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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신년사를 통해 본 대기업 리스크 매니지먼트

CEO 신년사는 기업의 한 해 경영을 예상할 수 있는 바로미터다. 기업의 수장들은 신년사를 통해 위기에 대한 자각을 촉구하고, 신수종 사업을 제안하고, 상생경영 등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윤리경영의 화두를 던지기도 한다. 포춘코리아는 국내 대기업 총수들이 과거 경제위기의 순간에 발표했던 신년 메시지를 분석해 그것들이 그해의 경영에 어떻게 반영됐는지 들여다봤다. 2013년 CEO 신년사가 지닌 의미도 분석했다. 홍성민 기자 sungh@hmgp.co.kr

CEO 신년사는 대개 의례적이다. 매년 시무식에서 기업 대표가 읽는 신년사는 대부분의 직원들에게 ‘한 해의 시작’ 그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 포춘코리아는 그 의례적인 기업 수장들의 신년사 속에서 의례적이지 않은 메시지를 발견해 보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1998년 IMF 구제금융 사태, 2003년 카드대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최악의 경제위기 때 발표된 대기업 총수들의 신년사 속에서, 그해 그 기업의 흥망까지도 좌우할 수 있었던 몇 가지 핵심 키워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잠시 시곗바늘을 돌려 지난 위기의 순간으로 돌아가 보자.

1998년 1월 │ IMF 경제 위기
외환 부족사태로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1997년은 탄탄대로를 달리던 국내 대기업들도 ‘대마불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인식시켜 준 한 해였다. 그래서인지 재벌 총수들의 1998년 신년사에선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위기’와 ‘재무구조’라는 낯선 키워드가 난무했다.
당시 재계서열 1위였던 현대그룹의 정몽구 회장은 무엇보다 재무구조의 견실화를 강조했다. 정 회장은 “계열사 간 상호지급보증 축소나 연결재무제표 작성 등 정책방향에 협조하겠다”면서 “적극적인 의지와 강인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오늘의 위기를 기회로 바꿔 나갈 것”이라고 역설했다. 구본무 당시 LG그룹 회장 역시 그룹 전체를 비상경영체제로 전환하고, 현금 유동성 확보와 재무구조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선언했다. ‘생존’을 위한 사업구조조정을 추진하겠다고 말한 부분이 특히 두드러진 부분이었다. 아울러 그는 임직원들에게 철저한 의식 개혁을 주문하며 “현재의 위기를 과거의 사고와 관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로 삼자”고 강조했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신년사에서 “실물경제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기업인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의 경제파탄에 대해 해야 할 일을 다하지 못했음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이는 자동차 산업 신규진출과 맞물리면서 다양한 해석을 낳기도 했다. 이 회장은 “우리는 엔화강세 호황의 착각 속에서 세계의 흐름을 외면해온 우물 안 개구리였다”며 “양적 사고의 구시대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뼈를 깎는 혁신으로 경영체질과 경쟁력을 강화시켜 나갈 것”이라고 역설했다. 위기 관리에 대한 강한 의지를 피력한 셈이었다. 당시 출범한 DJ 신정부를 의식한 듯, “경제를 ‘정치논리’, ‘관치논리’, ‘여론논리’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흐르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른 기업 총수들이 재무구조와 혁신을 강조하며 경영에 반영했던 것과는 달리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은 신년사에서 기존 ‘세계경영’의 방식을 보다 강화하는 ‘확대지향 경영’을 역설했다. 그는 “무엇보다 수출 확대에 최선을 기울여야 한다”며 “대우는 난관에 움츠리기보다 확대지향적 경영으로 위기를 극복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야전사령관의 호령과도 같았던 김 회장의 신년사였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그해 대우가 다른 그룹과는 달리 본격적인 체질개선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로 작용했다. 김 회장의 강력한 수출 드라이브를 실현시키기 위해 그룹 전체가 사활을 걸었지만, 수출 대금을 미리 받지 않는 소위 ‘외상 수출’의 증가로 대우그룹의 부채가 1998년 한 해 동안만 약 1조 4,000억 원이나 증가했다. 결국 이듬해 대우그룹의 유동성 위기로 이어졌다. 같은 해 삼성그룹이 7조 1,000억 원의 부채를 줄여 내실을 다진 것과는 큰 대조를 이뤘다.

