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엄청난 폭발이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4호 원자로를 박살내면서 2,000톤의 콘크리트 덮개를 샴페인 코르크마개 터지듯 날려버렸다. 그리고 이와 함께 뿜어진 노심 용융물들이 주변 건물에 쏟아지며 화재를 일으켰다. 노심 잔해들은 이후 10일간 끊임없이 불탔고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400배에 달하는 방사능 동위원소를 품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이때 발생한 방사성 낙진은 기류를 타고 지구의 절반을 오염시켰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기억은 아련해져갔다. 그러나 지난해 거대한 쓰나미가 일본 후쿠시마 원전을 덮치며 당시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전문가들은 후쿠시마의 경우 노심 용융까지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 주장했으나 결국 3기의 원자로가 노심 용융을 일으켜 일본 국토와 주변 바다를 방사능으로 오염시켰다.
두 사고 사이에는 25년이라는 시간 차이가 있다. 길게 느껴질지 몰라도 노심 용융 사고의 빈도는 이보다 훨씬 짧다. 실제로 원자력 업계는 '원자로 누적 운전 연수(reactor year)'라는 단위로 안전 상태를 계량화하는 데 미 원자력규제위원회(NRC)의 미국 내 원자로 안전기준은 1만 운전 연 수당 사고 1건 이하다. 또한 물리학자이자 미 천연자원보호협회(NRDC)의 자문인 토머스 코크런 박사에 따르면 전 세계 모든 경수로의 사고발생 주기는 1만1,500 운전 연수당 1건이며 지금껏 총 5건의 부분적 노심 용융 사고가 발생했다. 후쿠시마 원전 3건을 포함, 미국 스리마일섬 원전과 구 동독의 그라이프스발트 원전 사고가 그것이다. 다만 그는 구 소련이 설계한 원자로 중 현재 가동 중인 것이 극소수라는 이유로 체르노빌 사고는 계산에 넣지 않았다.
"5건이라는 숫자는 역사적으로 전체 경수로의 1%에서 부분적 노심 용융 사고가 일어났다는 뜻이에요. 1%는 분명히 1만 운전연수당 1건보다 훨씬 높은 수치임에 틀림없죠."
현재 세계 각국이 운용 중인 경수로가 총 353기임을 감안할 때 코크런 박사의 1% 법칙이 맞는다면 평균 6년마다 한번씩 노심 용융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 역사적 관점에서 체르노빌 사고는 점차 증가하는 노심 용융 사고의 첫 신호탄에 불과하며 인류는 원자력 사고에 대처하는 방법을 이제야 이해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노심 (reactor core, 爐心) - 원자로의 중심부이자 핵분열 반응이 이뤄지는 부분.
2. 카드로 쌓은 집
일본의 응급 복구요원들이 과열된 후쿠시마 원자로의 상태를 안정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안 지구 반대편 우크라이나의 건설 노동자들은 오랫동안 이어진 체르노빌 사고 현장 정화작업의 새로운 단계를 시작하고 있었다. 4호 원자로의 잔해를 덮고 있던 철근 콘크리트 무덤 주변에서 방사능에 오염된 토양을 불도저로 밀어버리는 것이었다.
방공호라는 의미의 '쉘터(Shelter)'라고 불리는 이 무덤은 일종의 차폐 시설이다. 15년간 방사성 물질의 배출을 막도록 설계됐지만 수명이 10년이나 더 지난 지금도 원자로를 감싸고 있다. 필자는 이곳의 관리책임을 맡은 '차폐시설 시행계획(SIP)'의 선임기술자문인 에릭 슈미먼을 쉘터로부터 수백m 떨어진 SIP의 사무동 건물에서 만났다. 그는 쉘터가 단 6개월 만에 완성됐다며 건설과정을 설명해줬다.
"북쪽의 벽은 원전의 잔해물을 채워 넣은 콘크리트를 쌓아 만들었고, 남쪽 벽은 강철판을 대들보에 기대서 세웠죠. 지붕 역할을 하는 강철판의 경우 어떤 고정 장치도 없이 중력의 힘에 의지해서 벽 위에 올려놓은 것뿐이에요. 게다가 모든 작업은 크레인으로 수행했을 뿐 쉘터 위에 올라가서 작업이 제대로 진행되는지 확인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죠. 단적으로 말해 이 시설은 '카드로 쌓은 집'이라 할 수 있어요."
