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가 중소기업 보호 법안 마련을 검토 중이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상대로 횡포를 부릴 경우, 피해금액의 10배까지 배상하도록 규정하는 안이다. 이른바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대통령직 인수위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 제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해외 도입 사례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김승열 법무법인 양헌 대표변호사 겸 KAIST 겸직 교수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영미법계 법 문화권에서만 인정되는 손해배상에 관한 특수 제도다. 독일 등 대다수의 대륙법계 문화권에서 손해배상은 원칙적으로 실제 손해를 입은 부분에 대한 배상만을 인정하고 있다.
이에 반해 영미법계에선 고의 또는 이에 준하는 악의적인 불법행위의 경우, 일반적인 실제 손해 배상에 더해 별도의 사적인 벌금 성격인 금원 지급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징벌적’ 손해배상(금)제도다.
이 제도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켜준 사례가 있다. 1992년 어느 날, 고령의 할머니가 미국 맥도날드에서 49센트에 산 뜨거운 커피에 3도 화상을 입었다. 할머니는 가게 측에 수술비용 부담을 요구했으나 들어주지 않자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이를 맥도날드 측의 악의적인 불법행위로 간주해 손해배상금 16만 달러, ‘징벌적 손해배상금’ 48만 달러를 부과했다. 도합 64만 달러(한화 약 7,000만 원)에 이르는 배상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이 사건 이후 맥도날드는 커피의 온도를 낮췄고, 다른 패스트푸드사들도 ‘커피가 뜨거우니 조심하라’는 경고문구를 컵에 새겨 넣었다.
영미법계를 중심으로 확산
이 제도는 1760년대 영국에서 처음 등장했다. 무능한 정부를 비판한 출판사 등에 대해 공무원들이 불법적인 압수수색과 감금 행위를 서슴지 않자, 출판사들이 즉각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법원은 이 청구를 받아들이고 재발방지를 위한 ‘징벌적’ 손해배상까지 인정했다. 실제 손해에 대한 배상금 20파운드를 인정함과 동시에 추가적으로 1,000 파운드를 지급하라고 판시했다.
미국에서는 반독점규제법, 소비자보호법 등 200여 개의 법률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을 인정하고 있다. 법원 또한 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다. 도장만 새로 한 차량을 ‘신차’라고 판매한 자동차 판매회사의 행위를 ‘사기’라고 판단하고 실제 손해배상금 4,000달러, 징벌적 손해배상금 400만 달러를 인정했다. 이어진 상고심에서 연방대법원은 1심의 징벌적 배상금이 과도하다고 판단했지만,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연방대법원은 이른바 ‘캠벨사건’을 통해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하기도 했다. 징벌적 손해배상금은 실제 손해 배상금의 4배 정도까지가 적정하고, 10배를 초과하는 것은 위법이라는 취지의 판시였다.
그 밖의 나라들의 입법 사례는 다양하게 갈리고 있다. 우선 대륙법계인 독일과 일본은 제도 도입에 다소 소극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대만의 경우는 소비자 보호법 등 다양한 관련 법률로 제도적 취지를 보장하고 있다. 중국은 불법행위법상 제조물 책임조항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명시적으로 규정하여 2010년 7월부터 시행하고 있다.
불공정 행위 예방에 효과
그렇다면 국내 상황은 어떨까? 지난 2011년에 개정된 ‘하도급거래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에서 대기업이 하청업자의 기술자료를 유용하거나 자료의 제공을 불법적으로 요구하는 행위를 명시적인 손해배상 대상으로 인정하고 있다. 향후 징벌적 손해배상의 적용대상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 행위로는 ●하도급 대금의 부당한 감액 행위 ●리베이트에 해당하는 경제적 이익 강요행위 ●하도급업체인력을 부당하게 빼나가는 행위 ●입찰 담합 행위 등이 있다. 장기적으로는 현행 공정거래법위반이나 불공정거래행위 전반으로도 확대될 수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단순 경과실 불법행위와 악의적인 불법행위를 구분해 그 책임의 경중을 달리하는 제도다. 법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기존 법리보다 한 단계 진보된 접근이다. 악의적인 불법행위에 대해 최대 10배에 달하는 배상금을 추가적으로 지급할 의무를 부과하기 때문에 불법행위의 예방측면에서도 효과가 있다. 특히 실제 손해액 입증이 어렵고, 입증이 되더라도 법원에서 인정하는 손해액이 적은 악의적 불법행위이거나, 사회적·경제적 강자가 약자에 지속적으로 반복해 자행하는 불법행위의 경우라면 이를 적절히 통제하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반대 주장은 설득력 미약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의 도입을 반대하는 측에서 제기하는 주된 근거에는 ●법체계상의 차이 ●기업활동의 위축 ●이중처벌 가능성 ●부당이득 가능성 ●소송 남발우려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약한 것으로 판단된다. 실제 이를 도입한 대만 등에서 상당한 성과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나 편견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강조하고 싶다. 마치 이 제도를 도입하면 모든 기업활동이 위축되고, 더 나아가 모든 관련 기업이 파산한다는 식의 오해는 불식되어야 한다. 적절하게 도입되었을 경우 오히려 기업들의 준법의식을 높이고, 투명성을 제고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징벌적 손해배상금이 실제 손해 배상금의 100~500배에 이르는 것으로 언론에 보도된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이는 배심원의 평결에 관한 사항이고, 실제 미국의 최종심에선 통상 1~4배, 최대 10배 정도만 인정되고 있다. 상당수의 경우 그 한도액이 법률에 명시적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나 혼선은 없어야 할 것이다.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우선과제
영미법계에선 사법영역 전반에 걸쳐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특정 분야-예컨대 공권력 남용에 의한 기본권침해나 소비자보호 분야-에 우선 적용해본 후 이를 점진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럼으로써 운영을 통해 발생되는 문제를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배상액의 배수도 적용 분야별로 달리해야 하고, 그 수준 역시 합리적으로 규정돼야 한다. 또한 가능한 범위 내에서 관련 보험제도도 지원되어야 하고, 필요한 경우 시행에 합리적인 유예기간도 두어야 한다. 무엇보다 제도 도입에 대한 사회적인 이해와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제도에 대한 편견이나 불필요한 오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얘기다. 물론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 우리 상황에 맞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정립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다.
미국에서는 반독점규제법, 소비자보호법 등 200여 개의 법률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을 인정하고 있다.