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의 재해현장에서 구조대원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로봇 구조대원들이 인간을 대신해 위험이 가득한 재해현장에 뛰어들 것이다.
2014년 말이 되면 로봇들이 인간 구조대원을 대신해 재해 현장에 투입될 전망이다. 특히 이들은 현재 아프가니스탄 등지에 투입된 군용 전투·수색·탐지·관측(SWORDS) 로봇과 달리 바퀴나 무한궤도로 이동하지 않는다. 사람처럼 두 다리로 걸어서 잔해를 헤치며 인명구조 활동을 펼친다.
물론 휴머노이드형 이족보행 로봇일지라도 인간에 비하면 이동속도가 느리고, 훨씬 자주 멈춰서야 할 것이다. 그러나 로봇은 인간보다 강하다. 화재로 화상을 입거나 질식할 염려도, 잔해에 긁혀 부상당할 염려도 없다. 설령 방사능에 노출돼도 맡은 바 역할을 계속 수행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로봇은 인간 구조대원들의 안타까운 희생을 막아준다.
기동력 또한 사람보다 뒤쳐질 뿐 후쿠시마 원전사고 당시 투입됐던 로봇들을 크게 웃돌 것이 확실하다. 뒤죽박죽이 된 문과 계단, 온갖 잔해와 먼지로 가득한 실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도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기존의 휴머노이드 로봇은 현존 세계 최강이라는 혼다의 '아시모(Asimo)'조차 계단을 오르고, 음식을 나르고, 시속 9㎞로 뛰는 정도지만 앞으로 등장할 구조 로봇들은 사다리를 오를 수도, 차량에 올라타서 직접 운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지금은 로봇이 문고리만 제대로 잡아 돌려도 연구진들이 샴페인을 터뜨리며 환호하는 반면 미래의 구조 로봇은 문을 여는 것에 더해 열리지 않는 문을 전동공구나 해머로 해체해가며 인명구조에 나설 수 있다.
자율성 역시 획기적 진전이 기대된다. 재해현장은 원격조종을 위한 통신이 원활하지 못할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일례로 기본적인 활동은 건물 밖에서 조이스틱을 잡고 있는 인간에 의해 통제되더라도 벽을 뚫어야 할 때 어떤 공구를 꺼내서, 어느 부위를, 어떤 방법으로, 얼마나 타격해야할지는 자체 알고리즘으로 스스로 해결할 것이다.
작년 10월 런칭돼 내년까지 2년간 진행되는 미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의 '로보틱스 챌린지'는 이 모든 것을 현실화해줄 인큐베이터다. 참가 로봇들은 DARPA가 고심 끝에 설계한 장애물 코스에서 고도의 기동성과 손재주를 발휘하며 8가지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이번 대회의 프로그램 매니저 길 프랫 박사에 따르면 올해 12월 열리는 예선경기에서 고득점을 획득한 뒤 2014년으로 예정된 결선에서 경쟁자들을 모두 제치는 단 한 팀에게 200만 달러의 상금이 수여된다.
"허리케인 샌디,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을 겪으면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대형 재해의 발생 초기에 인간이 할 수 있는 대응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점입니다. DARPA는 로봇이 이런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 DARPA는 구조 로봇이 반드시 휴머노이드여야 한다고 명시하지 않았지만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포함한 완성품 로봇을 제작해야 하는 트랙-A 부문 참가팀 7곳 중 5개팀의 로봇이 휴머노이드며 미 항공우주국(NASA) 제트추진연구소(JPL)의 '로보시미언(RoboSimian)'을 제외한 6개팀이 이족보행 로봇을 출품했다. 프랫 박사는 로봇에게 주어진 임무나 활동해야할 환경을 고려할 때 휴머노이드가 분명 합리적 결정이라 설명한다.
"문의 손잡이 높이부터 차량의 페달 위치까지 로봇이 직면할 거의 모든 상황이 인간에게 맞춰져 있어요. 활동 장소도 인간이 일하고, 생활했던 곳이죠. 휴머노이드가 유리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과연 우리는 2014년에 DARPA가 제시한 8가지 임무를 모두 완벽히 수행하는 로봇의 탄생을 목도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몇 가지만 해내도 로봇공학계의 엄청난 발전이며 모든 임무를 완수한다면 그것은 혁신을 넘어선 혁명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현실 무대에 데뷔해 인간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는 강인하고, 실용적이며, 경쟁력 있는 휴머노이드 시대의 개막을 의미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런 로봇들은 독성가스 누출지역, 치명적 방사능이 가득한 원자로, 추가 붕괴가 우려되는 빌딩 등 인간이 갈 수 없는 곳, 아니 가서는 안 되는 곳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갈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시대의 새로운 영웅이 될 겁니다."