36만7,000㎥의 콘크리트와 7,300톤의 강철이 투입된 쉘터가 아직도 서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중력과 마찰력, 그리고 행운 덕분이라는 얘기다.
또한 소련 노동자들이 처음 공사를 마쳤을 때 쉘터에는 커다란 구멍이 잔뜩 나 있었다. 그 구멍으로 빗물이 새면서 강철 빔들을 부식시켰고 새들이 들락날락하며 방사성 물질을 사방으로 전파했다. 구 소련 붕괴 후 쉘터의 관리는 우크라이나에 인계됐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우크 라이나는 시설을 보수할 전문인력도, 돈도 없었기 때문이다.
급기야 선진 7개국(G7)은 1997년 쉘터의 전면 재보수를 결의했다. 여기에는 벽에 뚫린 구멍의 봉쇄, 지붕 교체, 서쪽 벽과 통기구의 안정성 확보, 감시 장비 설치 등이 포함됐으며 SIP가 각 프로젝트의 감독을 맡기로 했다.
이 보수공사의 가장 본질적 목적은 향후 진행될 철거 작업의 안전성 확보다. 이와 관련 13억 달러나 되는 비용을 들여 마지막으로 수행될 작업은 바로 '신규 안전 격납시설(NSC)', 약칭 '뉴 쉘터(New Shelter)'의 설치다. NSC 건설이 완료되면 기존의 쉘터는 외부환경과 완벽히 격리된다.
NSC의 설계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슈미먼은 그동안 전 세계에서 가장 까다롭기로 유명한 엔지니어링 문제들을 해결해냈지만 NSC야 말로 자신이 만난 최고 난이도의 프로젝트라고 말한다.
"NSC는 크기와 용도, 건설 현장의 위험도 등 모든 면에서 전례가 없는 시설이에요. 아마도 고대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건설해야했던 엔지니어들의 심정이 저와 똑같았을 겁니다."
"아마도 고대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건설해야했던 엔지니어들의 심정이 저와 똑같았을 겁니다."
3. 귀신같은 존재
먼지만큼 이동능력이 뛰어나고 인체 내에 손쉽게 침투할 수 있는 물질도 없다. 이와 관련 체르노빌에서는 아직도 방사능에 오염된 먼지들이 SIP 근무자들을 위협하고 있다. 때문에 모든 건물의 출입구에는 방사능 탐지기를 설치, 출입자들의 손과 발에 묻었을지도 모를 방사성 먼지를 스캔하고 있고 청소요원들은 밤낮없이 물걸레로 바닥을 닦는다. 또한 살수차들은 수시로 NSC 공사현장을 돌며 물을 뿌려 먼지 날림을 막고 있으며 누구도 거리를 배회하는 고양이를 만지거나 데려다 키우지 않는다.
도둑고양이들의 털에는 세슘 137, 스트론튬 90, 플루토늄 239 등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묻어 있는 탓이다.
여기에 더해 요오드 131도 체르노빌 사고에서 방출된 고위험 방사성 동위원소의 하나로 일반적인 요오드처럼 인간의 갑상선에 쌓여 갑상선 암 발병률을 높이지만 반감기가 8일로 짧아서 사고 후 몇 주만에 안전한 수준으로 붕괴됐다.
반면 세슘과 스트론튬은 생태계 유지를 위한 필수적 광물인 칼륨과 칼슘을 모방하여 토양과 수자원, 동물과 인간의 체내에 수십 년간 쌓여 있다. 방사능 오염 지역에 가면 방사능을 측정하는 가이거 계수기의 바늘이 급격히 올라가는데, 그 주원인이 바로 세슘의 붕괴다. 핵무기의 주 원료인 플루토늄의 경우 체르노빌 지역의 방사능 수치 증가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체내 유입 시 치명적이다. SIP의 생체의료 프로젝트 매니저 마크 피시번은 이렇게 경고한다.
