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Adam Lashinsky and Katie Benner
엘렌이 버디를 만났을 때 파오와 플레처는 최고 학력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성격은 매우 다르다. 최근까지 갈등을 해결하는 태도도 상반됐다.
2009년 1월 20일은 알폰스 ‘버디’ 플레처 2세 Alphonse "Buddy" Fletcher Jr.에게 자랑 스럽고 기쁜 기억으로 가득 한 날이었다. 뉴욕의 헤지 펀드 매니저 인 플레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역사 의 새 장을 장식하는 것을 직접 보고, 또 한 갈라 전야 칵테일 파티를 주최하기 위해 워싱턴에 와 있었다. 파티 귀빈 중 에는 대통령 취임식에서 시를 낭송하게 된 시인 엘리자베스 알렉산더 Elizabeth Alexander도 있었다. 그녀는 예일 대학교 교수이자 플레처가 인종 관계 증진을 위 해 설립한 재단의 장학생이었다.
해가 저물자 플레처는 건배를 제의하 면서 그 순간이 미국과 자신에게 얼마 나 중요한지를 이야기했다. 그의 인생 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하버드 대학 교의 학자 헨리 루이스 게이츠 2세 Henry Louis Gates Jr., 그의 어머니 베티 Bettye , 곧 있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프레셔스 Precious’로 각본상을 수상하게 될 동생 제프 리 Geoffrey)이 지켜보는 가운데, 플레처는 ‘상상이나 했는가’라는 주제로 축사를 했다. 미국에서 첫 흑인 대통령이 선출될 것이라 고, 그리고 취임식에서 플레처 재단의 장학 생이 직접 쓴 시를 낭송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는가? 그는 벤처 캐피털리스트인 아내 엘렌 파오 Ellen Pao 와 6개월 된 딸 마틸다 Matilda 를 언급하며 ‘이런 날 내가 아름다운 아내와 아이와 함께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라고 자문하기도 했다. 그의 마지막 말에 손님들은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친구들은 모두 플레처가 오랫 동안 호버트 ‘보’ 포크스 Hobart ‘Bo’Fowlkes라 는 남성과 연인관계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플레처의 회사 직원인 포크스는 파티 준비를 도왔지만 참석하지는 않았다). 그랬던 플레처가 2007년 여름부터 1년도 안되는 사이에 파오를 만나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다. 파티는 ‘희망과 변화’의 분위기로 충만했다.
4년 가까이 지난 지금, 플레처와 파오에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그 변화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일어났다. 엘리트들 의 세계인 금융계에서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지위를 얻은 후, 둘은 각각 세간의 주목 을 받은 소송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송은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이미 그들의 커리어를 위협하고 있다. 올해 46세인 플레처는 뉴욕 맨해튼 어퍼 웨스트 사이드 Upper West Side 지역의 상징적 건물인 다코타 아파트 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아파트 한 채를 더 구입하려 했지만, 그의 지불 능력을 의심받자 관리 이사회를 인종 차별로 고소한 것이었다. 이 소송을 시작으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결국 플레처의 펀드 중 하나 가 파산했고, 법무부와 증권거래위원회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플레처가 곤경에 점점 더 빠져들고 있을 때, 43세의 파오 역시 고용주인 유명 벤처 캐피털 회사 클라이너 퍼 킨스 Kleiner Perkins 를 성차별 혐의로 고소했다. 그녀는 일부 남자 동료들의 부당한 대우를 상사들에게 고발했으나 이를 무시 당했고, 오히려 문제를 제기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해고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들은 월가와 실리콘밸리에서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 세계의 엘리트 들이 분명 어느 정도는 자신의 삶과 가치관을 파오-플레처 부부에게 투영했기 때문이다. 둘은 모두 합쳐 다섯 개의 아이비리그 학위를 보유하고 있다. 재계와 학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들과 친분을 유지하는 이 다인종 부부는, 미국 동서부를 아울러 수 많은 명석한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모범생의 멋진 성공’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만남은 처음부터 이상했 다. 오래전부터 주목 받고 싶어했던 플레처는 유명 인사들과 활발한 교류를 했다(다 코타 아파트의 이웃이었던 스티븐 래트너 Steven Rattner 는 플레처의 회사에 투자했다. 트라이베카 영화제 Tribeca Film Festival의 공 동창립자 크레이그 해트코프 Craig Hatkoff와 제인 로젠탈 Jane Rosenthal 도 플레처와 친분이 있었다). 반면 ‘조용하다’는 평가를 가장 많이 받은 파오는 거의 남의 눈에 띄지 않았다. 멘토들은 잠재력과 근면함 때문에 그녀를 제자로 삼았다. 플레처는 그의 장학금 프로그램을 통해 인종관계에 대한 국가적 논쟁에 뛰어들었고, 이번 소송 전에도 두 차례 인종차별 관련 소송을 벌인 바 있다. 파오는 화려한 이력과 성공에도 불구하고 최근 소송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악명’을 떨친 적이 없었다.
