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 과학칼럼니스트 enitel@hanmail.net
"성폭행으로 인한 임신이라면 낙태를 허용해야할까요?"
지난 8월 19일 미국의 한 지역방송에서 낙태 반대론자인 공화당 소속 토드 아킨 하원의원에게 사회자가 이렇게 물었다. 질문을 받은 아킨 의원의 대답은 이랬다.
"정말 성폭행이라면 임신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의사들의 말에 따르면 성폭행의 경우 여성의 인체가 임신을 차단하기 위해 모든 기능을 셧다운 시키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보도된 이 발언은 총선거와 대통령 선거를 앞둔 미국에서 엄청난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즉각 '모욕적인 발언'이라 비판하며 "성폭행은 성폭행일 뿐 성폭행의 유형을 분석하고, 평가하고, 구분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피력했다. 여성단체와 진보진영 인사들이 일제히 비난 성명을 내고 공세에 나선 것은 물론이다.
선거 판세에 악영향이 예상되면서 공화당에서도 비판 대열에 합류하자 아킨 의원은 이틀 후인 21일 자신의 부적절한 발언을 공식 사과했지만 파문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그에 이어 톰 스미스 펜실베이니아주 상원의원 후보, 리처드 머독 인디애나주 상원의원 후보 등이 유사한 발언을 잇따라 내뱉었던 것. 특히 머독 후보는 지난 10월 23일 열린 상원의원 선거토론회에 참석해 "생명은 신이 주신 선물이며 이것은 성폭행과 같은 끔찍한 상황에서 잉태된 생명일지라도 다르지 않다"는 망언 수준의 발언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상식과 다른 상식
기초적 수준의 생물학적 지식만 갖췄더라도 고개가 갸웃거려질 이들의 논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된 걸까. 이번 사태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듯 미국에서 이런 종류의 생각은 의외로 긴 역사적 전통(?)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지난 1972년 프레드 메클렌버그라는 산부인과 의사는 논문을 통해 "배란기의 여성이라도 성폭행을 당하면 트라우마 때문에 배란이 일어나지 않아 임신 가능성이 극히 적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강제수용소에서 벌어진 임상시험을 그 근거로 들었다. 독일은 배란기의 여성들을 가스실로 보내되 독가스를 살포하지는 않는 죽음에 대한 공포 체험 실험을 실시했는데 여성들 대다수가 배란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직 전미생명권위원회(NRLC) 위원장이자 산부인과 의사인 존 C. 빌케도 1985년 이와 유사한 견해를 표명한 바 있다. 그는 올해에도 "성폭행을 당한 여성은 두려움과 트라우마로 인한 긴장감 때문에 나팔관이 좁아져 질 내에 사정된 정자가 난자와 만나 수정될 확률은 매우 낮다"며 그동안의 입장을 되풀이했다.
성폭행과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을 포함, 모든 종류의 낙태를 반대하는 '휴먼라이프인터내셔널(HLI)'이라는 단체도 지난 1997년 망언의 대열에 동참했다. 직접 펴낸 책에서 '성폭행에 의한 임신 확률은 적게는 0.08%, 많이 잡아도 0.8%에 불과하다'고 밝힌 것이다. 미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아킨 의원과 머독 의원의 상식 밖 발언도 '나름대로' 과학적 근거에 기반하고 있었던 셈이다.
게다가 이 같은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은 비단 몇몇 정치인들뿐만이 아니다. 워낙 오랜 기간 꾸준하게 제기된 탓인지 생각 이상으로 많은 미국시민들이 이를 진실로 믿고 있다. 아킨 의원의 인터뷰 다음 날 여론조사기업 서베이USA가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미주리주의 성인 중 무려 13%가 아킨 의원의 발언에 동조하고 있었다.
과학이 말하는 진실
그렇다면 그들이 믿고 있는 진실, 아니 진실이라고 믿게 만든 일부 의학자들의 소견은 정말 과학적 사실과 합리적 사고의 산물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성폭행에 의한 임신 확률은 결코 일반적인 성행위와 비교해 낮지 않다. 오히려 지금껏 수행된 연구결과로는 합의하에 이뤄진 성행위보다 성폭행의 임신 확률이 두 배가 넘는다.