필자의 눈앞으로 휴머노이드 로봇이 걸어왔다. 신장 1.5m, 체중 12㎏의 이 로봇은 얼굴이 폭동진압용 헬멧을 쓴 듯한 검은색 평면이었고 나머지 부분은 흰색 플라스틱과 합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대개의 휴머노이드와 달리 외관상 탄성을 자아낼만한 특징은 별달리 없었다.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면 그랬을 거라는 얘기다.
'찰리-2(CHARLI-2)'로 명명된 이 로봇은 서투르지만 분명 움직였다.
필자가 찾아간 곳은 미국 버지니아텍 로봇공학·기계공학연구소. 찰리-2는 약칭 로멜라(RoMeLa)라고 불리는 이 연구소의 지하에 마련된 9㎡ 넓이의 미니어처 축구장 위에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떼고 있었다.
로멜라에서 개발된 모든 로봇, 아니 적어도 다리를 갖고 있는 로봇들은 예외 없이 이 축구장 위에서 위대한 첫 걸음을 내딛는다. 다만 이날 찰리-2는 첫 걸음마를 뗀 것이 아니다. 이 녀석은 축구경기를 통해 휴머노이드의 자율성과 민첩성, 이동속도를 겨루는 ‘2012 로보컵’ 우승자다. 유튜브(youtube.com/watch?v=kmeJvkN4ntI)에는 찰리-2가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맞춰 말춤을 추는 동영상도 올라와 있다.
그럼에도 찰리-2의 보행 속도는 초당 약 0.5m에 불과하다. 인간의 평균 보행 속도보다 2~3배나 느린 것이다. 사실 현재의 이족보행 로봇 개발자들은 마치 걸음마를 갓 시작한 아이들 둔 부모와 다르지 않다. 로봇이 기초적인 동작만 성공해도 뛸 듯이 기뻐하고, 비틀거리거나 넘어지면 고개를 내젖는다. 또한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오면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두 기록해 놓는다. 이를 감안하면 찰리-2는 이 시대를 대표할만한 세계적 수준의 휴머노이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찰리-2의 영광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성능이 한층 업그레이드 된 후속 모델이 곧 그 자리를 대체할 것이기 때문이다. 차세대 주자의 이름은 전술적 고위험 임무 로봇의 약자인 '토르(THOR)'다.
로보틱스 챌린지의 출전선수답게 토르는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의 티를 완전히 벗을 예정이다. 거대한 알루미늄 소재 다리와 몸통, 엉덩이, 팔, 머리를 갖춘 지능형 구조 로봇의 모습으로 설계돼 있다. 로봇의 다리와 등뼈를 굳건히 지탱할 기다란 원통형 액추에이터 등 완성된 몇몇 부품만 봐도 한 눈에 힘이 느껴진다. 로멜라의 책임자이자 미국 최고의 로봇공학자로 손꼽히는 데니스 홍 박사는 찰리-2가 과거의 기술로 제작됐다면 토르는 미래의 기술이 채용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토르는 찰리-2와 달리 제대로 걸을 겁니다. 8가지 임무를 모두 해낼 수 있을지는 아직 의문이지만요."
홍 박사가 진두 지휘하고 있는 토르팀에는 로멜라 외에 펜실베이니아대학과 한국기업 로보티즈를 포함한 두 곳의 로봇공학기업도 참여하고 있다. 이미 로보틱스 챌린지의 백미라 할 트랙-A 부문의 출전권을 획득, DARPA로부터 최대 400만 달러를 지원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이렇듯 토르팀이 선두그룹에 입성할 수 있었던 것은 찰리-2, 다윈(DARwIn) 같이 그동안 로멜라에서 개발한 휴머노이드의 힘은 아니다. 홍 박사팀의 비밀병기는 따로 있다. 로보틱스 챌린지가 발표되기 1년여 전부터 개발에 돌입한 휴머노이드 '사파이어(SAFFiR)'가 그 주인공.
선상에서 운용 가능한 자율소방로봇을 표방하는 사파이어의 개발은 튼튼하고 성능이 뛰어난 소방로봇을 원했던 미 해군연구소(ONR)와의 계약에 의해 시작됐다.