이번 사건은 많은 사람들이 오래전에 이 미 다 치유됐다고 여기고 싶은 성차별과 인종주의라는 사회적 상처를 다시 들춰냈다. 중국계 이민자의 딸과 중산층 흑인 가정의 아들이 성공했을 경우, 모든 사람들에게 아 메리칸 드림을 입증하는 상징으로 추앙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파오와 플레처는 자신들이 이미 사라졌다고 여겼던 ‘사회 역학의 희생양’이 됐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소송은 (그들 사회 집단의 일원 대다수가 그랬듯이) 심각한 커리어 위기를 겪고 있는 두 개인의 절박한 몸부림이라고 치부되기 십상이다. 본지는 수십 명의 전직 동료, 친구, 이웃, 지인들을 인터뷰하고 수 백 쪽의 법정 서류를 검토해 이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재구성했다(파오와 플레 처는 이번 기사와 관련해 인터뷰를 거부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고발 내용이 일부, 혹은 전부 사실로 드러난다면? 그렇다면 이른바 ‘계몽된 세계’(the enlightened worlds)라는 실리콘밸리와 어퍼 웨스트 사이드의 어떤 면을 보여줄 것인가? 그리고 2012년 현재 존재하고 있는 아메리칸 드림에 대해선 무엇을 말해줄 것인가?
파오의 로스쿨 동기는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문제를 안 일으킬 사람 중 한 명”이라고 평가했다
엘렌 파오는 2005년 봄 클라이너 퍼킨스에서 낸 직원 공모에 지원했다. 이 회사의 유명한 리더인 존 도어 John Doerr 는 당시 구체적인 요건을 갖춘 기술 전문 관리자를 찾고 있었다. 유수대학의 공학, 법학 및 경영학 학위와 전사적 소프트웨어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춰야 했다. 파오는 2008년 포춘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그 모든 요건을 충족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파오는 어릴 때부터 그에게 쏟아지는 높 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세 딸 중 둘째로 태어난 파오는 뉴저지 주 도시 교외지역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 영핑 파오 Young-Ping Pao 는 뉴욕 대학의 쿠랑 수학연구소 (New York University’s Courant Institute of Mathematical Sciences)의 교수였다. 그는 엘렌이 고교 졸업반인 1987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전에 딸들에게 공부에 대한 의지를 심어줬고, 셋 모두 그의 꿈을 실현시켜 주었다. 엘렌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고, 언니와 동생도 학업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파오는 계속 아이비리그에서 학위를 취득했다. 프린스턴 졸업 후 곧바로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에 진학했다. 이어 로펌인 크라 바스 스와인 앤드 무어 Cravath Swaine & Moore에서 잠시 근무한 후 이번에는 경영대학원에서 또 하나의 하버드 학위를 취득했다. 그녀의 로스쿨 동기인 레베카 아이젠버그 Rebecca Eisenberg 는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문제를 안 일으킬 사람 중 한 명이다”라고 평했다. “전혀 튀지 않았고, 그저 묵묵히 자기 일만 하는 사람이다.”