일례로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산부인과 의사인 멜리사 홈즈는 1996년 미 국립범죄피해자센터(NCVC)의 자료를 토대로 성폭행과 임신의 상관관계를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에 의하면 성폭행을 당한 가임기 여성의 5%가 임신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이 수치를 당시의 미국 내 성폭행 사건 발생 건수에 대입할 경우 연평균 3만2,101명의 성폭행 피해자가 임신으로 2차적 고통을 겪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성폭행 범죄 신고율이 10% 내외라는 점을 감안할 때 실제 수치는 10만명을 웃돌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2003년 미국 세인트로렌스대학의 부부 과학자인 조나단 고트샬 박사와 티파니 고트샬 박사의 연구에서는 더 높은 수치가 나왔다. 성폭행을 당한 8,000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임신 확률이 6.4%로 나온 것. 콘돔 등 피임수단을 사용하지 않은 사례만 놓고 보면 8%에 달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작년 11월에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10년 한 해 동안 미국 내 18세 이상 성폭행 피해 여성이 130만명이므로 고트샬 박사의 수치를 대입하면 8만3,000명 이상이 성폭행을 당한 후 임신을 경험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물론 전적으로 설문조사에 의존한 연구였던 만큼 신뢰성이 낮을 수 있음은 고트샬 박사 부부도 인정한다. 그러나 적어도 일각의 주장처럼 가능성이 거의 없다거나 극히 드물다는 건 사실이 아니며 합의에 의한 성행위보다 임신 가능성이 높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지난 2001년 미 국립환경보건과학연구소와 프린스턴대학의 공동연구 결과, 정상적 성행위의 임신 확률이 3.1%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무의적 선택의 결과?
이외에도 아킨 의원의 말을 뒤집을 증거는 부지기수다. 심리학자 메리 P. 코스의 1987년 연구에서는 성폭행을 당한 미국 내 18~24세 여대생 중 5%가 임신한 사실이 밝혀졌고, 의사인 펠리시아 H. 스튜어트와 경제학자인 제임스 트루셀이 예방의학적 관점에서 1998년 실시한 연구에서는 미국에서 보고된 성폭행 사례 33만3,000건 가운데 약 2만5,000건이 임신으로 이어졌다.
이쯤에서 생길 수 있는 궁금증 하나. 도대체 왜 성폭행에 의한 임신 확률이 더 높은 걸까.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과학은 이 의문에는 똑 부러진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고트샬 박사의 경우 성폭행범들이 무의적·본능적으로 임신 가능성이 높은 젊은 여성을 표적으로 고르는 경향이 높기 때문이라 분석한다. 홈즈 역시 대부분의 성폭행이 25세 이하의 여성을 상대로 일어나며 피해자 중 사춘기 이전이나 폐경기 이후, 임산부 등 임신 개연성이 없는 여성의 비율이 매우 적다는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는 미국 뉴욕주립대학 올버니캠퍼스의 진화심리학자 고든 갤럽 박사가 '인간의 성적 갈등에 대한 옥스퍼드 핸드북'에서 밝힌 바와도 일치한다. 그는 "성폭행범들은 무작위로 표적을 선택하지 않는다"며 "무의식적으로 신체적 2차 성징이 표출된 젊고 예쁜 여성, 다시 말해 번식력이 우수한 여성을 선택함으로써 임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다만 피해자의 연령대라는 한 가지 요인으로 두 배나 높은 수치가 나타난다는 것은 다소 어폐가 있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이에 고트샬 박사는 하나의 가설을 추가로 제시했다. 모든 남성은 가급적 가장 매력적이고 생식력이 우수한 여성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게 그것이다.
일반 남성은 그런 여성을 찾아 호감을 표시한 여성의 선택을 기다리는 반면 성폭행범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임신 확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갤럽 박사는 성폭행이라는 행위 자체가 임신 확률이 높은 양질의 정액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 남성의 정액에는 여포 자극 호르몬(FSH)과
여성 방어기전의 허와 실
이는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을 통해 증명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한지라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는 없다. 하지만 낙타, 라마, 알파카들은 수컷 정자의 LH로 인한 배란 촉진 효과가 확인 됐으며, LH가 정액 속의 활성성분이 아닌 코알라들도 수컷 정액이 암컷의 배란을 촉진시킨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특히 1973년 발표된 한 연구에 의하면 성폭행에 의한 임신 중 70%가 여성의 임신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점이 아닐 때에 범죄가 일어났다. 이게 사실이라면 갤럽 박사의 가설이 어느 정도는 타당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남성의 행위가 정액의 화학적 성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기존 연구들도 갤럭 박사와 같은 주장의 설득력을 높이는 부분이다. 실제로 인공수정을 위해 채취한 정자와 관련해 포르노를 보면서 자위행위를 한 남성의 정액이 상상에 의존해 자위행위를 한 남성의 정액보다 임신 확률이 높았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또 실질적인 성행위로 배출된 정액의 임신 확률은 이보다 더 높았다고 한다. 남성의 흥분도가 강할수록 정자의 숫자와 모양, 운동성이 향상된다는 얘기다.