놀랍게도 사파이어에 대한 ONR의 요구능력은 이번 로보틱스 챌린지에서 DARPA가 요구한 임무 능력과 매우 유사하다. 위험한 통로를 도보로 이동하고, 시야가 또렷이 확보되지 않아도 자신의 위치를 파악해야 한다. 또 출렁이는 해상에서의 균형 유지, 소방 용구의 취급, 사다리 오르기 등의 능력을 갖춰야 한다. 이 덕분에 토르팀은 시작부터 다른 경쟁자들보다 앞서서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파이어와 토르는 겹치는 구석이 많아요. 사파이어를 위해 수행했던 연구를 토르에 적용할 수도,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죠."
이 같은 공학적 토대 위에 공구 취급 등의 능력을 추가한다면 사파이어와 토르를 합친 다목적 로봇이 탄생할 수도 있다. 바다 위의 선박과 무너진 빌딩을 종횡무진하며 화재 진압과 인명구조를 동시 수행하는 로봇 말이다.
현재까지 토르팀은 이동성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운전대와 전동공구를 잡거나 사다리에 매달리는 데 필요한 정교한 움직임과 안정성도 반드시 해결해야 할 핵심 과제지만 우선순위는 이동성 보다 낮다. 아무리 운전을 잘하고, 공구를 잘 다뤄도 차량이나 잔해물까지 정확히 이동하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인 탓이다.
한편 휴머노이드 로봇공학에 있어 이족보행은 가능성과 위험을 동시에 내재한 야누스의 얼굴이다. 이족보행을 하면 다양한 환경, 특히 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에서 운용할 때 많은 이점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걷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파국적 결과에 직면할 수 있다. 잔해들이 뒤엉킨 곳이라면 아예 일어서지 못하고 임무종료를 선언해야할지도 모른다. 대다수 휴머노이드들이 위치제어시스템을 이용해 매번 발을 내딛을 위치를 세심하게 파악하고 조심스럽게 발을 내려놓은 것도 이 때문이다.
휴머노이드들은 또 다리 관절에 액추에이터를 내장, 이를 회전시켜 다리를 굽히거나 펴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 보행속도를 높일수록 액추에이터의 회전속도로 빨라진다. 문제는 로봇의 경우 관절이 너무 뻣뻣하기 때문에 보행속도가 일정 수준에 이르면 더 이상 속도를 높일 수 없다는 것. 빠르게 걷다가 그 탄력을 이용해 곧바로 뛸 수 있는 사람과는 다르다. 걷기 위해서는 별도의 알고리즘이 사지의 위치를 끊임없이 계산해야 해 이동 중 순간적으로 몸의 균형을 잃더라도 즉시 균형을 회복하며 넘어지지 않는 본능적 반사작용도 기대할 수 없다.
토르는 이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 홍 박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까지 로봇이 발아래 지형의 정확한 기하학적 특성 파악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위치제어시스템 뿐이었어요. 하지만 토르는 힘 제어시스템을 추가해 해법을 찾을 계획입니다."
힘 제어 시스템은 설계학적, 기능적 측면에서 생명체와 더 유사하다는 점이 핵심 메리트다.
"결정적 차이는 선형 연속 탄성 액추에이터를 채용한다는 거예요. 이 액추에이터는 인간의 근육처럼 늘어났다가 수축됩니다. 인체의 해부학적 구조에서 영감을 얻은 기술이죠."
앞서 언급한 기다란 원통형 액추에이터가 바로 이것으로 인간의 근육과 유사한 위치에 부착돼 근육처럼 작용한다. 매 걸음마다 티타늄 스프링이 충격을 흡수하며, 스프링의 탄성을 이용해 발을 들어서 다음 동작으로 연결할 수 있는 것. 예상대로 된다면 토르는 액추에이터의 강도를 조절, 걸으면서 속도를 높여 뛸 수 있게 된다.
이는 또 흐트러진 균형을 회복할 가능성도 한층 높여준다. 뻣뻣한 다리를 가진 찰리-2라면 넘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토르는 넘어지지 않고 쪼그려 앉았다가 다시 일어설 수 있다.
향후 위치제어시스템과 힘 제어시스템 사이에 최적의 균형이 맞춰질수록 토르는 인간처럼 자유롭고, 즉흥적이며, 효율적으로 힘차게 걸을 수 있다.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던 이족보행 로봇의 시대가 끝나고, 어떤 지형이라도 물의 없이 이동할 수 있는 로봇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로봇은 꼭 인간의 모습에 얽매이지 않아도 됩니다. 어떤 부위에 카메라 장착이 필요할 때는 그냥 장착하면 돼요."