1998년 경영대학원 졸업 후, 파오는 실리콘밸리에서 잇따라 사업개발 관련 일을 맡았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당시 남자친구인 로저 쿠오 Roger Kuo 와 짧은 결혼생활을 하기도 했다. 쿠오는 현재 샌프란시스코에서 뮤추얼 펀드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둘의 결혼은 조용히, 그리고 파오의 삶에서 대부분의 일이 그랬듯이, 큰 문제 없이 막을 내렸다. 그리고 그가 소프트웨어 회사 BEA 시스템즈에 근무할 당시 클라이너에서 일할 기회가 생겼다. BEA의 상사 애덤 보즈워스 Adam Bosworth가 그녀에게 이 새로운 직장을 추천했다. 그는 “파오는 무척 똑똑한데도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으며, 도전적인 자세도 보이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녀는 기준을 충분히 높게 설정하지 않았다.”
클라이너에서 파오가 맡은 일은 기술업계에서 가장 멋져 보이고, 도전적인 일에 접근할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그녀는 도어의 최고위급 비서로서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지위를 누렸다. 그의 집무실 바로 옆 사무실에서 일했고 회의에도 동석했다. 그러나 사소한 업무도 처리해야 했다. 도어는 출장 때마다 기업인들에게 제안서를 빨리 보여주기 위해 프린터를 갖고 다녔는데, 파오가 이것을 들고 다녀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도어는 그런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도어와 가까이 일하면서 그녀는 비전문 분야를 떠맡기도 했다. 유행병과 청정기술 분야였다. 둘 다 클라이너 퍼킨스에게 실패 한 도박으로 끝난 일이었고, 파오 자신도 타격을 입었다.
묵묵히 일에만 열중했던 파오는,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고 남성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벤처 캐피털 세계와 동떨어져 있었다. 많은 전직 동료들은 파오가 사생활에 대해선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BEA 재직 당시 상사였던 보즈워스는 “그녀는 전형 적인 백인남자들과 달랐다. 자기 전에 모든 것을 꼼꼼하게 점검하는 스타일”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기대하는 것을 말씀해주시면 그대로 따르겠습니다”라는 식의 태도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클라이너 퍼킨스는 파오에게 불편한 직장이 됐다. 회사에 들어간 지 1년 정도 지났을 때, 그녀는 동료인 아지트 나즈레 Ajit Nazre 와 잠시 사귀었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관계를 끝내자 곧 보복이 뒤따랐다. 회의에서 배제되고, 자신이 투자를 맡은 회사들이 피해를 입는 식이었다. 그녀는 또한 클라이너 퍼킨스에서 성차별을 당한 여성이 자신만이 아니며, 2007년 중반에는 도어를 비롯한 여러 명의 상위 파트너 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고 주장했다. 회사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클라이너에서 보낸 시간이 그녀가 바라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도어와의 친분 덕에 한 가지 특전은 누릴 수 있었다. 아스펜 연구소 Aspen Institute 의 이사였던 도어는 전도유망한 젊은 전문직 종사자들을 위한 리더십 세미나인 크라운 펠로 프로그램 Crown Fellows program에 파오를 추천했다. 2007년 8월 그녀는 콜로라도 주에서 열린 일주일간의 세미나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버디 플레처를 처음 만났다.
한 친구는 “그녀는 우리에게 남편을 버디라부르라고 했지만, 얼마 안 가 알폰스로 고쳐 불렀다”고 말했다.
