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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진단기기의 과학화 응답하라! 21세기

ORIENTAL MEDICINE DIAGNOSIS

한의학은 질병의 진단에 있어 서양의학에 비해 의사 개인의 경험과 판단이 크게 작용한다. 눈으로 살펴보고, 증세를 물어보고, 맥을 짚어보는 등 진단 기법 자체가 의사의 주관적 능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때문이다. 하지만 한의학이 세계화되기 위해서는 진단의 객관성과 정확성이 확보돼야 하며, 이를 위해선 측정 신뢰성이 높은 다양한 한방진단기기가 개발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대덕=구본혁 기자 nbgkoo@sed.co.kr


● 윤상협 경희대학교 한방병원 내과 교수는 위(胃) 관련 질환의 최고 권위자 중 한명이다. 양방에서는 위 질환이 의심되면 내시경으로 내부를 직접 관찰하며 진단하지만 윤 교수는 내시경의 사용을 생각해 본적도 없다. 한의학의 원리에 맞는 진단 장비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윤 교수는 위장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는 생물학적 측정장비를 직접 개발해서 쓰고 있다. 이 장비는 환부를 절개하거나 장비를 삽입하지 않고 오직 위장에서 나는 소리만으로 위장의 움직임을 그려낸다.

● 김윤희 대전대학교 한방병원 소아과 교수는 청진기로 환자를 진단한다. 양방에서 한의사의 사용을 제지하기도 했던 다소 껄끄러운 진단도구지만 소아는 의사소통이 어려워 청진이 진단에 큰 도움을 준다는 게 김 교수의 판단이다. 또한 청진기 외에도 X레이, 혈액검사 등 좋은 진단 기법이 있다면 한방과 양방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활용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


최근 초음파 장비의 사용을 둘러싸고 양방과 한방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양방 의사들은 한의사의 경우 초음파 장비의 사용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분명한 불법의료행위라 주장하고 한의사들은 지난해 개정된 한의학육성법에 적시된 '한방을 기초로 하여 과학적으로 응용·개발한 의료행위'에 속한다고 항변한다.

이 같은 두 진영의 충돌은 사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수년전부터 양방에서 활용하는 현대식 의료기기의 이용을 놓고 이와 유사한 공방이 지속되고 있다. 공세를 주도하고 있는 양방 의사들은 현대식 의료기기가 양방의 의학적 원리에 기초하고 있는 만큼 인체와 질병을 바라보는 근거가 다른 한방 의사들이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반면 한의학계는 치료가 아닌 한의학적 진단에 활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역의 구분이 불필요하다고 피력하고 있다.

오랜 시간 결론이 내려지지 않은 것은 의사와 한의사의 진료범위가 법적으로 명확히 규정돼 있지 않은 이유도 크다.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는 수백 가지 이상의 의료기기와 시술도구에 대해 일일이 사용기준을 만드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한다. 특히 양측의 이권이 개입돼 있는 만큼 기준을 만들어도 논란이 계속될 가능성이 높아 접근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때문에 지금은 고소·고발이 이뤄졌을 때 법원이 판단을 내리고 있는 실정이다.

어쨌든 많은 한의사들은 최신 의료기기의 사용에 대한 제약이 말끔히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모적 논쟁을 종식시키는 것이며, 그 방법은 한의학 원리에 기반하고 있는 표준화된 한방진단기기의 개발이라 강조한다.

재 한방에서의 질병 진단은 보고, 듣고, 묻고, 만져보는 일명 '망문문절(望聞問切)'이 기본이다. 이를 네 가지 진단법, 즉 '사진(四診)'이라 한다.

이중 망진은 눈으로 환자의 상태와 행동, 안색 등을 살피는 것으로 양방의 시진과 동일한 개념이다. 환자의 숨소리와 목소리, 입 냄새, 혀의 상태, 성격 등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한다.

문진 역시 양방과 마찬가지로 환자와의 문답을 통해 직업, 과거 병력, 가족력 등을 파악하여 현 질병의 정체와 원인을 찾는 진단법이다. 문진과 절진의 경우 각각 양방에서 말하는 청진, 촉진과 유사하다. 맥을 짚어보는 맥진, 환부나 복부 등을 눌러보는 안진이 절진에 속한다.

이 네 가지 방법만 사용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가장 한의학적인 질병 진단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한의학계가 현대식 의료기기를 쓰고자 하는 건 이들이 모두 주관적 감각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한의학이 더욱 발전하고 보편화되기 위해서는 객관적이고도 신뢰성 높은 임상 데이터를 축적해야만 하는데 현 방식으로는 이것이 어려운 상황이다. 한의학의 세계화에도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함은 물론이다.

물론 현존하는 한방진단기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경락기능검사기, 맥전도검사기 등 다수의 장비들의 일선 현장에서 쓰인다. 하지만 한의사들조차 이들의 객관성과 신뢰성에 의구심을 던진다. 실제로 지난 2004년 한국한의학연구원이 국내 한방의료기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방임상 사용 의료기기 성능평가 연구'에 따르면 응답기관의 무려 53%가 진단기기에 불만족을 표명했다. 사용상 문제점이 있다는 의견도 61%에 달했다.