NASA의 니콜라스 래드포드 박사는 로보틱스 챌린지에 대한 DARPA의 요구 능력을 접하고 멈칫했다. 현재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실증 중인 인간형 로봇 '로보노트(Robonaut)'의 개발을 주도한 그는 누구보다 휴머노이드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전 이렇게 생각했죠. '로봇에게 자동차를 몰고, 사다리를 오르고, 펌프를 교체해서 작동시키라고? 얘들 장난도 아니고 그게 말이 돼!'라고요."
사실이다. DARPA의 요구 조건은 현 로봇공학 기술로는 달성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난이도가 높다. 하지만 이 황당한 조건은 로봇공학자들의 피를 끓게 만들었다. 세계 최강 휴머노이드 아시모를 가지고도 DARPA의 자금 지원이 없는 대신 제작기간이 긴 트랙-D 부문에 참가한 혼다를 제외하면 말이다.
이렇게 트랙-A 부분에는 홍 박사팀 외에 NASA의 2개팀, 카네기멜론대학, 일본 도쿄대학 연구진 중심의 새프트, 그리고 다크호스라 할 수 있는 방위산업체 레이시온이 도전장을 던졌다.
하드웨어 없이 소프트웨어만으로 경쟁하는 트랙-B와 트랙-C 부문 참가자들은 4족 로봇 '빅독(Big Dog)'으로 유명한 군사로봇 개발기업 보스턴 다이내믹스가 개발한 휴머노이드 '아틀라스(Atlas)'에 자신의 소프트웨어를 입력, 자웅을 겨루게 된다. 이 회사의 펫맨(PETMAN) 로봇을 업그레이드한 아틀라스는 강력한 유압 액추에이터를 장착, 팔다리로 벽을 잡은 채 바닥을 밟지 않고 지면의 틈새를 건너갈 수도 있다.
DARPA는 트랙-A, B, C, D를 막론해 예선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획득한 상위 8대의 로봇을 선별, 2014년 결승전을 열 계획이다. 그런 만큼 막강 소프트웨어로 무장한 아틀라스와 트랙-A 참가팀의 진검승부를 볼 수도 있을 전망이다.
결선 참가 로봇 중 8가지 임무를 물리적으로 완벽히 수행하는 로봇이 나올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일단 이동성 부분에서 인공적으로 조성된 잔해물과 산업현장을 통과해야 하지만 평탄하지 않은 지면에서 오랜 시간 이동하는데 성공한 로봇은 아직 전무하다. 곤충을 본 딴 6족 로봇조차 잡석과 잔해 위에서는 굼벵이와 다름없다.
토르 팀은 원통형 액추에이터, 새프트 팀은 'HRP3'라는 휴머노이드 개발을 통해 확보한 균형 제어 기술 및 액체냉각식 모터로 승부수를 띄운다는 생각이다. 홍 박사에 의하면 두 로봇은 모두 강력한 다리를 갖고 있어 사다리 오르기에도 유리하다. 다리 힘이 충분하면 손은 사다리의 난간을 잡아 떨어지지 않게 보조만 해줘도 된다는 이유에서다.
조작과 관련된 임무, 예를 들어 문을 열거나 밸브를 잠그는 등의 임무는 이동만큼 위험하지는 않다. 스크루드라이버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고 실격될 확률은 낮다는 얘기다. 그런 때문인지 이 기술에서는 뚜렷이 앞선 팀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NASA 존슨우주센터 래드포드 박사팀이 극도로 정밀한 다섯 손가락을 지닌 '로보노트 2'에 힘입어 핵심기술 일부를 확보했다.
상반신 휴머노이드인 로보노트는 우주비행사가 우주유영 중 사용하는 공구와 인터페이스를 자율적 혹은 원격조종을 통해 다룰 수 있는데 래드포드 박사팀의 휴머노이드가 그 손재주를 물려받는다면 조작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것이 자명하다.
이번 대회가 휴머노이드의 잔치가 될 가능성은 높지만 인간적이지 않은 로봇들이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 말라는 법도 없다. 주지하다시피 휴머노이드는 여전히 상용화를 가로 막는 기술적 장벽이 무수히 많다. 래드포드 박사의 설명을 빌자면 인간은 지금까지 개발된 그 어떤 휴머노이드 보다 에너지 효율이 최소 15배나 뛰어나다. 인간의 지방이 가진 에너지 밀도 역시 배터리의 30배나 된다.