버디 플레처는 젊은 시절 성공가도를 달리면서도 중간중간 어려움을 겪었다. 하버드 대학교 때 플레처의 룸메이트였고, 현재 뉴욕의 헤지펀드 매니저로 일하는 로이 니더호퍼 Roy Niederhoffer 는 “버디는 누구보다도 인기가 많았다”고 회상했다. 플레처는 축구 대표선수였고, 일종의 졸업 무도회 대표 겸 학생 대표라고 할 수 있는 클래스 마셜 class marshal 로 뽑히기도 했다. 그는 하버드 공화당 클럽과 배타적인 피닉스 SK 클럽(영화 ‘소셜 네트워크’에서 마크 저커버그가 들어가고 싶어했지만 가입을 거절 당한 클럽으로 유명해졌다)의 일원이었다. 플레처는 훗 날 클럽 회장으로 선출됐다. 가까운 친구인 스티븐 캐스 Stephen Cass 와 같은 멤버였던 동창생 세 명의 말에 따르면, 플레처는 클럽자금을 부적절하게 남용했다는 이유로 회장 지위를 박탈당한 적이 있다. 이때 일부 회원들은 플레처를 지지하며 클럽에서 탈퇴했다. 플레처는 나중에 회장 자리를 되찾았고 그 후 그와 두 친구는 클럽과의 관계를 회복했다.
플레처는 졸업 후 월가로 진출해 베어스턴스 Bear Stearns 와 키더 피보이 Kidder Peaboy에 근무하며 증권거래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1991년 보너스에 불만을 품고 키더를 떠나 플레처 자산운용(Fletcher Asset Management)을 설립했다. 또한 키더를 인종차별로 고소했다. 회사가 지급해야 할 상여금을 ‘젊은 흑인에게 주기에는 너 무 많은 액수’라며 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중재위원회는 인종차별 혐의는 기각했지만 키더가 플레처에게 추가 보너스 130만 달러를 지급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플레처는 직접 창업한 회사에서 세 자릿수 수익률을 자랑했고, 종종 기자들에게 한분기도 손해를 본 적이 없다고 뽐내기도 했다. 그는 사치스러운 취향도 갖게 됐다. 다코타 빌딩의 수백만 달러짜리 아파트와 코네티컷 주에 있는 1,100 에이커짜리 부동산을 매입했고, 기사가 운전하는 벤틀리 Bentley 를 타고 다녔다. 아직 20대에 불과했지만 자선활동도 통 크게 했다. 1994년에는 개인 재단을 설립했고, 흑인들을 기념하는 문화재단에 기부하기도 했다. 그는 하버드대학교에도 액수는 밝히지 않았지만 상당한 기부를 약속했다. 포춘이 검토한 법정 서류에 따르면, 플레처가 추산한 기부 액수는 900만 달러에 달했다. 이 서약은 바이오테크 기업인 칼진 Calgene 의 주식을 매수할 수 있는 ‘계약권’ 을 포함해 세 가지 유가증권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런 통 큰 기부, 마법 같은 금융 능력, 엄격하면서도 엉뚱한 성격(클라크 켄트 Clark Kent*역주: 슈’ 퍼맨’의 주인공와 스티브 우르켈 Steve Urkel*역주: 시트콤 ‘Family Matters’의 등장 인물을 합쳤다고 생각하면 된다)이 더해져 플레처는 차세대 유망주로 명성을 높였다. 뉴요커 The New Yorker 는 1996년 그를 화려하게 소개하는 기사를 게재했고, 그는 예술계와 학계의 후원자로도 활동했다. 이런 모든 것들 때문에 그는 실패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나 (방음)시설이 잘 갖춰진 사무실 내에선 무자비한 행동으로 악명을 쌓아 갔다. 다섯 명의 전 직원들은 그는 화가 나면 소리부터 지르곤 했다고 밝혔다. 그는 자기 주변에 무능한 인간들밖에 없다고 불평 했다. 또 전직 직원들의 증언에 의하면, 장기간, 때론 며칠씩 회사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플레처 자산운용(Fletcher Asset Management)에 사무실을 가지고 있던 플레처의 어머니 베티는 아들이 왜 자리를 비우는지 설명하고 직원들과의 관계를 매끄럽게 하려고 노력했다. 4년 동안 버디 플레처 밑에서 일한 한 직원은 “일하기 기분 좋은 곳도 아니었고, 기업문화가 좋지도 않았다. 좋은 직장을 두고 이직해서 이런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직원들이 자주 바뀌었다”고 말했다.
