주도할까?


송경모 뿌브아르경제연구소장, 경제학 박사 kyungmo.song@pouvoir.co.kr

근대 경제학의 시조 아담 스미스는 대기업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지만 관료와 연합해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상인이나 담합을 통해 이윤 높이는 업자들을 대단히 증오했다. 그가 자유무역을 주장한 것은 오늘날 일부 논객들이 매도하는 것처럼 무한경쟁을 옹호하고 대기업을 편들어서가 아니다. 시장의 크기를 증가시키면 분업을 활성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분업과 경쟁이 활성화되면 기득권에 기대서 이익을 챙기는 상인들의 입지가 좁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스미스가 1776년 내놓은 '국부론'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스미스에게 대기업 문제가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이유는 명확하다. 그가 살던 시대에는 소위 '큰' 기업이 없었다. 증기기관과 대량 생산 공장 체제가 영국에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국부론이 출판된 이후의 일이다.

이전까지의 회사들은 기껏해야 가족회사나 소규모 사업자 정도였다.

시계를 앞으로 돌려 19세기 중반으로 옮겨도 마찬가지다. 당시 칼 마르크스의 절친이었던 엥겔스는 영국 맨체스터에 대규모 방직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직원은 300명에 미치지 못했다. 그 시절에는 초대형 규모였을지 몰라도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대기업 근처에도 못 가는 중견기업 수준이다.

불편한 진실
기업 규모가 비로소 관심이 대상이 된 것은 그로부터 100년 뒤 근대 경제학을 다시 중흥시킨 신고전학파의 창시자 알프레드 마샬에 이르러서다. 그는 1890년 발간한 저서 '경제학원론'에서 이른바 '규모의 경제'를 논했다. 기업이 상품을 많이 제조·판매할수록 단위당 고정비가 줄어들면서 단위당 평균비용이 낮아진다는 이 논리에 의하면 당연히 대기업일수록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다시 100년이 지난 1981년 두 명의 경제학자, 즉 노스웨스턴대학의 존 판자르 박사와 프린스턴대학 우드로 윌슨 공공국제정책대학원의 로버트 윌리그 박사는 '범위의 경제'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이는 한 기업이 여러 종류의 물건을 동시에 생산할 경우 각 물건을 서로 다른 기업이 하나씩 만들 때보다 평균비용이 줄어드는 현상을 말한다. 서로 유관한 다수의 제품을 생산하면 기술과 장비, 인력 등을 공유해 비용절 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범위의 경제 논리에 입각하더라도 유리한 것은 항상 대기업 쪽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이렇듯 현실에서 대기업이 가진 비교우위가 얼마나 확실했던지 혁신이론의 선구자 조셉 슘페터조차 중소기업이 듣기에 꽤 불편한 말을 했다. 저서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서 그는 대기업의 기술혁신이 경제를 주도한다고 밝혔다. 대기업은 독점적 이윤 창출을 통해 중소 기업에 비해 기술개발에 필요한 자금의 안정적 확보가 용이한데다 인력과 설비의 확보 측면에서도 크게 앞서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는 다시 말해 대기업만이 규모의 경제 효과를 만끽할 수 있으며 전문경영자에 의한 조직적이면서도 전략적인 연구개발 기획이 가능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현대 경영학의 원조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 역시 슘페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탓에 재차 중소기업의 가슴에 못을 박는 얘기를 했다.

2001년 우리나라에도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된 '프로페셔널의 조건'에서 규모가 작은 벤처기업이 기술혁신을 주도한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다. 벤처기업은 일정 부분을 개선할 수 있을 뿐 근본적 혁신을 꾀할 수는 없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에 따르면 벤처기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불확실성을 품에 안은 채 수행하는 기술혁신보다는 창조적 모방 전략이나 톨게이트 전략이 더 적합하다. 여기서 전자는 창의적 사고를 바탕으로 이미 존재하는 거대 시장에 약간의 개선을 가해 기존 기업들과 차별화된 형태로 시장을 공략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크게 눈에 띄지 않는 특수한 시장에 진출, 그 시장에서 없어서는 안 될 특수부품이나 서비스를 취급하는 것을 뜻한다. 톨게이트는 고속도로 인프라 전체로 보면 보잘 것 없는 요소일지 몰라도 모든 차량이 반드시 그곳을 지나고, 반드시 돈을 지불해야한다는 점에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기술혁신은 대기업의 전유물?
2000년대 후반 세계 IT 업계의 선두주자로 등 극한 삼성전자의 활약은 앞서 말한 슘페터 효과에 힘입은 것이라 볼 수 있다. 2000년대 들어 D램 산업에서 벌어들인 현금으로 차세대 반도체, 대형 LCD 및 LED 모니터, 디지털 TV 등의 연구개발에 과감하게 선투자한 것이 제대로 효과를 냈다.

이처럼 과감한 선투자는 충분한 내부자금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쉽사리 실행에 옮기기 힘든 전략이다. 자금이 있더라도 상환해야하는 외부차입금이 많다면 성패가 불확실한 고위험 연구개발 투자에 도박을 할 수 없다.

안타깝게도 슘페터가 밝힌 불편한 진실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것이다. 실제로도 삼성전자의 회사채 발행은 2004년 10월 이후 사라졌다.

그동안 D램 사업 등에서 기존의 회사채를 모두 상환하고도 남을 만큼 많은 현금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필자는 2000년대 초반에 벤처기업 신용평가 업무를 수행하면서 다양한 벤처기업들의 명멸을 지켜봤다. 많은 기업들은 실험실에서 구현된 기술의 위력만을 믿고 시장에 뛰어들었다.