이 점에 주목해 카네기멜론대학은 영장류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장애물 극복 능력을 최대화한 '침프(CHIMP)'를 설계했다. 외관상 휴머노이드에 가까운 이 로봇은 필요에 따라 이족보행과 4족 보행을 자유롭게 전환해 이동할 수 있다.
또한 침프가 영장류를 모방했다면 NASA JPL은 설계나 이동방식 모두에서 해양생물을 모태로 삼은 4족 로봇 '로보시미언'으로 휴머노이드에 맞선다는 복안이다. DARPA의 프랫 박사의 말이다.
"휴머노이드 로봇이든 아니든 저희는 상관이 없어요. 중요한 것은 인간을 얼마나 대체할 수 있는지 일뿐 겉모습이 아니니까요."
JPL은 여러 생물로부터 장점들을 취합해 로보시미언에 융합시키고자 한다. JPL의 브렛 케네디 박사는 이렇게 자신의 신념을 말했다.
"인간의 신체 구조는 오랜 진화의 산물이에요. 머리와 목, 팔다리 등 모든 부위가 각자의 기능을 가장 원활히 수행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해있죠. 하지만 로봇은 여기에 연연할 필요가 없어요. 어떤 부위에 카메라 장착이 필요하다면 그냥 장착하면 돼요."
로보시미언은 사실상 앞과 뒤, 옆의 구분이 없다. 불가사리를 모방해 거의 완벽하게 좌우 대칭적 모습을 갖췄다. 이처럼 극도의 효율적 설계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명확하다. 일례로 다른 로봇들은 차량에 승하차할 때 동작이 매우 어색하거나 무게중심이 무너져 쓰러질 수 있을 정도로 균형을 깨야만 하지만 로보시미언은 그저 기어오르면 그만이다.
그리고 화성탐사 로버를 3대나 개발했던 JPL은 예측불능의 가혹한 환경에서 제한된 동력과 통신수단만으로 자율성 높은 로봇을 운용할 수 있는 노하우를 이미 체득했다. JPL팀에게 DARPA의 로보틱스 챌린지는 평상시 하던 일의 연장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로 침프나 로보시미언이 대회에서 우승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는 단순히 다른 팀들이 200만 달러의 상금을 놓쳤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인간과 비슷한 움직임보다는 인간과 비슷한 모습에 더 집중해왔던 기존 휴머노이드 연구의 패러다임이 근본부터 뒤흔들릴 수 있는 탓이다. 4족 보행의 경쟁력이 더 높다고 입증된 마당에 이족보행에 매달릴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수년 전 케네디 박사팀과 손잡고 로보시미언의 초기모델 개발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홍 박사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비인간형 로봇이 모든 임무를 처리해낸다면 사람이 사는 환경에서 활동할 로봇은 인간형이어야 한다는 제 철학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말 거예요. 이번 대회를 통해 제가 걸어왔던 길이 틀렸던 것인지, 아니면 전적으로 옳았던 것인지 입증될 겁니다."
"화재진압 로봇을 개발하면 갑판 청소로봇, 요리사 로봇, 택배 배달 로봇도 만들 수 있죠. 그래서 저는 휴머노이드 로봇을 로봇계의 '맥가이버 칼'이라 부릅니다."
찰리-2가 방금 지나간 버지니아텍 로봇공학·기계공학연구소의 미니어처 축구장 위를 또 다른 로봇이 걸어왔다. 토르와 사파이어의 프로토타입 모델 격인 이 로봇은 훨씬 위태로워 보였다. 한 걸음을 떼어낼 때마다 액추에이터의 작동음이 울려 퍼졌고, 작달막한 몸체 위에 달린 청색 지시등이 불길한 느낌을 주며 깜빡였다. 걷다가 넘어지는 것을 막고자 선을 이용해 몸을 소형 크레인에 연결한 채 였다.