플레처는 한때 가까웠던 사람들과도 불화를 빚었다. 대학 동창이자 플레처 자산운용의 공동창업자인 마이클 미드 Michael Meade 와, SK 클럽 친구로 이후 그의 회사에서 일한 캐스는 둘 다 플레처에게 해고된 1990년대 중반,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플레처의 제안을 거절하자 보복 해고를 당했다고 밝혔다(15년 후 파오가 차별 문제를 제기한 것 때문에 보복했다고 회사를 고발한 사실은 그런 면에서 아이러니하다). 두 사람 모두 당시 사건에 대해 언급을 꺼렸지만, 미드는 포춘과의 인터 뷰에서 플레처와 화해했다고 밝혔다. 2011 년 뉴욕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2003년과 2006년에는 플레처의 코네티컷 주 저택에서 일하던 관리인 두 명이 성추행을 이유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결국 합의했다.
하지만 플레처는 이런 고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한 지인은 그가 뉴욕 주 회계 감사로 출마하겠다는 구상을 갖고 뉴욕의 민주당 지도자들을 만난 적이 있다고 말했다. 플레처는 성추행 혐의가 당선 가능성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법정 서류에 따르면, 플레처의 하버드 대 학교 기부금과 관련해서도 법적 문제가 발생했다. 하버드 대학교는 1996년 플레처가 최소한 300만 달러를 알폰스 플레처 대학교 교수단(Alphonse Fletcher University Professorship)에 기부했다고 발표했다. (교수단의 첫 의장은 저명한 학자인 코넬 웨 스트 Cornel West였다). 그로부터 정확히 1년 후, 학교 측은 380만 달러 상당의 주식매입 계약을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 칼진을 제소했다. 법정 서류에 따르면, 칼진 측은 플레 처가 하버드에 제공하기도 전에 이미 무효화된 계약이었다고 주장했다. 하버드와 칼진은 1999년 12월 합의에 이르렀다. 하버드 대는 이 사안에 대해 답변을 거부했다.
2006년 이후 기부금 재단 의장은 영향력 있는 학자인 헨리 루이스 게이츠 2세가 맡아 왔다. 게이츠는 플레처의 삶에 중요한 존재가 됐다. 게이츠는 플레처의 어머니 베티를 저명한 예일대 교수인 제임스 커머 James Comer 에게 소개했고 둘은 2004년 결혼했다. 또한 본의 아니게 버디 플레처의 중매(?)도 섰다. 아스펜 연구소 이사인 게이츠는 종종 크라운 펠로 후보를 지명하기도 하는 데, 2007년엔 플레처를 후보로 추천했다.
2007년 크라운 펠로 참가자 중 한 명은 “버디는 가면을 쓴 사람 같았다”고 말했다.
권위를 자랑하는 크라운 펠로 프로그램은 늘 가장 유능하고 똑똑한 인재들 을 끌어 모으는데, 2007년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구글 임원이었던 크리스 사카 Chris Sacca , 비영리단체 룸 투 리드 Room to Read의 창립자 존 우드 John Wood , 골드만삭스의 브룩스 엔트위슬 Brooks Entwistle 등이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매년 이 모임의 하이라이트는 저녁에 캠프파이어를 하며 노래를 부르고, 한 주 동안의 경험을 참가자들과 공유하는 자리다. 플레 처와 파오는 이 자리에서 하버드 및 금융계의 공통 인연과, 배타적이고 백인 남성 중심인 세계에서 각자 매일 겪은 경험을 교감하며 가까워졌다.