"방사성 물질들은 호흡, 섭취, 주사 등의 방법으로 체내에 유입될 수 있습니다. 이런 체내 유입에 비하면 방사능에 피폭되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닐 정도에요."
구체적으로 체르노빌 4호 원자로의 핵연료는 노심 용융 과정에서 철근 콘크리트를 1.2m나 뚫어버렸을 만큼 고온의 슬래그로 변했다. 이 슬래그는 증기파이프를 타고 여러 층 아래의 바닥으로 용암처럼 흘러 내려 검은색 덩어리가 돼서 굳었는데 과학자들은 이를 '핵연료 함유물질 (fuel-containing materials, FCM)'이라 부른다.
"4호 원자로의 잔해 아래에 이 같은 초고방사능 FCM이 200톤이나 묻혀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플루토늄 계열 핵연료 먼지의 산실이에요."
그래서 현 쉘터의 지붕에는 다수의 노즐이 설치돼 있으며 1년에 한 번씩 화학 정착액을 분사, 먼지의 비산을 막고 있다. 이렇듯 위험천만한 공간인지라 4호 원자로의 대다수 공간은 외부인들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다. 하지만 필자는 특별히 원자로 제어실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좁고 어두운 통로를 지나자 공상과학 영화 '스타 트렉'의 세트장 같은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 안에는 회색 금속판이 덧대어진 반원형 벽면 앞에 검은색 스위치가 잔뜩 달린 커다란 콘솔 3개가 있었다. 25년 이상의 세월을 증명하듯 곳곳에는 적색의 화학 정착액과 먼지가 뒤엉켜 말라붙어 있었고 아날로그 계기판 몇 개를 제외한 모든 장비는 철거된 상태였다. 필자는 방호복을 입고 있었지만 SIP의 안내자는 어디에도 손을 대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플루토늄 때문이었다.
제어실을 포함, 쉘터 내부의 잔해 중 과학자들이 탐사한 지역은 전체의 3분의 1뿐이다. 지하실에 위치했던 방의 상당수는 무릎 깊이의 물속에 잠겨 있는데 이 물이 증발할 경우 FCM이 산화되면서 방사능 먼지들 이 공기 중으로 비산된다. 과학자들은 뉴 쉘터 건설 노동자를 위협하는 이런 물질이 약 33톤 존재한다고 추산하고 있다.
"미세한 먼지 입자들은 중력에 의해 가라앉지 않고 공기 중에 계속 떠 있어요. 정말 큰 문제죠. 만일 쉘터가 무너지기라도 하면 방사능 먼지 구름이 대재앙을 일으킬 겁니다. 일단 수천 명의 체르노빌 현장 노동자들이 연간 방사능 노출 허용한도의 25배에 이르는 방사능에 노출될 수 있어요."
물론 SIP가 안정화 작업을 실시하고 있어 쉘터의 붕괴 위험은 낮다. 하지만 먼지는 여전히 중대한 위험요인이다.
"방사능 먼지는 마치 귀신같아요. 뉴 쉘터 건설을 위한 모든 요소, 모든 단계에서 항상 대두되는 필수 고려사항입니다. 어떻게 먼지의 확산을 막을지 반드시 계획을 세워야만 해요."
"미세한 방사능 먼지 입자들은 중력에 의해 가라앉지 않고 공기 중에 계속 떠 있어요. 정말 큰 문제죠."
더 어려운 일
체르노빌 4호 원자로의 건설은 어려웠다. 하지만 그 잔해의 철거는 훨씬 더 어렵다.
4. 최적의 균형점
한때 우크라이나 정부는 쉘터의 측면에 구멍을 뚫어 FCM에 접근하려 했다. 그러나 현명한 엔지니어들이 쉘터의 불안정성을 제기, 무모한 도전을 막아냈다.
현재 쉘터의 붕괴, 노동자들의 방사능 피폭, 방사능 먼지의 확산 없이 FCM을 제거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통제 가능한 환경에서 쉘터를 단계적으로 해체하는 게 그것이다. 그리고 뉴 쉘터가 바로 그런 환경을 제공해 줄 것이다.