불만의 이유에 대해선 98%라는 절대다수가 기기의 진단 결과를 임상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는 점을 꼽았다. 용어의 개념이 불분명하고, 신뢰성 있는 임상자료가 불충분하거나 아예 없다는 것이다. 진단기기 측정치의 정확성과 재현성을 믿을 수 없으며, 기기가 측정하는 요소를 한의학적 진단으로 연결할 이론적 근거가 취약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록 8년 전의 연구라고는 해도 한의학계가 얼마나 제대로 된 한방진단기기에 목말라했는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결과다. 필요성은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그동안 한국한의학연구원을 필두로 갈증을 풀어주기 위한 노력이 끊임없이 전개됐고, 그 결실이 맺어지고 있다.

한의학연구원 체질의학본부 김종열 박사팀은 바로 그 선두에 있는 연구팀이다. 지난 2005년 세계 최초의 진맥 로봇이라 할 수 있는 '지능형 맥진기'를 개발한 이래 국내 한방진단기기의 표준화와 과학화를 이끌고 있다.

지능형 맥진기는 환자의 팔 길이에 맞춰 바(bar)가 움직이며 손목에 압력을 가해 진맥을 해주는 기기다. 한의사들이 진맥을 할 때 보통 세 손가락으로 촌(寸), 관(關), 척(尺)의 세 자리를 집는 것을 가압 센서가 대신하는 것. 이를 이용하면 한의사가 진맥한 것 이상의 정확도와 진단의 객관성 확보가 가능하다.

김 박사팀은 맥진의 교육에 활용할 수 있는 '맥진 가압 트레이닝 시스템'도 개발했다. 인조 피부와 3채널의 힘 센서 등을 갖춘 인조 팔, 데이터 수집용 하드웨어, 데이터 분석용 컴퓨터로 구성돼 있으며 유명한 맥진 전문가들이 진맥을 할 때 팔에 가하는 힘의 변화가 사전 입력돼 있어 한의학 수련생들이 손쉽게 맥진을 숙달할 수 있도록 돕는다.

맥진은 고도의 한의학 지식과 숙련이 필요한데다 감각에 의존하는 탓에 경험의 공유와 전달이 쉽지 않았지만 이 장비로 반복 수련하면 혼자서도 상당 수준의 맥진 능력을 쌓을 수 있다.

김 박사는 "한방진단기기들의 개발을 공식 발표하기 이전에 그 정확도를 충분히 검증한다"며 "세계 유수 저널에 게재될 한의학 임상연구 논문에 쓰일 수 있는 신뢰도 높은 진단기기의 개발이 목표"라고 밝혔다.

박사팀의 성과는 이외에도 많다. 한의사의 디지털 설진기를 비롯해 음성진단기, 피부진단기, 안면진단기 등도 개발에 성공했다. 디지털 설진기는 혀의 색깔, 설태의 분포 등을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하여 환자의 병증을 진단하는 장비다. 혀의 상태를 부위별로 분할한 뒤 해당 부위의 특징을 잡아내 진단을 한다. 외부의 빛을 차단하고 촬영하기 때문에 주변 환경에 관계 없이 균일한 진단 능력을 발휘한다.

또 피부진단기는 손등을 긁고, 잡았다가놓고, 롤러로 감아올리는 작업 등을 통해 피부조직의 거칠기와 탄력, 두께 등을 파악해 사상체질 및 환자의 건강 상태를 진단하는 기기다.

안면진단기는 얼굴에 나타나는 생리적 상태와 체질 특성에 따라 건강을 진단하는 한의학 이론을 재현한 것으로서 디지털영상기기로 촬영한 얼굴의 이목구비 생김새와 안색을 바탕으로 사상체질을 판독하고 인체 장기별 질환 유무를 알아낸다.

특히 작년에는 5년여의 연구 끝에 얼굴 모양, 음성, 체형, 설문조사 등 4가지 방법으로 체질을 판단해주는 '체질 진단 툴'을 개발해 사상체질의학의 표준화·과학화를 이루기도 했다. 당시 이 진단 툴은 한의사들의 주관적 진단과 비교할 때 80%의 정확도로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을 분류해냈다.

연구팀은 추가적인 한방진단기기의 개발에 더해 이미 개발된 기기와 진단 툴의 성능 개선과 보급 확대에도 주력할 계획이다. 김 박사는 "진단기기들의 검진 결과에 한의사들의 깊이 있는 해석이 더해지면 한의학 진료 수준이 몇 단계 올라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박사는 또 "방대한 체질 정보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양의학 의사들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글로벌 스탠더드 진단기기를 개발할 계획"이라며 "그래서 이 기기들을 가지고 다시 한의사로 돌아가 임상에서 직접 활용하는 것이 개인적 소망"이라고 말했다.

설태(舌苔) 혀의 표면에 낀 이물질. 주로 흰색을 띠며 입 냄새의 주요 원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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