하지만 외부에서 보기엔 둘 사이에선 그 외의 어떤 공통점도 찾기 힘들었다. 둘이 사귀기 시작했을 때에도 크라운 동료들은 거의 알아채지 못했다. 한 참가자는 “엘렌은 조용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이라는 인상을 줬다”고 밝혔다. “버디는 가면을 쓴 사람처럼 보였다.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같았다.”
둘의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됐다. 그해 1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결혼했고, 파오가 임신 6개월째인 2008년 4월 하버드 대학교 기념 성당에서 시민 의례로 다시 한 번 결혼서약을 했다(한때 공개적으로 동성애자임을 밝혔던 플레처가 단 4개월의 연애 끝에 여성과 결혼한 셈이었다). 플레처는 샌프란시스코 세인트레지스 St. Regis 건물에 있는 둘의 아파트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때 이 부부는 샌프란시스코만 지역의 사교계를 멀리한 채 가족중심적인 은둔의 삶을 살았다. 가까운 친구들과 생일파티를 하거나, 파오의 경영대학원 동기들과 모임을 갖는 정도가 전부였다. 세인트레지스의 식당에 아기를 데리고 나온 모습이 종종 눈에 띌 뿐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파오와 친분을 쌓다가 플레처를 알게 된 다른 사람들처럼 BEA의 애덤 보즈워스는 그를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매우 격식을 차렸다고 말했다. 보즈워스는 “파오는 우리에게 남편을 ‘버디’라고 부르라고 했지만, 나는 얼마 안 가 알폰스라고 부르게 됐다”고 말했다.
샌프란시스코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지만 플레처는 뉴욕, 특히 다코타의 아파트를 계속 마음에 두고 있었다. 이미 그 건물에 4채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던 플레처는 2010년 4월, 방 2개짜리 아파트를 한 채 더사려고 신청했다. 하지만 그 다음 달 다코타 아파트 이사회는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플레처는 이 사건 때문에 인종차별 소송을 시 작했다. 이사회는 진술서를 통해 플레처가 관리비와 대출금을 제대로 내지 못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가장 큰 타격이 됐던 것은, 플레처 자산운용의 재무제표를 믿을 수 없다는 다코타 측의 주장이었다. 이사회는 플레처 회계 감사인들의 독립성에 의문을 제기했고, 그가 운용하고 있는 액수를 과장 했다고 주장했다. 플레처는 올해 증권거래위원회에 제출한 신고서에서 5억 5,500만달러를 운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20 년 동안 놀라운 수익률을 달성하고, 동시에 더 많은 자금을 적극적으로 유치하려는 회사치고는 상대적으로 적은 액수였다.
다코타의 자극적인 고발에 이어, 루이지애나 주 연기금 3곳이 케이맨 제도에 등록된 FIA 레버리지 펀드라는 플레처의 투자상품에서 돈을 회수하겠다고 나섰다. 처음에는 약간의 수익만 찾아가겠다고 했지만, 나중에는 투자액 전체를 상환해 달라고 요청했다. 플레처는 그들에게 약식 차용증서를 써 주면서 해당 자산을 쉽게 현금화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기금 측에선 차용증서를 거절했다. 지난해 말까지 플레처와 루 이지애나 연기금 측은 합당한 지급액에 대해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12월 플레처와의 회동이 별 성과 없이 끝나면서, 양측의 관계는 더욱 악화됐다. 투자자들은 케이맨 제도의 레버리지 펀드를 청산해 돈을 돌려받게 해 달라고 청원서를 제출했다.
한편 파오는 캘리포니아 사무실에서 비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친구들은 파오가 얼마나 괴롭힘과 무시를 당했는지에 대해 암시했다고 말했다. 소송 자료에 따르면, 그녀는 다수의 클라이너 간부들에게도 처우에 대해 더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고 한다. 그녀는 또한 자신이 살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세인트레지스 빌딩에서 열린 클라이너의 고위급 만찬에 초대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파오가 제소를 하자 클라이너 측은 이 만찬에서 여성들이 배제됐다는 주장을 부인하며 대응했다). 파오와 과거 연인이었던 파트너 나즈레는 올해 초 조용히 클라이너를 떠났다.