이와는 반대로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성폭행으로 인한 임신은 모든 면에서 달갑지 않다. 진화론적 관점만 봐도 성폭행범이 아이의 부양을 책임지는 일은 거의 없기에 여성이 모든 것을 홀로 감당해야 한다. 여성들은 원치 않는 임신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기제를 지니고 있다는 가설이 잉태된 원천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아닌 게 아니라 1980년대 초반부터 의사들은 배우자와의 꾸준한 성행위를 통한 임신보다는 원 나잇 스탠드, 인공수정, 성폭행 등 일시적 관계로 임신한 여성에게서 임신중독 발병률이 높다는 점에 주목했다. 또한 장기간 성행위를 해왔더라도 콘돔, 질외사정 등 피임에 신경 쓴 여성은 그렇지 않은 여성에 비해 임신중독 발병 확률이 높았다. 미국의 심리학자 제시 베링은 이를 근거로 "임신 중독이 남성의 부양 책임을 기대하기 힘든 상태에서 아이를 유산시키려는 여성의 진화학적·생물학적 방어기전일 수 있다"는 가설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가설들의 진위여부와는 관계없이 성폭행이 정상적 성행위보다 높은 임신 가능성을 지닌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정치적·남성 우월적 사고
진실이 이럴 진데 아킨 의원과 같은 사람들이 주기적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것은 정치적 이유와 종교적 신념, 그리고 뿌리 깊은 남성 우월적 사고에 기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아킨 의원의 경우 소속정당이 보수적 성향의 공화당이다. 이들의 보수성은 여성 문제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여성이 자신의 몸, 즉 출산을 조절할 권리를 상당히 경시하는 편이다. 좀더 깊이 들어가면 공화당의 보수적 사고는 창조론의 변형인 지적설계론을 학교 수업에 넣을 만큼 입김이 센 미국 기독교가 낙태를 죄악시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가톨릭의 낙태에 대한 반감은 개신교보다 강하기로 유명하다.
그리고 행실이 정숙하지 못해서 성폭행을 당했다는 식의 거친 표현으로 집약되는 보수층 혹은 남성 우월적 사고도 이러한 발언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이와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청바지를 입었다면 성폭행이 성립될 수 없다는 판결을 들 수 있다. 1999년 2월 10일 이탈리아 대법원은 운전연습 교사에게 성폭행을 당한 사건을 심리하며 "여성이 전력을 다해 저항하면 청바지를 강제로 벗길 수 없다"며 피고인 남성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
이것은 여성의 의복을 성범죄의 구성요건에 집어넣고, 전력을 다해 저항할 '의무'까지 부여한 중세적 판결이자 성범죄의 원인과 책임을 여성에게 떠넘기는 남성 우월주의적 판결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목적이나 신념, 우월감을 위해 과학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대중들을 현혹하는 것은 분명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럴싸한 논리적 구조를 갖춘 듯 보이지만 이런 '유사 과학'은 근거가 전혀 없는 음모론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아니 그보다 더 악의적이다. 이를 깨닫지 못하고 개인적 이익을 위해 과학을 왜곡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우매한 행동이다. 왜곡된 과학은 결코 진정한 과학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여포 자극 호르몬(follicle stimulating hormone) 남성과 여성의 성호르몬 조절과 생식세포 성숙에 관여하는 단백질 호르몬. 황체 형성 호르몬, 에스트로겐과 함께 여성의 생식주기를 조절한다. 초기에는 여성의 난소 안에 있는 여포를 자극하는 역할만 한다고 알려져 이런 이름이 붙었다.
황체 형성 호르몬(luteinizing hormone) 남성과 여성의 성호르몬 조절과 생식세포 성숙에 관여하는 단백질 호르몬. 여성의 배란을 유도·촉진한다. 남성의 경우 고환의 정소에 있는 세포를 자극,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의 분비를 유발한다.
알파카 (alpaca) 페루,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북부가 원산지인 소목 낙타과의 포유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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