2004년 1월│카드대란과 악화되는 경영 환경
2004년 새해 아침은 우울했다. 2001년 미국에서 촉발된 닷컴버블 붕괴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가운데, 2003년에는 사스(SARS), 이라크 전쟁, 대선자금 수사 등 다양한 변수들이 기업들의 경영 전략에 차질을 불러왔다. 그리고 2003년 카드 대란이 결정타를 날렸다. 가계부채라는 시한폭탄이 경제 전체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었다. 경제성장률은 2%대로 주저앉았고, 2003년 1·2분기와 4분기에는 사상 최초로 민간 소비 증가율이 마이너스로 전환되기도 했다.
기업 총수들의 신년사에도 다시금 ‘위기’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특히 LG카드의 유동성 위기를 겪은 LG그룹 구본무 회장의 신년사가 비장했다. 구 회장은 시무식에서 직접 신년사를 읽으며 그룹의 각성을 촉구했다. 그는 “지금 LG를 염려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리고, 그동안 쌓아 올린 신뢰에도 큰 손상을 입었다”며 “뼈아픈 교훈을 가슴에 새겨 신뢰받는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말했다. 특히 유동성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리스크 관리 시스템 구축’을 언급하며 ‘경쟁력 강화’와 ‘수익성’ 중심의 경영을 역설했다. 가장 강조된 키워드는 R&D와 마케팅이었다. 이를 통해 LG를 첨단과 고급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우자는 게 구 회장의 구상이었다. 이는 그해 LG전자와 LG화학을 중심으로 한 경쟁력 강화 전략으로 발전했다.
그해 LG전자는 전년 대비 22.2%의 매출 신장을 이뤄냈다. 휴대폰 부문의 ‘디자인 경영’이 서서히 빛을 발하며 수출 확대로 이어진 것이 주효했다. LG화학의 도약 또한 눈부셨다. 전년 대비 매출은 26%, 당기순이익은 무려 48% 상승하며 내실경영의 기틀을 마련했다. 성공적인 위기 탈출의 견인차 역할을 한 LG화학은 21세기 들어 LG그룹의 대표 계열사로 자리매김했다.
2003년은 SK그룹에게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긴 한 해였다. 무려 1조 5,500억 원에 달하는 분식회계 사실이 밝혀진 이른바 ‘SK 글로벌 사태’가 터진 것이다. 이 ‘한국판 엔론’ 회계부정 사태 때문에 최태원SK 회장이 배임죄로 구속 수감되었고, 그룹의 이미지도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그룹의 해체 위기론까지 떠돌던 2004년 1월, 손길승 SK그룹 회장은 신년사에서 “사회에 물의를 빚고 수많은 임직원들이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며 “고객과 시장의 신뢰를 잃게 되어 회장으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무겁게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손 회장은 2004년 목표를 크게 세 가지로 제시했다. 수펙스(SUPEX)라고 불리는 이사회를 중심으로 각 계열사의 독립경영체제를 구축하는 것, 에너지화학과 정보통신을 핵심주력사업으로 전문화해 나감으로써 경영내실화와 재무구조 개선을 이뤄가는 것, 그리고 철저한 리스크 관리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SK는 곧바로 구체화된 실행에 착수했다. 그해 2월, 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주)SK의 사외이사 비율을 70%로 높이는 획기적인 이사회 중심 경영을 도입했다. 사외이사들이 마음만 먹으면 특별 결의로 대표이사를 바꿀 수 있게 한 정도로 최태원 회장과 SK그룹의 개혁 의지는 단호했다. 특히 사외이사들을 선정할 때 전문성과 국제 경영 감각 등을 중점적으로 심사함으로써, 이들의 역할이 단지 거수기에 그치지 않도록 조치했다. SK의 이사회중심 경영은 이후 완벽히 뿌리를 내려, 현재까지 SK지배구조의 핵을 이루고 있다. 그룹 매출도 이후 급격히 성장해 2003년 40조 원에서 5년 후인 2008년에 100조원으로 급증하게 되었다. 2004년은 SK그룹이 1인 지배와 계열사 간 순환지원, 불투명한 의사결정 등 기존 재벌체제의 문제점을 개선해 새로운 스타일의 지배구조를 출범시킨 한 해로 평가받고 있다.