다만 주지하다시피 뉴 쉘터의 공사는 결코 간단치 않다. 당초 완공예정일이 올 4월이었지만 건설계약을 수주한 프랑스의 노바카 컨소시엄은 이제야 막 정지공사를 마쳤고 준공일은 2015년 12월로 연기됐다. 그나마 SIP의 최고책임자인 라우렌 도드 박사는 연기된 일정조차 준수하기 어렵다고 본다.
도드 박사의 사무실에는 컴퓨터 시뮬레이션한 뉴 쉘터의 조감도가 걸려 있다. 외관이 반원형 군용 막사를 닮은 뉴 쉘터는 폭이 256m며 길이가 146m, 높이는 105m나 된다. 쉽게 말해 자유의 여신상을 한가운데 세워놓은 미식축구 경기장을 덮을 수 있는 수준이다.
구 소련 엔지니어들은 쉘터의 건설에 표준형 크레인을 이용했지만 이의 해체에 나선 우크라이나 엔지니어들은 트러스 크레인을 사용, 쉘터의 지붕을 케이블로 연결해 들어 올릴 계획이다. 이 크레인에는 카메라와 매니퓰레이터 암, 드릴, 잭 해머, 유압 전단기, 10톤급 진공청소기, 50톤급 승강장치(hoist) 2대가 달려있다.
향후 크레인 기사들은 방사능 차례처리가 된 제어실에서 쉘터의 지붕을 철거하게 된다. 이때 가장 어려운 공학적 난관은 FCM 먼지가 비산되지 않도록 쉘터 내 20만㎥ 공간의 공기를 순환시키는 환기장치의 개발이다. 또한 이와 동시에 쉘터의 내부 공기는 비구름이 만들어지지 않을 만큼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지하실의 물이 비구름으로 변하면 강철 골조가 녹슬 수 있다.
덕분에 슈미먼은 지구 기후와 반도체 청정실 연구용으로 개발된 소프트웨어를 활용, 거의 수백만 번의 시뮬레이션을 해야 했다. 쉘터 내의 습도를 제어하면서 먼지 한 톨도 날리지 않는 최적의 균형점을 찾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사실 뉴 쉘터 건설과 관련한 가장 스마트한 결정은 설계에 있지 않다. 4호 원자로에서 서쪽으로 270m 떨어진 곳, 즉 오염이 적은 곳에 뉴 쉘터를 짓기로 한 데 있다. 노바카 컨소시엄을 제외한 다른 기업들은 기존 쉘터 위에 뉴 쉘터를 짓고자 제안했지만 그곳의 방사선량은 매우 높다. 때문에 작업팀의 근무 가능시간이 짧아져 더 많은 노동자가 필요하고, 이는 비용 증대로 이어진다. 반면 현 방식은 이 문제에서 다소 자유롭다. 뉴 쉘터의 건설이 완료되면 열차처럼 2개의 레일을 따라 4호 원자로로 이동, 현 쉘터를 대체하게 된다.
안전 커버
뉴 쉘터는 자유의 여신상을 세워놓은 미식축구 경기장을 덮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하다. 구조물이 완성되면 레일을 따라 이동, 4호 원자로를 밀폐한 뒤 원격조종 크레인을 통해 잔해물이 해체된다.
5. 28명과 100만명
체르노빌 원전의 버스 투어 승객들은 쉘터에서 400m 떨어진 주차장의 가장자리에 있는 방문자 센터를 꼭 들려야 한다. 이곳에서 노바카의 뉴 쉘터 홍보영상을 볼 수 있는데 영상이 끝날 무렵 뉴 쉘터가 4호 원자로를 덮는 순간 기존 쉘터 위로 뻗어 나온 통풍용 굴뚝이 마법처럼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SIP는 2014년까지 이 굴뚝을 완전히 철거할 예정이다. 그러나 그 작업은 홍보영상에서처럼 간단치 않다. 도드 박사는 이를 SIP가 해야 할 가장 위험한 작업으로 꼽을 정도다. 실제로 26년간이나 방사능 에어로졸을 내뿜어온 4호 원자로의 굴뚝은 높이가 40층 빌딩을 능가하고 무게도 300톤이 넘는다. 또한 불안정한 쉘터 위에 서 있다. SIP의 현장작업 전문가 마샤 브라운은 이렇게 표현했다.