스스로 진정한 기술혁신의 선도자라고 자부했으며 실리콘밸리 기업들의 전례를 지켜보면서 그들의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벤처캐피털들은 군말 없이 돈을 투자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떤가. 세계 최초, 세계 최고를 내세웠던 무수한 엔지니어 출신 창업자들은 어느 날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다. 기술력을 인정받은 몇몇 회사들조차 핵심기술을 대기업에 빼앗기고 문을 닫았다.

오히려 이런 피비린내 나는 상황 속에서 살아남은 기업들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창조적 모방 기업과 톨게이트 기업들이었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현재 대기업으로 도약해 있기까지 하다.

만일 기술력과 가능성을 가진 벤처기업들이 충분히 시장을 창출하고 적극 공략할 수 있을 정도의 자금력, 즉 매출 없이 몇 년을 버티면서 마케팅에 돈을 쏟아 부을 자금력을 갖추고 있었더라면 그처럼 허무하게 사라지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벤처캐피탈과 개인투자자들은 그 정도로 너그럽지 못하다. 가뭄에 비 오듯 찔끔찔끔 돈을 주는 것은 당연하고, 그나마도 절대로 오래 기다려 주지 않는다.

따라서 이 같은 상황을 만들려면 내부에서 창출된 넉넉한 자금이 뒷받침 돼야 하는데 이 정도 호사를 누릴 수 있는 벤처기업은 거의 없다. 결국 창조적 기술혁신이 큰 이익이라는 열매를 맺도록 시장을 조성할 수 있는 능력은 하루하루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벤처기업으로서는 웬만해선 넘볼 수 없는 산이다.

오늘날의 '개방형 혁신'은 큰 것을 부수고, 그 자리를 점점 작은 것들이 채울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다.



네트워크가 해답이다
독일 출신의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는 1973년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성장주의에 찌든 대기업적 사고방식을 비판했다. 성장 중심의 철학이 야기한 에너지 문제와 환경 문제, 인간성 말살 문제를 집중 거론한 것.

주장의 타당성은 일단 논외로 치더라도 당시의 지배적 정서를 차지했던 큰 기업이 아닌 작은 조직들이 주도하는 세계를 그렸다는 측면에서 이 책은 전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마샬 또한 큰 기업에 유리할 수밖에 없는 경제 원리를 설파하는 동시에 작은 기업들을 위한 탈출구를 제시한 바 있다. '집적의 경제'가 그것이다. 관련기업들이 인접 지역에 모여 있으면 멀리 떨어져 있을 때와 비교해 생산비용이 훨씬 절감된다는 경제 원리로서 오늘날 '클러스터 이론'의 원조이기도 하다.

벤처기업의 한계를 직시하고 그에 맞는 생존전략을 제시했던 드러커도 다르지 않았다.

작은 기업들에게 희망적으로 들릴만한 전망을 내놓았다. 그는 한때 대규모 조직으로 갔다가 다시 지식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작은 조직들로 이행하는 역사의 메가트렌드를 직시할 것을 강조했다.

미국 경제가 19세기 말에서 20세기로 넘어가면서 드러난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는 대기업 조직의 등장이었다. 카네기, 록펠러, 포드, 모건 같은 인물들이 모두 19세기 말부터 전성기를 구가했고, 오늘날의 대기업 시대를 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군대식 거대 위계 조직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위계적 대기업 모델은 모든 나라의 모방 대상이 됐다.

그러던 중 20세기 중반 GM의 전성시대를 열었던 경영자 알프레드 슬론이 GM에 분권화 제도를 도입했다. 대기업이 군대식 위계 조직에서 탈피, 사업부제를 도입한 효시였다. 이후 곳곳에서 권한 이양과 사업부제가 보편화됐고,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 급기야 아웃소싱이 일반화 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현재 많은 조직들은 예전 같았으면 내부에서 처리했을 업무들을 하나 둘씩 외부 조직에 맡기고 했다. 조직의 운영이 점차 원자화, 네트워크화 되는 추세인 것이다. 작은 조직들에게 있어 이는 큰 혜택이다. 따라서 여기에 적극 부응해야 한다.

기술혁신을 위한 연구개발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예전처럼 대기업이 자체 보유한 거대 연구조직을 가동, 모든 것을 해결하는 전통이 아직 남아있으며 그것을 통해 큰 성과를 내기도 하지만 한편에서는 중소기업, 대학, 연구소와 네트워크를 결성해 수행하는 공동연구 비중이 늘고 있다.

지난 2010년 삼성경제연구소의 자료에 따르면 과거의 혁신적 발명 중 단독 개발한 과제의 비중은 1975년~1970년을 1기, 1990년~1994년을 2기, 2005년~2009년을 3기라고 했을 때 각각 81%, 72%, 62%로 감소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개방형 혁신'은 큰 것을 부수고, 그 자리를 점점 작은 것들이 채울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다.

아직 갈 길은 멀다. 기술혁신의 전 사이클 중에서 씨앗 단계만을 생각할 경우 작은 기업의 네트워크로도 어느 정도는 목표 달성이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열매, 즉 개발이 완료된 기술로 시장을 창출해서 현금을 벌어들이는 문제로 넘어가면 얘기는 전혀 달라진다. 거기서부터는 전략 수립과 집행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대두되고, 과실이 맺힐 때까지 버틸 수 있는 자금의 확보가 최소한의 선결요건이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작은 조직들의 반란은 그냥 제스처로만 끝날 공산이 크다. 수많은 기술사업화 과제 중에서 대부분의 소규모 조직 간 네트워크가 최종적인 성공으로 이어지지 못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중소기업들은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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