올해 초 플레처와 투자자들 간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직후, 파오는 변호인단을 구하고 증인이 될 만한 사람들을 찾으면서 소송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지난 3월 클라이 너의 남자 동료 세 명이 파오와 같은 주니어 파트너 자리에서 승진했다. 파오가 승진에서 제외되면서 이런 인사 이동은 그녀를 더욱 분노케했다.
같은 시기, 플레처의 케이맨 제도 펀드는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다. 2월 27일 플레처의 한 직원이 작성한 진술서는 ‘FIA 레버리지 펀드가 감사보고서를 2008년부터 제출 하지 않았고, 플레처의 주요 펀드도 2009년부터 제출하지 않았다’고 폭로했다. 게다가 플레처는 수년 전 하버드와의 사이에서 칼 진 문제가 불거졌을 때와 비슷한 수법으로 루이지애나 연기금의 투자금을 상환하려고 했다. 법정 서류에 따르면, 플레처는 연기금 측에 현금 대신 유나이티드 커뮤니티 은행 (United Community Bank)의 주식 매수권을 제안했다. 그러나 플레처와 유나이티드 커뮤니티는 해당 매수권의 가치에 대해 이견을 보였다. 4월 케이맨 제도의 판사는 주식 매수권이 받아들일 수 없는 지급 형태라는 판결을 내렸다. 가치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심지어 손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앤서니 스멜리 Anthony Smellie 판사는 유나이티드 커뮤니티의 추정을 인용해 매수권이 실제로 연기금에 2,260만 달러의 손실을 입힐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케이맨 제도에 있는 펀드의 청산을 명령했다.
플레처가 이런 수치스러운 일을 겪던 와중에서 파오는 자신들의 가정생활이 더욱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게 될 ‘폭탄’을 떨어뜨렸다. 판사가 남편에게 펀드 중 하나를 청산하라고 명령한 지 3주가 지난 5월 10일, 파오는 클라이너를 상대로 경악할 만한 소송을 제기했다. 이는 12일 후 만천하에 공개됐다. 파오의 고소에 포함된 외설적인 내용 중에는, 그녀가 아지트 나즈레의 성적인 접근에 ‘굴복’해 ‘두세 차례’ 관계를 맺었고 나즈레에게 괴롭힘을 당한 ‘또 한 명의 여성 주 니어 파트너’에 대해 알고 있다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었다(이에 대해 나즈레의 의견을 듣고자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녀는 또 클라이너의 시니어 파트너인 랜디 코미사 Randy Komisar가 준 ‘갈망의 책 Book of Longing’이라는 책 속에 “성적인 삽화들과 적나라한 내용의 시들이 다수 실려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파오의 주장에 대해, 클라이너 측은 그녀가 악의 없는 선물을 위협적인 것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진실을 왜곡했다’고 반박했다. 이 소송은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그리고 도어는 직접 성명을 발표해야 했다. 그는 전직 비서를 비난 하면서, 회사가 파오의 ‘거짓 주장’ 때문에 ‘어려운 시간’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클라이너가 얼마나 다양성을 존중해 온 회사인지 생각해보라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고 다녔다.
파오의 대담한 행동은 클라이너 파트너들이 과거 그녀에게 가했던 비난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녀가 수동적이고, 명령을 받기만 기다렸으며, 리스크를 회피했다고 지적했다. 그녀는 보란 듯이 그들의 기대를 완전히 뒤집었다. 또 소송을 제기한 후에도 클라이너가 결국 공식적으로 해고 절차를 밟기 시작하기 전까지 5개월 동안 계속 회사에 다니는 꿋꿋함을 보여 주었다. 파오가 여전히 클라이너를 대표해 투자한 회사들의 이사회에 참석하고, 신규 투자까지 모색하는 모습은 여러모로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소송을 제기한 다음 여름, 애덤 보즈워스는 파오에게 왜 그냥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녀는 “내가 왜 떠나야 하나?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라고 답했다고 한다.