"굴뚝을 7등분해서 한 토막씩 철거할 계획이에요. 그런데 철거 중 굴뚝을 원자로 위에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많은 작업자들이 방사능에 피폭 됩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상황이죠."
그렇다. 제일 조심해야할 부분은 작업자들의 피폭이다. 굴뚝 주변의 방사선율은 시간당 10밀리시버트(mSv)로 매우 높다. 이에 SIP는 작업자의 안전을 위해 쉘터의 지붕으로 연결되는 방사선 차폐 통로 구축을 검토 중에 있지만 굴뚝을 절단해야 하는 작업자는 방호복을 입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고(高) 방사선 피폭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은 세계2차대전 당시 일본 원폭 피해자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비교적 잘 정리돼 있다. 일례로 10시 버트(Sv)에 피폭되면 치사율이 100%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도 체르노빌 사고의 방사능 피폭 사망자 28명이 사고 초기에 과다한 감마선에 노출돼 숨진 것으로 추정한다. 다행히 체르노빌 사고 이후 치사량의 방사선에 피폭돼 숨진 사람은 아직 없지만 안심은 금물이다. 유엔(UN)은 2005년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치사량 이하의 저 방사선에 피폭된 체르노빌 피해자 중 4,000여명이 향후 암에 걸려 사망할 것으로 내다봤으며 최근 미국 뉴욕과학아카데미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연구결과들을 분석한 논문에서 체르노빌 사고에 따른 사망자수가 무려 100만명에 육박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런 사실은 우리가 저(低) 방사선 피폭의 인체 영향에 대해 너무나 무지함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전 세계 어느 원자력 규제기관도 인체에 안전한 방사선량을 정확히 규정하고 있지 못하며 방사선 연간 허용 기준치는 국가마다 제각각이다. 후쿠시마 사고 당시 일본 정부는 원전 노동자들의 방사선 허용 기준치를 기존의 두 배 이상으로 높이기도 했다. 단순히 신속한 사고 수습을 위해서 말이다.
다행히 우크라이나의 방사선 허용 기준치는 세계에서 가장 엄격하다. 미국보다 30mSv나 낮은 연간 최대 20mSv에 불과하다. 물론 SIP와 노바카 컨소시엄의 입장에서 이 규정의 준수는 큰 도전과제다. 굴뚝 해체 노동자의 경우 별도의 차폐시설 없이는 단 2시간 만에 허용치를 넘어설 수 있는 탓이다.
더욱이 현 기술로는 특정 형태의 방사선 피폭량만 예측이 가능하다.
굴뚝 같은 고정된 건물의 방사선 수치는 잘 파악돼 있는 반면 방사성 먼지나 에어로졸에 의한 피폭량은 정확한 계산이 어렵다. 따라서 모든 작업자들은 방사선량계를 착용해야 함은 물론 콧물, 소변, 대변을 제출해 방사선량을 늘 점검해야 한다.
방사선율 (radiation dose rate) - 1시간당 흡수되는 방사선량의 비율.
병든 바람
원전 3호기가 폭발했던 2011년 3월 14일의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모습.
6. "이곳의 사람들은 규칙만 잘 만들어요."
작년 봄 노바카의 근로자들은 잡초가 무성하던 쉘터 서쪽의 평야를 공사장으로 바꿔놓았다. 방사능에 오염된 표토를 제거하고 깨끗한 흙을 깔아 지면에서 발산되는 방사선량을 줄였으며 이곳과 쉘터를 잇는 길이 450m의 도랑도 두 개 팠다. 이 도랑에 스테인리스 레일을 설치, 뉴 쉘터가 이동하게 된다.
이후 여름까지는 레미콘 차량과 덤프트럭이 공사장을 누비고 다녔다. 또 도랑에 396개의 쇠말뚝을 박는 유압식 해머의 소음이 하루 종일 울려 퍼졌다. 각 쇠말뚝은 길이가 24m, 직경이 90㎝로서 3만2,000톤의 뉴 쉘터를 지탱하게 된다. 도드 박사의 말이다.