2009년 1월│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라
2008년 하반기를 강타한 글로벌 금융위기 폭풍은 재계 순위 1위를 질주하던 삼성그룹에게도 예외 없이 불어닥쳤다. 삼성전자의 경우에도 2004년 사상최대 13조 원 영업이익을 기록한 이후 2008년까지 지속적인 이익 감소세가 지속되고 있었다. 리먼 쇼크의 직격탄을 맞은 2008년 4분기에는 9,000억 원 이상의 영업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선장을 잃은 배가 풍랑을 만난 것처럼, 삼성의 질주도 끝난 것이 아니냐는 비관론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 같은 위기 의식은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그룹을 대표하고 있던 이수빈 당시 삼성생명 회장의 신년사에 그대로 투영됐다. 이수빈 회장은 2009년 신년사에서 “무한 경쟁의 와중에서 무수한 기업들이 사라질 것이며, 삼성도 결코 안심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남들이 지체하고 있을 때 기술과 사업 경쟁력을 더 강하게 만들고 미래를 위한 씨앗을 뿌리자”고 덧붙이기도 했다. IMF 사태 때 이건희 회장이 언급했던 “연은 바람이 거셀수록 더 높이 난다”는 격언도 인용됐다. 사뭇 비장함이 감도는 신년사였다.
그해 삼성그룹은 리스크 관리에선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면서도 동시에 공격적인 R&D 투자를 단행하는 투트랙 전략을 단행함으로써 기적적으로 위기 극복에 성공할 수 있었다. 삼성전자는 그해 발광다이오드(LED)패널 TV와 3D TV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해 업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과 이익률을 확보했다. 경쟁사인 일본의 파나소닉이 플라즈마 디스플레이 패널(PDP) TV에 집착하며 세계 최대 규모의 PDP 공장을 완공하는 사이, 시장의 트렌드가 급격히 LED 쪽으로 바뀌며 삼성이 승기를 잡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에 대한 투자도 과감히 진행해 전 세계 휴대폰시장 점유율 20%를 달성하고, 이듬해 갤럭시 시리즈를 출시하며 세계 1위로 올라서는 발판을 마련했다. 2009년 삼성전자는 매출 139조 원과 영업이익 11조 5,000억 원이라는 사상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킨 셈이었다.
2009년 1월 현대자동차그룹 정몽구 회장의 신년사는 ‘판매확대’와 ‘연구개발’이라는 두 마디로 요약된다. 정 회장은 “위기 탈출을 위한 최우선 과제는 글로벌 시장에서의 판매역량 강화”라며 “판매를 구심점으로 모든 부문이 일치단결할 수 있도록 지원과 협조를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판매에 대한 강조는 과거 외환위기 때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현대차는 ‘10년-10만 마일’ 품질 보증이라는 획기적인 마케팅 전략으로 미국 시장 판매를 크게 확대시켰다. 정 회장은 신년사에서 “글로벌 시장 전역에서 ‘독창적’이고 효과적인 판매확대 방안이 추진될 수 있도록 전 조직이 분발해야 할 것”이라며 “(이를 위해) 지속적인 연구개발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정 회장의 신년사는 당장 실천으로 옮겨졌다. 그해 1월부터 현대차는 미국 시장에서 신차 구매 후 1년 이내 실직 등의 이유로 차량 유지가 어려울 때 할부 차량을 무상으로 반납할 수 있는 ‘현대 어슈어런스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전무후무한 독창적인 마케팅이었다. 2월부터는 미국 최고 시청률을 자랑하는 슈퍼볼 경기와 아카데미 시상식에 관련 TV 광고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현대차를 산 뒤 1년 안에 수입이 없어지면 저희한테 돌려주시면 됩니다.” 내레이터로 기용된 미국 서부극의 전설 제프 브리지스 Jeff Bridges의 푸근한 목소리가 미국 소비자들에게 현대차에 대한 신뢰감을 더해 주었다.