단지 이렇게 위태로운 모습과는 정반대로 다리만큼은 가히 초인적 수준이었다. 연구팀원들에 의하면 한번은 발꿈치와 발목 사이에서 완충장치 역할을 해주던 알루미늄 합금이 부러지기도 했다고 한다. 연구팀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발의 움직임 또한 육안으로 쫓아가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그러나 실제 이동속도는 완전 딴판이었다. 로봇에 채용된 동력과 근육시스템, 넓은 보폭과 빠른 액추에이터 움직임을 감안하면 느리다고 해야 옳았다. 연구팀은 이에 대해 보행 연습을 시작한지 이제 3일밖에 되지 않았고, 찰리-2의 알고리즘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금의 속도는 최종 목표 속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연구팀은 이 녀석을 통해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이족보행 로봇을 구현하고자 한다. 토르에 탑재될 선형 연속 탄성 액추에이터가 예상대로의 성능을 내 준다면 걸음을 걸을 때마다 액추에이터의 스프링에 에너지가 저장돼 보행에 필요한 에너지를 추가 공급할 수 있다. 또한 액추에이터가 왕복 운동할 때 일어나는 마찰열의 일부를 전기에너지로 변환하는 시스템도 채용돼 있다. 마치 하이브리드카의 회생브레이크처럼 말이다. 이로써 토르는 인간과 로봇의 에너지 효율 격차를 지금의 15배에서 5배 수준으로 대폭 줄일 수 있으며 이는 괄목할 만한 공학적 발전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로봇의 오른쪽 무릎이 말을 듣지 않았다. 너무 많은 에너지가 회수됐다. 이에 연구원들은 전류가 급등해 시스템이 자동 정지되고 로봇은 넘어질 것이라 예측했다. 하지만 예측은 예측일 뿐 로봇은 균형을 잃지 않았다.
이때 홍 박사가 보란 듯이 로봇 위에 올라탔다. 30㎏이나 되는 프레임은 휘어진다거나 동력체계에 이상을 일으키지 않고 그의 체중을 온전히 견뎌냈다. 무릎의 부품이 부서지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팀원들은 이런 데이터들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실험을 이어갔다.
"저희 앞에 놓인 문제점들을 개선하는 데는 수개월, 어쩌면 수년이 걸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휴머노이드 개발이야 말로 '고위험 고수익' 사업이에요. 화재진압 로봇을 개발하면 갑판 청소로봇, 요리사 로봇, 택배 배달 로봇도 만들 수 있죠. 그래서 저는 휴머노이드 로봇을 로봇계의 ‘맥가이버 칼’이라 부릅니다."
토르, 사파이어를 포함한 모든 휴머노이드, 아니 인간형 로봇들이 지향하는 궁극적 비전이 바로 이것이다. 초기에는 한정된 능력만 제공하는 복잡한 시스템을 가진 수백만 달러짜리 로봇의 모습이겠지만 대량생산을 거쳐 가격은 하락할 것이다. 또 군용로봇과 의료용 로봇이 초기시장을 개척하고 나면 노약자 보조, 정원 관리, 빨래 등을 할 수 있는 가정용 로봇이 등장하게 된다.
홍 박사팀은 올해 11월 앨라배마주에 정박해 있는 퇴역군함 USS 섀드웰 호에서 사파이어의 첫 공개 테스트를 실시할 계획이다. 이날 연구팀은 사파이어가 호스로 물을 뿌리거나 소화기를 휘두르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선박 내부를 돌아다닐 수 있는 능력을 만천하에 보여줄 생각이다. 이후 1개월간 이동 능력을 완비하고, 차례차례 새로운 능력들을 하나씩 실증한 뒤 2014년 미 해군의 화재진압훈련, DARPA의 로보틱스 챌린지라는 최고난도 임무에 투입된다.
로보틱스 챌린지에서 어떤 결과가 도출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휴머노이드가 우승할 수도, 4족 보행로봇이 휴머노이드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수도 있다. 단지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 로봇들이 언젠가 현실세계에서 실전 투입될 것이라는 점이다. DARPA의 자율주행자동차 경진대회가 관련업계의 연구개발을 가속화시켜 구글의 자율주행자동차 개발을 이끌어낸 것처럼 말이다.
물론 병원에서 간호사 대신 환자들을 돌보거나 겨울철 혹한기에 공사장의 잡일을 해주는 로봇을 보려면 적어도 10~20년은 기다려야 한다. 우리가 가장 먼저 보게 될 것은 재해현장에 뛰어드는 휴머노이드일 가능성이 높다. 사고현장 주변을 지나다가 우연히 촬영한 누군가의 휴대폰 영상 속에서, 혹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구원을 기다리는 당신에게 한줄기 빛처럼 다가오는 로봇을 직접 만나게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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