"도랑을 파고, 쇠말뚝을 박는 작업에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됐죠. 땅을 파면 항상 뭔가가 나왔거든요. 사고 이후 파묻은 크레인과 트럭도 나왔고, 가끔은 FCM이 모습을 드러내 식겁하기도 했답니다."
특히 '뜨거운 입자(hot particle)'라고 불리는 고방사성 핵연료가 나올 때면 전문작업자가 이를 제거할 때까지 인근의 모든 작업이 중단됐다. SIP의 보건·안전관리자인 돈 켈리는 이렇게 전했다.
"핵연료를 제거하면 방사선량이 아주 빠르게 떨어집니다. 하지만 그 곁에 가까이 있거나 주머니에 집어넣기라도 하면 즉각 방사성 연기가 뿜어져요."
그는 매주 공사현장을 점검하며 카메라로 안전규정 위반사례를 촬영해 기록하는데 작년 9월 필자는 그의 점검을 따라 나선 적이 있다. 도랑을 따라 걷던 우리는 거대한 코르크따개 같은 장비로 도랑에 구멍을 뚫고 있는 중장비를 만났다. 그 옆에는 로더가 이 구멍에서 나온 물이 뚝뚝 떨어지는 흙과 돌을 덤프트럭에 옮겨 싣고 있었다. 이를 본 켈리가 갑자기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뭐가 잘못됐냐고 묻자 그는 덤프트럭을 가리키며 말했다.
"트럭에 아무런 표식이 없네요."
이곳의 방사성 폐기물 운반규정에 따르면 모든 트럭은 비방사성 폐기물용 혹은 방사성 폐기물용으로 구분, 오직 해당 폐기물만을 실어야 한다. 그리고 교차 오염을 막기 위해 각 트럭의 차체나 뒷문에는 반드시 어떤 용도의 차량인지 명기돼야 한다.
용도 표시가 없는 그 트럭은 이동을 하면서 도랑 언저리에 폐기물을 잔뜩 흘리기까지 했다. 켈리는 도랑에서 파낸 폐기물을 실험실로 보내 분석을 의뢰했고, 오염도가 낮은 비 방사성 폐기물이라는 답변을 받고는 안도했다.
"이곳의 사람들은 규칙을 잘 만들어요. 하지만 잘 지키지는 못하죠. 분명 지킬 수 있는데도 말이에요."
로더 (loader) - 흙, 모래, 골재 등을 옮기는 데 쓰이는 건설장비.
7. "죽기밖에 더 하겠어!"
작년 봄 뉴 쉘터 건설에 필요한 정지작업을 끝낸 작업자들은 두 개의 도랑에 들어갈 콘크리트 침목의 제작에 들어갔다. 또한 침목 사이의 8만 3,600㎡ 면적에 콘크리트 바닥을 깔았다. 이 위에서 뉴 쉘터가 건설되는 것이다.
켈리는 콘크리트 바닥의 경우 방사능 오염 우려가 전혀 없다고 밝혔다. 때문에 여기서 작업할 때는 방호복을 입을 필요가 없다. 방사성 에어로졸이 날아올 것에 대비해 방독면만 휴대하면 된다.
이 같은 철저한 대비 덕분인지 노바카 측이 체르노빌 현장에 파견한 650명의 직원 중 지금껏 규정 이상의 방사선에 노출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도드 박사가 처음 이곳을 찾았던 1994년만 해도 안전관리가 형편없었다는 점에 비춰보면 매우 의미 있는 결과다. 당시 대다수 사람들은 방호장비조차 없었으며 원전 인근 건물의 출입구에 설치된 방사능 탐지기는 고장난 상태였다. 작업자들은 사고 후 유령도시가 된 프리피야트의 시립 수영장에서 태연히 수영을 즐기기도 했다.
SIP가 안전장비를 지급한 후에도 작업자들의 행태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SIP는 작업복에 방사선량계 부착을 의무화하고, 한도 이상으로 방사선에 노출된 사람은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도록 조치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작업자들은 집에서 직접 납 상자를 제작, 방사선량계를 보관 하는 방식으로 방사선 노출량을 줄였다.
"정말 미친 짓이었지만 작업자들의 태도는 마치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하겠어!'라고 말하는 듯 했어요."