연중 계속된 공격적인 마케팅의 효과는 엄청났다. 현대차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진앙지 미국 시장에서 2009년 사상 최대의 실적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경쟁자인 혼다와 도요타가 약 -20%, 미국차가 -27%에 달하는 판매 감소를 겪는 동안 현대차만 유일하게 9% 이상의 판매 증가를 기록했다. 시장점유율도 역대 최고인 4.8%를 나타냈다. 제네시스가 ‘2009년 북미 올해의 차’로 선정되는 등 품질 면에서도 손색이 없음을 만천하에 과시하기도 했다.

2013년 1월│장기침체의 길목에 서다
2012년 한국은 근래 경험해보지 못했던 2.1%라는 낮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이전처럼 큰 파괴력을 지닌 글로벌 경제 위기가 닥친 것은 아니지만, 저성장의 고착화로 인해 일본식 장기 불황에 빠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 섞인 예측이 난무했다.
2009년의 위기 때처럼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돈다. 작년 사상 최대 실적을 달성한 삼성전자의 이건희 회장은 “올해는 세계 경제가 저성장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며 “삼성에게도 험난하고 버거운 싸움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작년 애플과의 스마트폰 경쟁에서 확실한 주도권을 확보했지만, “삼성의 위상이 높아질수록 견제는 심해질 것”이라며 경영 현지화와 우수한 인재 육성 및 확보를 통해 위기를 헤쳐 나가자고 주문했다. 상생을 통한 사회적 책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도 빠지지 않았다. 이 회장은 “무거운 사회적 책임에 따라 투자와 일자리 창출에 적극 동참해 국민 경제에 힘이 되겠다”며 동반성장의 의지를 피력했다.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은 1월 2일 열린 그룹 시무식에서 올해 경영 방침을 ‘품질을 통한 브랜드 혁신’이라고 천명했다. 품질과 브랜드 로열티를 경영 키워드로 강조한 것은, 낮아지는 원·달러 환율, 일본차의 판매 약진 등 대내외 경영 변수가 어려워지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평가된다. 양적 팽창보다 ‘질적 성장’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정 회장은 “모든 접점에서 고객에게 만족과 감동을 제공함으로써 브랜드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올 한 해 현대차의 브랜드 혁신에 전사적 역량을 쏟아붓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정 회장은 “수년간 지속된 유럽재정 위기와 글로벌 경기 침체의 영향으로 국내외 시장환경이 매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며 “어려운 때일수록 소외된 계층을 보살피며 협력업체와의 동반성장에도 적극 앞장설 것”이라며 신년사를 마무리지었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유독 ‘1등’을 강조했다. 그는 “이제 일등 기업이 아니면 성장이나 수익을 기대하기 힘든 것이 냉엄한 현실”이라며 “세계 무대에서 경쟁사를 압도하고, 1등이 될 수 있는 제품을 반드시 출시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하지만 ‘시장 선도 경영’을 외치는 LG의 올해 전망은 밝지만은 않다. 스마트폰 시장에선 경쟁사에 밀려 시장점유율 5위에 머물러 있고, 디스플레이와 화학 부문의 수익성 또한 악화되고 있다. 구 회장 역시 “시장을 선도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게 사실”이라며 “고객의 상상 속에 머물러 있거나 아직 인지하지 못한 것까지도 끈기 있게 찾아내서 시장 선도 상품을 만들어내자”고 말했다. 이를 위해 LG는 올해 사상 최대인 20조 원을 설비투자와 R&D에 투입하기로 했다. 이는 지난해 16조 8,000억 원보다 3조 이상 늘어난 규모다. 구 회장의 신년사가 어느 정도의 결실을 맺을지 궁금해진다.
올 한 해를 여는 각 기업 총수들의 신년사에도 1998년,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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