현재 나란히 소송을 치르고 있는 두 사람은 웬만한 부부가 50년 동안 겪을 위기를 겪고 있다.
10월 초 클라이너는 파오와의 기이한 고용 관계에 마침표를 찍었다. 추가로 임금 6개월치에 퇴직금을 지급하고, 더 이상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녀에게 통보했다. 아울러 그녀의 이사직을 대신할 다른 사람을 구하겠다고 알렸다 (우호적인 관계에서 퇴사하는 벤처 캐피털 리스트의 경우, 현직 파트너들이 신규 투자에 집중할 수 있도록 과거 본인이 맡았던 투자를 계속 관리하는 사례가 많다). 파오는 소셜 웹사이트 쿼라 Quora에 자신의 해고 사실을 발표하는 이례적인 행동을 취했다.
물론 클라이너와 파오는 여전히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소송 결과와 상관없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번 소송이 재판까지 간다면 그녀는 엄청난 금액의 합의금을 받거나, 엄청난 타격을 입을 수 있다. 파오의 주장은 앞으로 오랫동안 많은 파트너들 의 이름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것이다. 그녀의 소송은 실리콘밸리 벤처회사들과 신생 업체에서 최고위직에 오른 여성 임원들 이 극소수라는 사실과 함께, 기술분야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진지한 대화의 필요성을 상기시키고 있다.
파오의 고집스러움이 동료들을 놀라게 했을지는 몰라도, 그녀와 함께 자신만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또 한 명에겐 전혀 놀랍지 않았을 것이다. 플레처는 과거 소송에서 합의를 본 적은 있어도 아직 패소한 전례는 없다. 키더 피보이에게 승리한 과거 경험 때문 에 플레처는 싸움을 피하지 않고, 양보를 거부하는 인물이 됐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는 현재 곤경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법원으로부터 플레처 케이맨 제도 펀드의 청산 과정을 관리하도록 임명된 팀은 투자금 관리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펀드의 복잡한 구조 때문에 투자자들에겐 아무런 혜택도 주지 않는 수수료가 여러 단계에서 징수됐다고 밝혔다. 또 플레처와 연관된 한 회사가 투자자들이 모르는 사 이에 레버리지 펀드로부터 330만 달러의 수수료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지난 6월 29일 플레처는 회사 일부에 대한 자발적 파산 신청을 함으로써 청산 과정을 중단시켰다. 그는 청산 과정에서 통제권을 갖기를 원했지 만, 법원의 생각은 달랐다. 플레처의 바람과는 반대로 리처드 J. 데이비스를 청산 과정 감독관으로 임명했다. 화이트 칼라 범죄 전문가인 데이비스는 워터게이트 재판의 특별검사보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지역 파산 법원을 관리하는 트레이시 데이비스 Tracy Davis 미국 감독관은 법정 서류에서 “이 사건의 핵심은 기업 지배구조”라고 밝혔다.
지난 1년간 드러난 문제들 때문에 플레처는 앞으로 펀드 신규 투자자들을 유치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을 전망이다. 그 아내의 커리어 전망도 마찬가지로 불확실하다. 그녀의 주장 때문에 친구들도 파오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할 만큼 평판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이민자 가정의 모범 생 딸인가, 아니면 반항아인가? 내부고발자인가, 아니면 문제아인가?
현재 나란히 소송을 치르고 있는 두 사람은 웬만한 부부가 50년 동안 겪을 위기를 겪고 있다. 올 12월 결혼 5주년을 맞는 부부에겐 말할 필요도 없는 고통이라 할 수 있다. 가장 금실이 좋은 부부 사이도 멀어지게 할 어려움이다. 그러나 버디 플레처와 엘렌 파오는 지금 당장은 오히려 결속된 것처럼 보인다. 아주 묘하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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