2년 전에는 공사장 인근에 늑대 한 마리가 나타난 적이 있다. 이 늑대는 6명의 작업자들이 옷을 갈아입고 있던 탈의실 입구에서 서성거렸다.
사람이 사라진 체르노빌 거리에서 늑대, 멧돼지, 사슴 등의 야생동물 출현은 드문 일이 아니지만 야생동물의 번성은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방사능에 오염된 먹이를 먹은 동물들이 공사장 곳곳에 배설을 하면서 작업자들의 피폭 가능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늑대는 탈의실 침입을 시도하고, 앰뷸런스에 덤볐으며, 개 한 마리를 물어 죽였다. 누군가 휴대폰으로 이 상황을 촬영, 유튜브에 올렸다. 이를 보면 탈의실 속 사람들은 문을 열고 늑대에게 휘파람을 불며 자극했고, 다른 작업자에게 등을 떠밀린 두 명이 늑대를 구석에 몰아넣고 삽과 산소통으로 때렸다. 하지만 늑대가 구석에서 탈출하자 모두 놀라 흩어졌다. 이후 경비원들이 늑대를 추적해 사살했지만 체르노빌 작업자들의 안전 불감증이 여실히 드러난 사건이었다.
"사고가 일어난 지 26년이 흘렀지만 전 하루하루가 두려워요. 두렵지 않다면 바보일 겁니다."
8. 후쿠시마 사고가 일깨워준 사실
체르노빌 작업자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은 안전책임자인 알렉산드르 노비코프다. 필자는 원전 철거 노동자들과 프리피야트 주민들을 위해 조성된 소도시 슬라보티츠의 레스토랑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더듬거리는 영어로 쉘터 내부에 잔존하는 위험요소에 대해 역설했다.
"사고가 일어난 지 26년이 흘렀지만 전 하루하루가 두려워요. 두렵지 않다면 바보일 겁니다."
그는 1년 전에 있었던 사례도 들려줬다. 어느날 한 엔지니어가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와 요오드 131 감지 센서가 경보음을 울렸다는 소식을 전해왔단다. 이는 쉘터 내부 어딘가에서 제어불능의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였다.
"4호 원자로 내부의 FCM은 핵분열성 물질이므로 콘크리트 덩어리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핵 연쇄반응을 일으킬 수 있어요. FCM은 폭발하지는 않지만 엄청난 열과 방사능을 뿜어내 콘크리트 바닥을 녹여버립니다. 특히 이 단계에서 물과 접촉할 경우에는 증기폭발 또는 수소폭발로 이어져 쉘터 전체를 날려버릴 수 있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노비코프는 온몸에 두려움의 전율이 퍼졌다고 한다. 그는 엔지니어에게 원전 내의 모든 핵물질을 점검하는 한편 분광 분석 결과를 초초하게 기다렸다.
"분석 결과, 그 요오드 131은 체르노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후쿠시마에서 날아온 것이었죠."
1986년 방사선량 계측사로 체르노빌에 투입된 이후 체르노빌은 그의 인생 자체가 됐다. 때문에 체르노빌에 대해 얘기할 때면 그는 철학자로 변한다.
"체르노빌 사고는 인류 전체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해요. 많은 사람들은 뉴 쉘터가 완성되면 체르노빌 문제가 모두 해결될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노비코프는 쉘터의 해체와 FCM 회수는 별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실무자 수준의 문제일 뿐이며 진정한 문제는 시간이라는 입장이다.
사실 핵폐기물과 방사능 폐기물은 결코 정화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드럼통과 콘크리트 박스에 넣어 이곳저곳을 전전하던지, 땅 속에 묻고는 철조망을 치고 사람들의 접근을 영원히 막아야 한다. 뉴 쉘터는 100년을 버틸 수 있도록 설계됐지만 100년 뒤에는 또 다른 엔지니어들이 더 새롭고 안전한 쉘터를 지어야 하는 것이다. FCM의 활용 방안을 찾지 못하는 한 이 굴레를 벗어날 길은 없다.
"체르노빌은 우크라이나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구 소련의 문제도 아니고요. 이는 전 세계의 문제입니다. 이 사실은 후쿠시마가 재차 일깨워주지 않았습니까?"
Story by Steve Featherst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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